전방삭 장군의 행적을 찾기 위해 함께 전투한 장수들의 기록을 살펴본다.

앞서 말 한데로 전방삭 장군의 유품과 기록이 거의 없다. 그래서 필자는 당시 같이 전투를 한 장수들의 기록을 찾아 발이 부르트도록 동분서주하며 자료를 구해냈다. 그러나 기록이 있을법한 고서를 찾기에는 힘이 부족했다. 이제는 여러모로 한계를 느끼고 멈춰서버렸다. 안타깝다.

다음에 소개할 장수들은 전방삭 장군과 향리를 지키기 위해 함께 전투를 하신 분 들이다. 이분들의 기록으로 전방삭 장군의 행적을 찾아내고자 함이다. 대강의 이력은 앞에서 밝힌 바 있기에 전투상황이 기록된 내용만을 들추어보겠다. 

▆ 최대성(崔大星)
충절사지(忠節祠誌)에 국사편찬위원장 이성무(李成茂)님이 기록한 내용을 요약 정리해 본다.
“최대성은 향리인 보성에 돌아와 모의장(募義將)으로서 의병활동에 참여했다. 일본군이 칠천양 전투의 패배를 복수하기 위해 보성, 흥양(고흥)등 전라도 지역을 초토화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향토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의병을 규합해 순천, 광양, 고흥, 보성 등지에서 전방삭, 송대립, 김덕방, 황원복 등과 함께 수차에 걸쳐 승전하였다. 그러나 6월 8일 안치전투에서 적군을 대파하고 추격하던 중 불행히 가슴에 적탄을 맞고 순절했다.”라고 기록하였다.

다른 기록물로 여러 문인들의 상소문을 들 수 있으나, 문익점(조선 중기의 학자)의 후손인 문희순(文希舜) 사인(士人)이 방백(方伯) 이사명(李師命)에게 올린 상서(上書) 내용을 간추려 본다. 이 상서문은 1652년(신묘년)에 올린 것이기에 전투의 내용이 확실하다고 보인다.

▲ 문희순 상서문

위의 내용은 1605년 선조임금이 선무원종공신을 선정 록권을 하사했는데, 최대성 장군은 많은 공적이 있음에도 탈락된데 기인한 것이다. 탈락의 이유는 최대성 장군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 잠시 군무를 이탈했다. 이를 알게 된 이순신장군은 최대성 장군을 벌하여주라고 장계를 올린 것이 공신 선정 탈락 사유이다. 향리의 사인들은 최대성의 공적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최대성의 공적을 샅샅이 아뢰어, 공적을 인정하고 명예를 회복하여 주기를 간청한 내용이다.

상서 내용중 전투에서 전방삭 장군과 함께 싸운 내용만을 간추려 요약해 본다.
“적선이 예교(曳橋:보성군 득량면 현 예당)에 와서 정박했다는 급보를 받고 달려가니 벌써 안치(雁峙: 보성군 안치산)에 진을 치고 있었다. 여러 장수들과 역할을 분담하여, 정회(鄭繪)와 황원복(黃元福)은 전후로 밀어가며 무찌르고, 언립(彦立)과 두리동(豆里同)은 좌우를 협격하고, 전방삭(全方朔)과 후립(後立)은 선로를 막아내는 작전으로 전투를 했는데, 최대성은 적진 속으로 돌진하여 무수히 적을 베었으나 적의 탄환에 맞아 순절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상당히 많은 분의 기록이 충절사지에 나와 있으나, 다음기회에 다시 한 번 살펴보겠다.

▲ 충절사지(보성향교발행)
▲ 보성 안치산, 죽전벌 전투지역

 ▆송대립(宋大立)

▲ 송대립 충효록

위의 책은 1754년 대제학 남유용(南有容)의 서문을 시작으로 많은 분들이 송대립 장군의 충절을 찬양하는 글과 시를 싣고 있으며 1980년 10월 재발행 되었다.
많은 분의 기록이 있으나 아래 4분의 기록이 엇비슷하여 이를 적어본다.
∙팜의공 행록(參議公 行錄) 갑신년(1704년) 9월 불수손(不首孫) 문상읍(文祥泣) 혈서(血書)
∙행장(行狀) 영주(瀛洲) 후학(後學) 양거안(梁居) 근장(謹狀)
∙행장(行狀) 서령(瑞寧) 류승(柳乘) 근장(謹狀)
∙묘표(墓表) 통정대부(通政大夫) 행사헌부집의(行司憲府執義) 겸(兼)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진선(進善) 박필주(朴弼周) 찬(撰)

이분들의 글은 순종 30년(갑신.1704년) 4월 충신문(忠臣門) 정려를 세울 때 쓴 글로 보여 진다.
“공은 전방삭(全方朔), 최대성(崔大晟), 김덕방(金德邦)등과 함께 예진(曳津)에 침입한 적선 30여척을 대파 하였으니, 그때 공이 사살한 적이 수백 명이었다. 이어 다시 흥양의 망저포에 적선 수 십 척이 침입하여 그 적을 소멸하고”라고 적혀있다.

