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가훈(家訓)과 마라톤

1911년 –아버지께서 출생하신 해, 1922년 – 어머니께서 출생하신 해. 내가 태어나기(1962년) 훨씬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에 대한 추억은 없다. 단지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농촌에서 서생(書生)으로 계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희미한 기억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런데, 왜 서생까지 하신 할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을 학교를 안 보내주셨을까? 참고로, 나의 아버지, 어머니께서는 두 분 다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하신 분이시다. 다행히도 아버지께서는 서당(書堂) 근처에서 일하고 얼른거리시며 한글을 깨치실 수 있으셨고, 어머니께서는 내가 십대였을 때 작은 형과 함께 한글을 알려 드려 성경을 뜨문뜨문 읽으시던 모습이 아련하다.

우리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는 학교에서 종종 자기 집에 가훈을 적어내라는 주문이 있곤 하였다. 그럴 때 마다 집에서 가훈을 보지도 못했고 들은 적도 없었던 나로서는 작은 고민거리였다. 때로는 성실, 때로는 정직 등 그때그때 마음이 내키는 대로 적어내곤 하였던 것 같다.

그랬다, 우리 집에는 가훈이 없었다.

하지만, 군복무를 마치고 졸업하거나 졸업을 앞둔 두 아들을 둔 아버지가 된 지금, 나는 우리 부모님의 가훈이 무엇이었다는 것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땀’, ‘정직’ 그리고 ‘긍휼’이었다.

나는 행주산행이 건너 다 보이는 행신(소마니)에서 태어났지만, 당시 반장을 맡아 동네일을 맡고 계시던 아버지께서 가까운 친척에게 사기를 당해 동네 공금을 날리게 되어 농민이 목숨같이 여기는 땅을 모두 팔아 공금을 다 변제하신 후 나머지 돈으로 당시는(1963년), 한반도 남쪽에 최전방 이었던 파주 장 파리 갈대밭을 뜻을 같이하는 친구들 서너 명이 함께 사서 이주하신 후 평생을 그곳에서 갈대밭을 농토로 바꾸시며 사시던, 동네에서 ‘농장 안씨’란 호칭으로 불리며 사시다 돌아 가셨다( 돌아가시기 전 7년간을 고혈압과 중풍으로 누워 게시던 아버지를 어머니께서는 단 한번 인상 찌그리는 적을 본 기억이 없을 정도로 지극 정성으로 돌보아주셨다, 하지만, 그 돌봄이 힘드셨는지, 아버지가 돌아가 신 후 어머니께서는 가끔 혼자 말로 말씀하시곤 하셨다. “ 나는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말다가 죽어야지”... 그 후 정말이지 어머니께서는 1987년 추석을 앞둔 열흘 전에 드시던 것이 체 하신 후 병원 입원 일주일 만에 병명도 모른 채 돌아가셨다)

내가 태어나던 해에 아버지께서는 이미 51세, 어머니께서는 40세 이셨다. 우리 집안에서 둘째 형은 어려서부터 공부를 매우 잘했다. 때문에 19세에 시집가서 사시는 큰 누님(고양시 화전동)댁 단칸방으로 유학을 가서 공부를 지속할 수가 있었다( 이 지면을 통해 당시 큰 매형도 학교를 다니지 못하신 분으로 힘든 일을 하시며 사셨음에도 불구하고 처남을 4년 동안 단칸방에서 함께 살아 주신 은혜에 대해 감사와 존경을 보냅니다, 감사합니다. 매형)– 작은 형은 군 제대 후 서울시 교육청 9급 공무원으로 직장을 다니며 야간 대학을 다녀 3학년 때 행정고시에 합격한 후 국가 공무원으로 영국유학 후 스위스 제네바에서 근무를 마친 후 특허청으로 복귀해서 평생을 공무원으로 지내다 최근에 은퇴함-

반면에, 나는 25여년간의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지난 2007년 파주 고향으로 돌아 온 후 장마루 동네 어르신을 아내와 함께 찾아 인사를 드릴 때 수 십년만에 본 나를 향해 하시는 어르신 말씀이, “아~ 늘 나가 놀기 좋아하던 재영...” 하시게 되어 이 얘기를 아내가 종종 내게 놀려 먹곤 한다. 그랬다, 나는 늘 나가 놀기를 좋아하던 애였다. 산으로 들로, 또 강으로... 나의 어린 시절 우리들이 놀기 가장 좋았던 장소는, 잔디로 잘 가꾸어진 묘지였다.

