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방삭 장군 공적 증거 자료를 찾아서 (3) - 충무공 사액사당(賜額祠堂) 제1호 여수 충민사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위패를 모시는 최초 사당을 전남 여수에 건립하게 된 경위를 알아본다.

선조실록 107권, 선조 31년 12월 1일 임자 5번째기사 1598년 명 만력(萬曆) 26년
비변사가 이순신의 사당을 세울 것을 요청하다

(국역)비변사가 아뢰기를,
"이순신(李舜臣)이 지난날 한산도에서 승첩을 거두어 큰 공을 세웠고, 주사가 패몰된 뒤에는 잔파된 나머지를 수습하여 기계와 군량을 전날과 다름없이 준비하였습니다. 이번 노량 해상에서 밤새워 혈전하여 적의 괴수를 불에 태워 죽이고 전함 2백여 척을 포획하기까지 하여 의기를 동남지역에 크게 떨치자 적추는 혼비백산하여 밤에 도망쳤으니, 국가를 회복시킨 공에 있어서 이 사람이 제일입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탄환에 맞아 목숨을 잃게 되었지만 숨을 거두면서도 조용히 처치하였으니 옛날 명장의 풍도를 지녔다고 이를 만하였습니다. 이제 성교를 받들어 관에서 장례를 치러주고 자식들도 모두 관직에 제수하였으니, 충의를 격려함이 이에 이르러 더할 나위 없이 되었습니다. 해변에 사당을 세우는 일은 좌수영 본진에 설립하여 봄·가을로 제사를 올리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리고 전사한 장사들에게 휼전(恤典)을 내리는 일도 해조로 하여금 속히 거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993년 6월 1일 사적 제381호로 지정되었다. 지정면적 9만 556㎡이다. 이순신이 전사한 3년 뒤인 1601년(선조 34) 왕명으로 우의정 이항복(李恒福)이 현지시찰을 하고 통제사 이시언(李時言)의 주관 아래 건립, 사액(賜額)된 충무공 관련 사액사당 제1호다.

원래는 충무공 주향(主享)에 전라좌수사 의민공(毅愍公) 이억기(李億祺)가 배향되었는데, 1677년(숙종 3) 보성군수 안홍국(安弘國)이 추가로 배향되었다. 1870년(고종 7) 서원철폐 때 훼철되었다가, 1873년 증수되었으며, 일제강점기에 다시 철폐되었다가, 1947년 지방유림이 원위치에 재건하였다.

경역은 1975~1984년 크게 증수 정화되어 사당(목조 와즙 13.23평)과 내삼문인 충의문(忠義門), 외삼문인 숭모문(崇慕門), 충민사유허비(忠愍祠遺墟碑) 등이 있고 경역 밖에는 하마비(下馬碑)·홍살문·관리사무소 등이 있다.

또한 충민사 바로 곁에는 충민사의 수호사찰인 석천사(石泉寺)가 있다. 이 절은 임진왜란 때 충무공을 선상(船上)에까지 따라다니며 모신 승려 옥동(玉洞)이 충민사가 세워지자 이를 수호하기 위해 지은 것으로, 큰 암석 밑에서 솟아나는 샘물에서 절의 이름이 유래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여수 충민사 [麗水 忠愍祠] (두산백과)
⋇사액(賜額 : 임금이 사당(祠堂) 서원(書院)등에 이름을 지어줌)

세월이 무수히 흐르면서 사인들이 이순신장군과 함께 목숨 걸고 싸운 장수들이 한 두 명이 아닌데  그들의 기록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 해오다가 1980년 8월 6일 국가의 승인 하에 충민사에 선조 임진 전라좌수영 이충무공 관하 진충 제공 추모비(宣祖壬辰全羅左水營李忠武公管下盡忠 諸公追慕碑)를 제막했다.

서두에 정운(鄭運)을 비롯해 108명이 기록 되어 있는데 전방삭(全方朔) 장군은 12번에 기록 되어있다. 그 의미를 되새겨보자. 앞서 보성, 고흥, 낙안등지를 지켜낸 장수 5명을 자주 거론 했는데 이 추모비에도 5인 전방삭, 최대성, 송대립, 김덕방, 왕원복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어 그 공적이 분명하고 이순신장군 관하에서 활동 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가 전방삭 장군에 대한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유품의 약탈로 증거 자료가 부족함에 일반인들이 전방삭 장군 공적 인정에 의아심을 갖는 자가 더러 있어, 후손으로서 전방삭 장군의 애국충정을 널리 알리지 못한 점에 기인되었다고 여겨, 분함과 원통함을 잠재울 수 없기 때문이다.

