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은 여천군 소라면 봉두리 당촌

60여 호인 전형적인 심심산골 농촌이다

기와집은 2~3채에 불과했고

대부분은 볏짚 이엉으로 덮은 초가집들이었다

겨울 준비를 위해선 타작 후 생기는 볏짚으로 이엉을 엮어

기존 헌 이엉을 걷어내고 새 것으로 덮었다

이엉을 바꾸는 것은 1년 중 큰 행사의 하나였다

돌담 골목길은 좁아 두 사람이 겨우 피할 정도였고

어쩌다 짐을 이고 진 아주머니와 지게꾼을 만나면

반대 측 사람은 담벼락에 찰싹 붙거나 쪼그려 앉아야 했다

서로간의 정을 나눌 수밖에 없는 취락 구조였던 것이다

▲ 출처 : 여수일보. 2007년 모습. 봉두리 당촌 마을. 좌측은 보이지 않는다. 갑의산 아래 숲이 당산.

우리 집은 마을 좌측 끝머리 중간쯤에 있었다

집 우측 남쪽엔 자그만 뒷동산이 있었고

좌측 북쪽엔 사립문과 돌계단이 있었는데

돌계단을 내려가면 돌담 골목길로 이어졌고

쭉 타고 내려가면 마을 앞 큰 길에 닿았다

집 좌우측 사이엔 약 100여 평의 큰 앞마당 있었는데

지금도 마당에서 타작 소리가 들리고 모깃불이 피어오르는 듯하다

한 여름 밤엔 마당 한 가운데 멍석을 펴고 누워

하늘에 흐르는 구름과 달을 보면서 별들을 헤아렸고

쏟아지는 별빛 사이를 헤치며 꿈속으로 빠졌다

검은 하늘의 하얀 구름과 반짝이는 별들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 출처 : pixabay. 맑은 날 멍석위에 누워 본 하늘과 비슷하다. 별빛이 찬연하였다.

마당 전면엔 대나무 밭이 좌에서 우로 삥 둘러 있었는데

대나무 밭에서 숨바꼭질과 꼬리잡기놀이를 하였다

사립문에서 약 100m 쯤엔 햇볕이 잘 드는 양다리가 있었는데

자치기, 땅따먹기, 점수 따먹기, 진똘이를 하는 우리들의 놀이터였다

그리고 집에서 150m 쯤엔 시냇물이 흘렀고

여름엔 목욕하는 수영장으로 겨울엔 얼음지치는 썰매장이 되었다

그땐 깨끗하고 풍부한 시냇물이 거의 1년 내내 졸졸졸 흘렀다

▲ 출처 : pixabay. 마을 앞 시냇물과 비슷하다. 지금은 개발 명목으로 거의 원형이 사라졌다.

봉두(鳳頭)라는 이름은 마을 뒷산이 명당인 황새봉과 연결돼 있는데

황새봉의 머리에 해당된다 하여 봉두(鳳頭)라 했고

당촌(닻촌)은 풍수지리에서 바다에 떠있는 배의 형세와 같아 불렸다 한다

그래서 예전엔 마을에 우물 파는 것을 금기시 했는데

배의 형세인 마을에 우물을 파면 배 밑창에 구멍 뚫는 것이기 때문이란다

마을 뒤의 갑의산은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이곳에서 피 묻은 갑옷을 갈아입었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 출처 : pixabay. 초가집과 돌담 골목길. 우리동네는 아니지만 비슷하다.

우리 집은 동동남향이라 아침에 태양이 거의 정면에서 떠올랐는데

한지를 붙인 방문을 뚫고 비치는 아침 햇살은 강렬했다

농촌은 늦잠을 잘 수 없는 형편이지만

우리 집은 구조적으로 더더욱 불가능했다

놀이터인 양다리에서 좌로 약 200m쯤 가면

우리 마을의 자랑인 당산과 성황당이 있었다

▲ 출처 : pixabay. 당산나무는 대부분 이런 나무들이다. 다람쥐처럼 올라가 놀았다.

당산엔 코흘리개들의 놀이기구인 50~60그루의 나무가 있었는데

2~3명이 양팔을 벌려 잡아도 남을 만큼 큰 거목들이었다

당산나무 아래는 실개천이 흘렀고 당산에 가면

새와 매미들이 먼저 나무 가지를 차지하고 노래하고 있었다

성황당 중앙엔 돌무더기로 된 돌탑이 있었는데

돌들 틈 사이엔 동전과 지전이 군데군데 끼워져 있었다

삼월삼짇날, 단오절, 유월유두, 칠월칠석, 한가위, 동짓날, 설날, 정월대보름엔

어른들의 농악단이 마을 곳곳을 돌면서 악귀를 쫓고 복을 빌었다

끝 무렵엔 반드시 성황당에 들려 돌탑돌이를 하고 제사를 지냈는데

그때 제주들께서 동전과 지전을 돌탑 사이에 꽂아 넣었다

지키는 사람은 없었지만 성황신이 보고 있다하여

보통 아이들은 두려움으로 감히 접근하지 못했지만

쟁스러운 아이들은 거리낌 없이 지전 동전을 몰래 빼내

엿과 사탕을 사먹었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그 모든 곳에는 항상 코흘리개 친구들이 있었다

▲ 출처 : pixabay. 성황당. 우리 마을에 있었던 모습과 근사하다. 돌무더기 앞에는 제사 음식도 있었다.

지금이야 60대 중후반의 늙은이가 되어 버렸고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친구들도 있으며

만날 수 있는 친구들도 몇 명 되지 않지만

고향을 찾을 때마다 철없고 천진했던 코흘리개 친구들이 아련히 떠오른다

그러나 이젠 옛날 모습은 거의 없어졌고 있더라도 많이 퇴색되었으나

고향을 찾을 때마다 옛 생각에 마음이 찡하다

또한 저절로 피어오르는 잔잔한 미소와 기쁨을 감출 수 없다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은 나를 그 시절로 되돌려

잠시지만 청초한 어린 시절로 싱싱한 심신을 환생시키는 것 같다

코흘리개 친구들이여! 사는 날까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소서!

 

편집 : 양성숙 객원편집위원

김태평 편집위원  tpkki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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