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자서전 - 인생은 아름다워(23)] "68년 동안 죽은 줄 알고 제사 지내던 오빠를 만났어요"

스물세 번째 주인공 박언년(77, 옥천읍 구일리)씨 정지환 옥천신문 객원기자l승인2020.03.02l수정2020.03.02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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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이 아니기를' 8.15 금강산 이산가족 상봉 행사장에서 만난 박언년씨와 큰오빠 박범태씨. <사진제공: 박언년씨>

이번에 만난 사람은 옥천읍 구일리에 사는 박언년씨(77)입니다. 그녀는 지난 8.15 이산가족 상봉 행사 때 막내 남동생, 조카와 함께 금강산에 다녀왔습니다. 거기서 북으로 간 큰오빠 박범태씨(89)를 만났습니다. 6.25전쟁 때 죽은 줄 알고 친정 동생과 조카들이 제사까지 지내왔던 터였다고 합니다. 눈물바다가 된 상봉은 큰오빠가 마을, 부모, 동생 이름을 잊지 않고 있다가 북에서 낳은 아들을 통해 신청했기에 성사될 수 있었습니다. 다음날 TV 뉴스 화면에 세 남매가 부둥켜안고 통곡하는 모습이 방영되었는데, 화면 하단에 이런 자막이 떴습니다. '남측 동생, 죽은 줄 알고 제사 지내던 북측 형 만나'. 헤어졌던 혈육과 68년 만에 만나면 그 기분이 어떨까요? 그래서 평소보다 더 많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 박언년씨가 이산가족 상봉 행사에서 큰 오빠를 만난 이야기를 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이산가족 상봉 행사장에서 만난 큰오빠

"37번 테이블로 가세요."

8.15 금강산 이산가족 상봉 행사장에서 안내원이 우리에게 말했다. 막내동생, 조카의 손에 이끌려 '37'이라는 숫자가 적힌 테이블로 걸어갔다. 잠시 후에 머리를 짧게 깎은 노인과 중년의 남자가 우리 테이블로 다가왔다.

"네가 언년이냐?"

"범태 오빠 맞아요?"

6.25전쟁 당시 죽은 줄 알고 친정 동생과 조카들이 제사까지 지내온 큰오빠가 무려 68년 만에 내 앞에 서 있었다. 내가 아홉 살 소녀 때 헤어진 스물한 살 청년 오빠는 주름살 깊은 89세 노인이 되어 있었다. 혈육의 정(情)은 뜨거웠다. 어색하던 기분도 잠시, 우리 3남매는 서로 부둥켜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1950년 옥천에 들어온 인민군은 스무 살 전후의 청년들을 '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뽑아 갔다. 우리 고향 마을인 청성면 무회리에서만 오빠를 비롯해 6명의 청년이 차출되었다. 보은에 있는 훈련소로 아버지가 면회를 한 번 다녀오고 나서 연락이 끊겼다. 그보다 앞서 '보도연맹'으로 끌려갔던 동네 청년 2명이 총살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기에 오빠도 죽었을 것이라고 여기고만 있었다.

수백만 젊은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전쟁에서 용케도 살아남은 오빠는 북에서 종전을 맞았다. 군인으로 7년 더 근무하다 쌀 배급소에 취직했고, 평양 여자와 결혼까지 해서 딸 셋과 아들 하나를 낳았다. 아내와 사별(死別)하고 지금은 평안도 바닷가 마을에서 노년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이번 상봉은 오빠의 아들인 북의 조카가 신청하는 바람에 성사되었다. 이전에도 서너 차례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했지만 이뤄지지 않다가 이번에 기회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 오빠가 마을 이름, 부모 이름, 동생들 이름을 잊지 않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금강산에서 이틀 밤을 자면서 대여섯 번 만난 다음 우리는 헤어졌다.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 같아요, 오빠."

"언년아 부디 잘 살거라."