동네에서 1km정도 떨어진 앞산에 가면 우리들의 놀이터 ‘묘지’가 있었다. 그곳에서 우리들은 당시 유행하던 레슬링도 하고 씨름도 하고, 산소에 올라가 미끄럼도 타면서 놀았다. 최전방 민통선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아무 제재 없이 들어 갈 수 있었던 임진강이 우리들에게는 최고 놀이터였다.

여름에는, 초등학생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큰 임진강을 개 수영으로 넘어 갔다 다시 돌아오기도 하였고, 겨울이 되면, 꽁꽁 언 임진강에서 썰매를 타고 끝이 안 보이는 곳까지 갔다 오곤 하였다, 때로는 얼음을 깨고 구멍을 꿇어서 추위로 인해 잘 움직이지 못하는 물고기들을 포크를 끝에 매단 긴장대로 끄집어 올리기도 하였다.

어느 날 저녁, 부엌에서 ‘펑~’하는 소리가 나서 달려가 보니 들녘에서 걷어 온 땔감에서 당시 민통선 지역에서 종종 발견되곤 하던 폭발물 잔여물이 터지게 되어 아궁이에 불을 지피시던 어머니 얼굴에 파편이 박히게 되어 피투성이 되셨다.

하지만 당시 어머니께서 하시던 말씀이 50여 년 다 되어가는 오늘날에도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 오늘은 네가 불을 때지 않아 다행이다 ”

내 어린 시절 우리 집에서 돈 구경해 본 기억은 없다(단지 찬장 그릇 밑에 숨겨 놓으신 동전 몇 닢 말고는... 이 동전들은 종종 내가 몰래 꺼내가 동네 만화방에서 사용되곤 하였다. 얼마 안 되는 동전이 사라지게 되면 누구 그런지를 잘 아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참 있다 그릇 밑을 살펴보면 또 다시 동전을 몰래 가져 갈 수가 있었다. 나는 단연코 이야기 할 수 있다- 내 일생에서 중요한 스승 중 한 부분이 당시의 만화책 이였다고, 심지어 대학을 졸업 후 면접을 볼 때조차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이 무엇이냐는 면접관의 질문에 감명 깊이 읽었던 만화책 제목을 말했을 정도이니...)

당시에는 동네에 가게란 것이 거의 없었기에 행상이라 불리는 봇짐을 머리에 이거나 등에 지고 생필품을 팔러 다니시는 분들이 많이 있었다.

골목을 지나가며 외치는 행상꾼들 소리를 듣게 되시면 어머니께서는 늘 쫒아 나가시 곤 하셨다. 물건을 사시기 위해서? 아니다. 당시에 우리 집에 돈은 없었으니...

행상하러 다니느라 굶었을 그 분들을 불러 따뜻한 밥 한 끼니라도 먹이기 위해......

아버지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은 별로 없다- 충청도 특유의 무뚝뚝함도 있거니와 워낙 말이 없이 사시던 분이셨기에...... 단지 어린 시절 남는 기억이라는 것이, 남들이 좋은 땔감들 다 베어간 후 남은, 가시가 많은 아카시아 나무를 당시 미군이 버리고 간 다 헤진 군용 장갑을 끼시고 아카시아 나무를 하러 가시던 아버지가 끄시는 마치를 타기위해 쫒아 다니다가 어느 날에는 자른 나무 밑동에 걸려 넘어지면서 왼편 얼굴이 잘려 나간 나무 밑동에 찍혀 왼편 얼굴에 구멍이 났던 기억... 초등학교 때 집집마다 앞마당에 쌓아 논 퇴비덩이에 부으신다고 다니던 학교에 똥지게를 메시고 오시던 아버지가 미웠던 기억, 어느 날에는 학교 운동회 날 가짜 낚싯대 놀이 때에는 누군가 걸어 준 작은 선물이 걸린 낚싯대를 어깨에 걸치시곤 어린아이 같이 환한 함박웃음을 지으시며 달려오시던 모습들이 아른거릴 뿐이다.

위에서 언급한 친척으로 인해 두 번의 사기로 피와 땀으로 평생을 일구어 오던 생명토를 다 잃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평생 기억 속에 우리 부모님이 그 친척을 포함한 그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원망하시던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집집마다 걸어 두었던 그 흔한 ‘가훈(家訓)이라는 것을 본적도 들은 적도 나는 없다.

하지만, 지금은 알 수 있다. 우리집안의 가훈이 무엇이었는지를... 그것은, 나보다 어려운 이웃들에 대한, 배려, 그리고 긍휼 이였다는 것을...

땅(=땀)은 누구를 원망하지 않는다는 진리도 나는 알 수 있다.

원망과 핑계가 아닌 농사꾼은 땀으로 말한다는 것도...