▲ 박필주 글
▲ 흥양 망저포, 첨산 전투지역

▆황원복(黃元福)
보성인물사(寶城人物史)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597년(선조30) 3월 정유재란 때에 전라도 공략을 위해 예교(曳橋 )근해에 주둔한 1만 3천명의 왜군 일부가 보성 예진(曳津) 및 고흥 망저포 연안에 나타났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출병하여 왜적을 격멸하였다. 고흥 첨산(尖山)전에서도 많은 왜적의 수급을 베었고, 1598년 4월에 벌교읍 벌교포(筏橋浦), 영등포(永登浦), 장암포(長岩浦), 대포(大浦)등에 침입한 왜적을 섬멸하고, 6월에 예진에 정박 중인 적선 10여척의 왜군이 쳐들어오자 안치(雁峙) 전투에서 분전하였다. 왜군이 죽전(竹田)에 결집하자 전방삭(全方朔), 최후립(崔厚立), 최언립(崔彦立), 정회(鄭會)와 함께 수많은 왜적을 참살하는 전공을 세웠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 보성인물사
▲ 보성 예진 전투지역

▆정회(鄭繪)
자세한 기록을 찾지 못했다. ⌜보성인물사⌟에는 “1597년 보성의 방수장(防守將)이 되어 6월에 최언립, 황원복 등과 합세하여 죽전(竹田)에 결진하고 있는 왜적을 섬멸하고 잔적을 추적하다 흉탄에 맞아 같은 해 9월 27일에 순절하였다.” 라고 적혀있다. (전방삭 장군이 죽전벌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기록이 확실한데 기록이 없어 유감이다.)

▆ 김덕방(金德邦)
자세한 기록은 찾지 못하고 portal site naver에서 본 내용을 기록해 본다.
“임진왜란당시 전라좌수군의 관할 구역인 고흥, 보성 일원에서 해안에 침몰하는 적을 상대로 유격전 형태로 전방삭, 송대립, 최대성과 함께 의병을 모아 동맹회군하여 큰 전과를 거두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전투의 기록이 객관적으로 기록된 내용은 찾을 수 없어 유감 되고, 아쉽다. 각기 후손 나름 데로 자기 선조의 전과를 자랑코자, 협동하여 전투한 장수들의 지휘권을 갖고 활동한 것처럼 기록하고 있다. 사회 생활의 범주나 군생활의 계급적 지휘 체계를 생각하면서 아래의 내용으로 여러분의 판단에 맡긴다. 

∙전방삭 – 1545년생. 1575년무과급제.    사후 선무원종공신 2등급 
∙송대립 – 1550년생. 1594년무과급제.    사후 선무원종공신 1등급          .
∙최대성 – 1553년생. 1585년무과급제    사후 증 형조참의         
∙황원복 -  미상          ?           사후 선무원종공신 2등급
∙정회   -  (1570?추정)    ?           사후 선무원종공신 3등급
∙김덕방 -  미상          ?           일본으로 납치 (의술전파)

위의 사실로 본 필자의 견해를 말하고자 한다. 출생연대가 미상인 정회는 ⌜보성인물사⌟에 선거이(宣居怡 : 1550년)가 장인(丈人)으로 나와 있다. 그렇다면 1570년생 정도로 보아지고 구전에 의하면 황원복은 젊은 나이에 비해 용감했다고 한다. 이러한 근거로 보았을 때 많게는 20여살 후배이고 적게는 5살 후배들이다. 그리고 무과 급제년도를 살펴보면 10년 이상의 후배들이다. 군대의 체계로 보아 전방삭 장군이 다른 장군의 명령 하에 있었다고는 믿기지 않는다. 그렇다고 여러 장수들에게 작전을 명령했다고 주장하기도 난처하다. 증거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전방삭 장군의 기록이 없어 또 한 번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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