 

아버지 사랑이 듬뿍 담긴 내 이름 '언년'

나는 1942년 옥천군 청성면 무회리에서 태어났다.

'착한 농사꾼'이던 아버지(박용남)와 어머니(김용순)는 슬하에 7남매를 두었다. 범태, 범한, 범동 세 오빠가 먼저 태어났고, 나(언년)와 범년 두 딸이 그 뒤를 이었다. 그리고 이번 상봉 행사에 동행한 막내아들 범인과 막내딸 유자가 태어났다.

아버지가 내 이름을 '언년'으로 지은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우리 집안은 딸이 귀했다. 아버지 형제부터 4남1녀로 딸이 외동이었다. 그러던 차에 어머니와 결혼해 아들만 셋을 줄줄이 낳은 다음 첫딸을 얻자 너무 기뻤다고 한다. 그래서 오래오래 살라고 이렇게 이름을 지었다. 나는 촌스럽게 들리는 '언년'이라는 이름을 그래서 나쁘게만 여기지 않는다.

큰오빠 범태는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다. 동네 서당 훈장에게 한문을 배운 것이 전부였다. 동생 범한, 범동을 학교에 보내주고 싶다는 일념으로 산에서 나무를 해와 읍내에 내다 팔았다. 그러다가 전쟁이 터지면서 인민군에게 '의용군'으로 끌려간 것이다. 의용군 훈련소가 보은에 있었는데, 면회를 간 아버지에게 오빠가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속삭였다고 한다.

"여기서 제가 도망가면 끝까지 쫓아갈 것이라고 교관이 말했어요. '사람이 땅속으로 다닐 수 있겠느냐? 공중으로 날아서 다닐 수 있겠느냐? 땅위로 다니는 이상 반드시 발각될 것이다'라는 말도 했어요. 가족을 위해서라도 저는 여기서 살 방도를 찾아야 할 것 같아요. 그러니 저는 없는 셈치고 부디 동생들을 잘 가르쳐주세요."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이후로 더 이상 면회를 가지 않았다. 그때부터 큰오빠 이야기를 하는 가족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다가 내가 17세가 되던 해에 아버지가 젊은 나이로 별세하셨다. 장남과 남편을 차례로 잃은 어머니는 치마를 둘러서 여자였을 뿐이지 웬만한 남자 가장은 저리 가라고 할 정도로 참으로 억척스럽게 농사를 지으며 6남매를 키웠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흐른 뒤인 1983년 TV에서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프로그램이 방영됐다. 헤어졌던 가족들이 어렵사리 만나서 부둥켜안고 통곡하는 장면을 지켜보던 어머니가 손주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때 내가 범태 면회를 가지 못해서 후회스럽다. 내가 갔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도망 오라고 말했을 거야."

▲ 이번 이상가족 상봉 행사에서 걸고 나간 박언년씨의 이름표.

 

■ 25세 노처녀 29세 노총각 부부의 밑천

큰오빠가 사라진 뒤에 두 오빠를 공부시키려고 나와 범년은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못하고 집에서 일해야 했다. 밥을 짓고 청소하는 것은 기본이었고, 농번기에는 부모님 일손도 도와야 했다. 틈만 나면 강에 가서 도실비(올갱이)를 잡아다 식구들을 먹였다. 아버지까지 돌아가시는 바람에 혼기도 놓쳐버렸다.

나는 25세가 되던 해에 옥천 전씨 집성촌인 옥천읍 귀현리로 시집갔다. 25세는 당시로선 노처녀였는데, 신랑(전종하)도 29세 노총각이었다. 우리 두 사람은 마을 제일 위쪽에 있는 초가지붕 외딴집에 살림을 차렸다. 가진 것이 없었기에 믿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유일한 밑천인 몸뚱이를 놀려서 열심히 일하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논농사와 포도농사를 지으면서 밭에다 고추, 호박, 참외 등 무엇이든 심었다. 그리고 그것을 수확하면 어떻게 해서라도 상품으로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았다. 봄에는 냉이를 캐거나 두릅과 옻순을 따서 팔았고, 가을에는 도토리를 주워서 묵을 만들어 팔았다. 수매하고 남은 포도도 그냥 두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지 시장으로 가져갔다.