필자는 여기 기록된 108명의 명단을 난중일기에서 찾아보았다. 난중일기에 기록된 분은 44명이고, 나머지 64명은 기록이 없다. 이상하다. 여기 추모비에 기록된 분 정도이면 전라좌수영에서 이순신 장군과 생사고락을 같이하고 막중한 임무를 수행 했던 분들일 텐데 어떤 이유인지 매우 궁금하다. 위에서 거론된 승려 옥동(玉洞)은 이순신 장군을 선상까지 따라다니며 군무를 도왔고 충민사가 세워지자 그 곁에 석천사를 지어 이순신을 수호하는 일까지 한 분인데 난중일기에 그의 이름이 없다.

수수깨끼 같은 사연을 풀 수 있을런지 모르겠다. 전라 좌수영 관하 수군은 대략 1만여 명으로 알고 있다. 난중일기에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고 이순신 장군과 생사를 같이한 장수가 아닌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목숨 걸고 싸운 장수들에게 너무나 큰 배은망덕한 죄를 짓는 것이다. 난중일기에 나오는 인물은 많은 공을 세운 다수가 기록되어 있으나, 종의 신분 62명을 비롯해 군법에 의해 사형 당한 자, 국가를 배신하고 일본에게 우리군의 기밀을 누설하는 자등의 명단도 포함되어 모두 987명의 이름이 적혀있음을 감안하시기 바란다. 

▲ 여수 충민사

여수 충민사 좌측에 임란 추모비가 세워져있다

이 추모비에 충신의사를 기록하기 전에 간단한 서문이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공유 선조 임진 당시 추신의사 불능 진록 한 좌수영관하 제공 약사서차여좌(恭惟宣祖壬辰當時 忠臣義士不能盡錄限左水營管下諸公略史序次如左) 이의 해석은 삼가 생각하건데 선조 임진 당시 충신 의사를 기록하는 것은 불가능하나 좌수영 관하 제공들에 대한 약사의 차례는 좌와 같다.

▲ 이충무공 진충제공 추모비
▲ 임란 추모비에 기록된 전방삭 장군

기록된 내용은 ⌜전방삭 천안인 자일진 호규암 무절공 인량후 이전공 제훈련원정 유사적비(全方朔天安人字日進號葵庵武節公仁亮后以戰功除訓練院正有事蹟碑)⌟라고 기록 되어있다. 이를 해석하면, “전방삭 천안사람 자는 일진 호는 규암 무절공 인량의 후손 전공으로 훈련원정에 제수됨. 사적비가 있음.”이다
(상기 武節公: 시호이며 고려 고종때 정2품 벼슬을 지내신분임. 仁亮 : 천안전씨 35世 全仁亮)

▲ 임란 추모비 제막문

이러한 내용을 보고 후손의 심정을 피력해 보자면, 국가가 위기를 맞았을 때 목숨을 아끼지 않고 구국 대열에 앞장선 애국선열들은 아무리 긴 세월이 흘러가도 그 공적을 잊지 않는다는 후세들의 숭고한 정신에, 한미한 후손은 감사를 드린다.

한편 국난의 역사는 오늘을 사는 우리네의 거울인데도, 그리고 지난 역사를 즈려밟고 사는데도 곧장 역사를 망각한다는 점과, 우리나라 역사의 기록물을 보면 대개 그러하듯 상위 층을 위주로 일방 적이고, 실질적으로 목숨 걸고 싸운 하위 층은 소모적인 인물로 체색된 역사적 기록과, 국가운영자들의 백성에 대한 차별의식에 증오감마저 들었다. 하위 층의 백성들이지만 구국의 일념으로 목숨을 기꺼이 바친 자들을 귀히 여기지 못한 점에 다시 한 번 억울함과 소외감으로 가슴이 아프다.  

전 편에서 보듯 선조 조정에서도 상위 층을 위주로 포상한 처사에는 마땅히 질타를 받아야 하고, 그들의 마음속에 내포된, 수많은 이름 없는 민초들의 고귀한 목숨을 소모적으로 생각하여 안중에도 없었다는 심보에 재도 뿌리고, 소금도 뿌리고 싶었으나, 다행히도 민의에 굴복하여 고쳐먹은 선조조정의 처사는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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