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마치 계획이라도 된 듯 모든 일정이 취소되면서 난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늘 일상에 쫓기는 삶을 사는 나에게 이 빈 시간은 마치 모든 우주가 정지해버린 느낌이었다. 이 시간을 온전히 나를 위해 사용하자고 마음먹고 핸드폰도 끄고 이틀 동안 조용히 지냈다. 그러다 3일째 핸드폰을 켜자 기다렸다는 듯이 필리핀에서 연락이 왔다.

“방학인데 뭐하고 지내세요?” 9년 전 세 명의 친구가 모여 만든 NGO단체인 ‘필리핀 희망나무'에서 온 연락이다. “특별한 일 없으면 필리핀 함 왔다가세요.” 이 말에 난 비행기 표 알아보고 4일 만에 필리핀 '수리가오'라는 곳으로 떠났다. 세부에서 국내선으로 환승하여 민다나오 섬에 있는 수리가오 지역으로 들어갔다. 몇 번 필리핀 경험이 있어 낯설지는 않았지만 수리가오 시티에서 차로 1시간을 더 들어간 '아몬따이' 마을은 현지인들이 한국인을 거의 본 적이 없을 만큼 외진 곳으로 다양한 민족이 살고 있었다.

▲ 아몬따이 여성 활동가들

‘희망나무’는 의료, 경제적인 지원 단체로 한국인 간호사가 파견되어 있다. 경제적 어려움이 있는 가정에는 장학금 지원으로 아이들이 학업을 이어나갈 수 있게 돕는다.

각 가정과 지역 보건소를 방문하니 생각했던 것보다 더 열악했다. 희망나무와 협력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가톨릭국가로 피임이 허락되지 않아 각 가정에는 5~10명이 넘는 자녀를 두고 있었다. 이 자녀들을 양육하는 것이 어려워 10대인 자녀들을 결혼시키고 다시 출산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었다. 비위생적인 환경, 대나무로 지어진 집 구조상 여성을 보호할 수 있는 곳이 전혀 아니었다. 남편의 외도, 가정폭력, 실직으로 가정경제까지 책임지는 여성도 많았다. 어린 여성의 반복되는 출산은 건강문제가 되기도 했다. 장학금을 지급하는 아이들 어머니들 위주로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아이들 미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다.

어머니들은 ‘자신의 자녀들이 일찍 결혼하는 것을 원치 않으며 공부해서 자신만의 일을 갖기 원한다’고 했다. 희망이 있었다. 여성 활동가를 세우면 마을에서 일어나는 소식도 듣고 교육도 가능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38세인 한 여성은 아이가 12명이다. 이제 더 이상 아이를 낳고 싶지 않다고 했다. 지역 보건소를 방문해서 피임약을 요청하니 소수민족이기 때문에 아이를 더 낳으라고 한다. 어머니 건강이 위험하다며 설득하여 피임약을 구할 수 있었다.

가장 취약한 존재인 여성의 삶은 많이 고단해보였다. 결혼, 임신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38세인 엄마는 자신이 임신할까 걱정이고 남성에 의해 강제로 결혼한 2명의 딸도 걱정해야한다. 첫째 딸은 임신 중인데 몸이 안 좋다고 해서 가정방문을 했다. 이미 두 아이가 있는 상태이며 영양실조와 임신중독증으로 부종이 심했다. 끊임없는 기침에 혹 결핵이 의심되어 병원 검진을 권하니 1시간 거리에 있는 병원까지 차비가 없어 갈 수가 없다고 한다. 마치 자신의 삶을 포기한 듯 줄담배를 피우며 기침을 하고 있었다. 병원비와 차비를 지원하기로 했으나, 산모는 괜찮다며 가지 않겠다고 했다. 엄마의 설득으로 며칠 있다 병원에 다녀온 결과 결핵은 아니라고 했다. 산모를 위해 영양제와 정기 검진을 하기로 했다.

엄마와 산모인 딸에게 임산부로서 지켜야 할 건강에 대해 몇 가지 정보를 제공했다. 이웃에 있는 다른 임산부들에게도 알려주기를 당부했다.

9일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매일 지역 여성들을 만나며 위생과 여성 건강에 대해 교육을 했다. 지역의 변화를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엄마들이 먼저 교육과 훈련으로 변화를 시도한다면 딸에 또 그 딸도 변화될 것이라 생각한다. 가부장적인 한국이 변화되어 온 것처럼...

교육의 기회가 적은 나라일수록 여성들은 성적, 경제적으로 남성의 소유물로 살아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여성들도 당당히 함께 살아가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성들을 위한 활동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 참고 : <희망나무>는 2011년 정신과의사 1명, 정신건강간호사1명, 정신건강사회복지사 1명으로 결성되었다. 세 사람 모두 정신과병원에서 근무한 인연으로 네팔에서 정신과적 어려움을 가진 환우와 그 가족을 돕자는 취지에서 시작했다. 2015년부터 정신건강간호사인 활동가가 필리핀으로 이주하면서 지금은 네팔과 필리핀 두 곳에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아직 정식 단체로 등록되지 않았지만 회원 40명이 꾸준히 후원해주는 자금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겨레 주주이신 박연화 통신원은 <희망나무>의 대표를 맡고 있다.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박연화 주주통신원  duri92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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