나는 마라토너다. 2000년 스키114 라는 동호회 활동을 시작하면서 비시즌 활동으로 시작한 마라톤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당시 스키114 마라톤 구성원들 6명이 지금까지 함께 활동하고 있다. 다들 바쁜 직장 생활인으로 함께 만나 연습은 일 년에 1~2회 뿐이지만, 꾸준하게 풀코스에 도전하고들 있다.

2000~ 2017년까지 풀코스를 20회 이상 뛰다가 지난 3년간 대학원을 다니며 공부하느라 3년 동안 마라톤을 중단했던 나도 이번 코로나 사태를 겪으며 집안에 있기 보단 나가서 운동을 하자는 생각에 지난주부터 아침 일찍이 다시금 운동화 끈을 조여 오두산통일전망대가 눈앞에 펼쳐져 있는 평화누리길에서 마라톤을 연습 중이다. 이번 주에는 5km 두 번, 6km 한번 뛰면서 갑자기 내가 마라톤에 도전하게 되었던 동기를 끄집어내게 된 것이 주말에 사무실에 나와 이 글을 정리하게 된 동기다.

두 번의 사기로 인해 가장 어려웠던 시절에 어머니는 나를 잉태하게 되셨다.

당시 쉽게 만날 수 있었던 찢어지게 가난하던 시절이었다. 막막하시던 어머니께서는 나를 지우시고자 짠 간장을 들어 마신 후 높은 언덕에서 구르셨다고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머님 뱃속에서 계속 존재 했다. 태아 시절의 후유증인지 모르겠지만, 어린 시절 나는 매우 쇠약했다고 하셨다. 집안에 있는 작은 문턱조차 스스로 넘어가지 못할 정도로 약골이었다 하셨다. 어머니께서 나중에 말씀해 주셨던 얘기가 있다. 그 문턱을 향해 내가 말하길 “나도 넘어 갈 수 있어~ ” 하고는 시도하였다가는 그 문턱조차 넘지 못해 넘어진 내가 힘겹게 다시 일어나 다시 시도하는 나를 보시면 내가 가진 삶에 대한 의욕을 보시곤 “내 자식이 살 수도 있겠네.” 라는 희망을..

내가 마라톤을 시작하고 지금까지 마라토너로 살아가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마라톤은 절대 요행이나 운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이 농사꾼의 땀과 동일하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내 부모님에 대한 나의 사랑과 존경의 마음을 표시하기 위해서다. 위에서 이야기 되었듯이 어머니께서 나를 지우시고자 태아였던 내게 좋지 않을 시도를 하셨다는 미안함을 없게 해드리기 위해서는, 나는 건강하게 내 몸을 유지하는 것이다.

내가 어머니에 대한 가장 깊은 존경을 표하는 것이 내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나의 부모님께서는 단 한번 내게 이렇게 살고 저렇게 살지 말라 하시지를 않으셨다. 하지만, 그 분들은 삶 자체로 일생을 다하시는 그 날까지 늘 말씀해 주고 계셨던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한 집안의 가훈(家訓)이 말과 글에 있는 것만이 아니라, 그 분들의 삶과 일생에 녹아 있다는 것을...

내 평생의 삶에 있어 가장 안타까운 것은, 부모님 살아 계실 때 단 한 번도 동네를 벗어난 여행을 해드리지 못했다는 것이 영영 지어지지 않는 생채기로 남아 있다.

어른이 다 된 오늘까지도 그 상처는 아물지를 못하고 있다.

* 안재영 주주통신원은, 초등학교를 졸업하며 삶의 현장에 뛰어 들어가 신문 돌리기, 마을에서 운영하는 일일 수금원, 파출소 사환 등을 거친 후 10대 후반에는 전문 농사꾼과 동일하게 농사일에 전념하다가 큰형이 군 제대하던 해에 무작정 상경하여 다양한 직업군을 거쳐 뒤늦게 중동졸업, 고등졸업 검정고시를 통해 조금 늦게 대학을 졸업 한 후 직장생활 5년 이후 독립하여 1995년부터 지금까지 중소기업을 운영하며 여러 시민 단체를 후원하거나 대표를 맡고 있다. 헤이리마을에서는, 2008년 8월부터 영토문화관 독도 교육관을 무료로 운영하면서 인근 군부대, 학교 및 공무원 등 단체에 독도특강을 하고 있다. 2017년에는 북한대학원대학교에 입학하여 석사를 마친 후 2020년에 북한학 박사과정 중이다.

 

편집 : 객원편집위원 김혜성(cherljuk13@nate.com)

 
안재영 주주통신원  dooreah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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