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운산 장군의 삶을 기록한 한겨레온 연재를 모아 책을 출판합니다.

생애 첫 출간에 대한 불안과 감회가 교차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가족사를 통해 봉오동전투·청산리전투 등 만주지역 무장독립전쟁사가 축소되고 왜곡되었다는 사실을 들으며 자랐습니다. 역사의 현장을 지켰던 할머니 김성녀 여사는 온 일생을 통해 역사적 진실을 증언했고, 최운산 장군의 아들인 아버지는 모든 책이 역사를 왜곡해도 후손인 우리는 고향 봉오동의 역사를 잊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하시곤 했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역사에 부여된 사회적 권위에 맞서 용기를 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모르는체 외면하기도 하고, 현재에 주어진 몫을 잘 하는 것이 더 우선이라고 우기기도 했습니다.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내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모두가 외면해도 제가 할 수 있는 것을 해야했기에 한 걸음 한 문장을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역사서가 아닌 가족사가 중심입니다. 그렇게 모아놓은 가족사에 우리나라 근현대사가 씨줄날줄로 엮여 있었습니다. 

▲ 1922년 모스크바 극동 민족대회에 참석한 독립운동가들 최운산 장군(중앙)을 비롯한 여운형 선생(왼편) 등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북간도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무장투쟁을 했던 우리 독립군들은 황량한 만주벌판에서 무기도 식량도 없이 헐벗고 굶주렸다고 생각합니다. 조국의 독립에 대한 열망과 애국심만으로 그 모든 어려움을 극복했을 거리고 믿으며 경의를 표합니다. 기관총과 대포로 무장한 대규모의 일본 정규군을 대파한 봉오동전투·청산리전투의 승리가 무기도 없는 게릴라들이 이뤄낸 눈물겨운 기적이라 생각합니다. 우리 역사가 만주 독립운동에 대해 오랫동안 그렇게 설명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런 기적이 정말 가능한 일이었을까요? 화승총을 가진 산포수 출신 의병 무리들이 일본 군대와 맞붙어 이겼다고요? 홍범도 장군이 총을 잘 쐈기 때문이라고요? 명사수라 한두 명을 먼저 쓰러뜨릴 수는 있었겠지요. 그러나 상대는 대규모 정규 군대였습니다. 자기편이 공격을 당해 쓰러지면 일본군은 어떻게 반격했을까요? 러일전쟁과 청일전쟁을 승리했던, 실전 경험이 풍부한 일본군의 대응을 상상해 보세요. 동학농민군이 우금치에서 일본군에게 전멸당한 것은 그들에게 신형 무기가 있었지만 동학군에겐 없었기 때문입니다.

봉오동전투의 승리는 독립군이 매복을 하고 봉오동으로 들어온 일본군을 포위한 것이 주효했다고 설명합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 독립군에게 무기가 없었다면 매복이 무슨 소용이 있었을까요? 기관총과 대포로 완전무장한 일본군이 스스로 무너졌을까요? 현대전의 핵심은 무기입니다. 상대에 필적할 무기와 병력도 없이 전쟁에서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봉오동전투'는 무기와 무기가 격돌한 현대전이었습니다. 우리가 일본군에 이겼다는 것은 우리 독립군도 무장력을 제대로 갖춘 군대였다는 뜻입니다.

전쟁을 준비하는 일은 하루아침에 완성할 수 없는 일입니다. 군사를 모으고, 매일 정신무장과 체력을 단련하고, 무기를 갖추고, 총포사용 훈련을 반복해야 하는 일입니다. 지금도 모든 군대는 언제일지 모르는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쉬지 않고 실전훈련을 거듭합니다. 그래야 언젠가 벌어질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봉오동·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끈 우리 독립군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급조된 게릴라가 아니라 임시정부를 받아들인 대한민국의 독립군들이었습니다.

왜 우리는 지금까지 봉오동전투·청산리전투의 승리를 마치 신화처럼 이해했을까요? 어떻게 그런 역사해석이 가능했을까요? 암기 위주의 무조건적인 역사교육이 만주지역 독립전쟁의 승리를 역사가 아닌 신화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 독립군이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는지 합리적으로 이해되지 않지만 일본군 사망자 숫자를 외우며 자랑스러운 승리라고 스스로를 설득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피상적 이해만으로는 그날의 승리가 세대를 뛰어넘는 민족적 자부심이 될 수 없습니다. 숫자나 기억하는 역사공부는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하지도, 선조들의 삶에 응답하는 용기를 가르치지도 못합니다.

만주 봉오동은 장기간에 걸쳐 독립군을 양성한 본격적인 항일무장독립군기지였습니다. 봉오동을 신한촌으로 건설한 간도 제1의 거부 최운산장군은 1912년 조선 사람들을 마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봉오동에 자위부대를 창설했고, 그 100여 명의 사병부대를 모체로 전국에서 모여오는 애국청년들을 정예 무장독립군으로 양성하기 시작했습니다. 독립군이 점점 늘어나자 1915년 봉오동 산중턱을 개간해 연병장을 만들고, 벌목한 나무로 막사를 짓고, 본부 둘레에 토성을 쌓아 독립군기지 봉오동을 완성했습니다.

그러던 중 1919년 3.1운동이 전 국민을 일깨웠고,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창립되자 최운산 장군은 사병부대 ‘도독부’를 대한민국의 첫 군대 “대한군무도독부(大韓軍務都督府)”로 재창설했던 것입니다. 10년 동안 봉오동의 주민을 지켰던 이 들을 중심으로 간도의 독립군들이 모두 통합한 통합군단이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府)"입니다. 통합문서에 1920년 5월의 그날을 대한민국2년 5월로 정확하게 기록해 대한민국의 군인임을 자임했던 분들입니다. 봉오동의 독립군은 수천의 독립군이 3개 연대 예하 각 대대와 중대, 후방부대와 보급부대. 의무부대까지 편제했던 정식 군대였습니다.

대규모 독립전쟁을 몇몇 게릴라전으로 축소해버린 지난 역사로 인해 무장독립전쟁의 장대한 서사를 배우지 못한 우리는, 만주라는 역사적·시대적 공간을 단순한 물리적 공간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는, 그날의 승리를 민족적 자부심과 일상의 독립정신으로 승화시키지 못했습니다. 그저 전쟁에서 이겼다니 기뻐했고 쉽게 잊어버렸습니다. 일본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기까지 만주의 독립군들이 어떻게 전쟁을 준비하고 조국의 독립이라는 이상을 향해 나아갔는지, 수천 명의 독립군들이 하나가 되어 목숨을 걸었던 그날의 언어는 무엇이었는지, 간절했던 그들의 꿈과 희망이 무엇이었는지 함께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승전의 역사는 숫자화 되어 우리 기억의 창고에 갇혀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제 역사의 이름으로 그날의 전투현장을 불러내고 복원해야 합니다. 역사 속으로 들어가 봉오동 산위의 참호에 매복한 채 일본군에게 총구를 겨냥하고 기다렸던 그 순간의 긴장을 우리도 함께 느끼고 나눌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야 그 시간이, 그날의 역사가, 시대가 당신들에게 요구했던 그 가열찬 열정이 후세대인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고 오늘의 우리에게 당신들의 삶을 전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최성주 객원편집위원  immacolet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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