"당신 바쁘게 일하는 것 보니 오늘도 시장에 나갈 모양이군. 내가 도와줘야겠지?"

결혼 초기에 기관지가 좋지 않았던 남편이지만 뒷짐만 지고 있지 않았다. 들에서 캐온 냉이를 깨끗이 씻어 놓으면 남편이 짚으로 단단히 묶었다. 그런 절차를 거치면 사람들이 탐낼 만한 어엿한 상품이 되었다. 부부가 합작한 상품을 남편이 리어카나 경운기로 읍내 장터까지 실어다 주면 내가 앉아서 팔기도 했고, 아예 통근 열차를 타고 대전역으로 진출하기도 했다.

상품을 직접 팔다 보니 장사 요령도 생겼다. 농사꾼들이 호박, 냉이, 도토리묵 등을 가지고 대전역에 내리면 장사꾼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물건을 통째로 사서 소매상에게 넘기는 중간상인들이었다. 처음에는 어리벙벙하다가 애써 가져온 물건을 빼앗겨 헐값만 받거나 잃어버리기도 했다. 그래서 다음부터는 하차 직후에는 물건을 팔지 않고 부둥켜안은 채 버텼다. 그러면 차분한 분위기에서 제값을 받고 넘길 수 있었다.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우리 부부는 남의 소도 키웠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이 우시장에서 사온 송아지를 받아다 풀과 여물을 먹여서 키웠다. 그런 다음 다시 팔아 본전을 제외한 돈을 주인과 절반씩 나누었다. 그렇게 해서 번 돈으로 송아지를 샀고, 나중에는 10마리나 되는 소를 키우게 되었다.

그렇게 악착같이 일하자 땅도 조금씩 늘려 갈 수 있었다. 시장에 나가서 장사를 하다 보니 우리 집에는 현금도 비교적 많았다. 그러다 보니 동네에서 현금이 필요한 사람들이 우리 집으로 돈을 꾸러오곤 했다. 그 중에는 우리보다 훨씬 잘 사는 사람들도 있었다.

 

■ 인사 잘한다고 칭찬 들었던 우리 4남매

우리 부부는 4남매를 낳았다. 결혼 이듬해 장남 재선이 태어났고, 이어서 장녀 경순, 차녀 경숙, 차남 재두가 태어났다. 결혼 초기에는 풍족하지 못해 아이들을 배불리 먹이지 못했다. 겨울이면 아침에 먹고 남은 밥알에 물을 넣고 끓여서 죽을 만들어 먹기도 했고, 국수와 고구마와 시래깃국으로 버티기도 했다. 나 자신 출산을 하고도 쌀밥을 먹어보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족 하나를 사다가 먹었던 순간의 장면들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리어카로 실어간 고추, 호박, 참외를 읍내 장터에서 모두 팔고 오려는데, 큼직한 소다리를 파는 식당이 보였다. 큰마음을 먹고 그날 번 돈으로 소다리를 샀다. 집으로 가져와 손질한 다음 황기와 각종 약초를 넣고 사골국을 끓였다. 당시 고생하던 남편을 위해 샀던 사골국을 온 식구가 맛있게 먹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4남매는 반듯하고 성실하게 자라주었다. 아이들은 모두 군남초등학교와 옥천중학교를 다녔다. 나중에 두 아들은 옥천고, 두 딸은 옥천여고를 졸업했다. 사춘기를 지나면서도 속 한 번 썩인 일이 없었다. 무엇보다 동네에서 어른들을 만나면 인사를 잘했다. 하루에 몇 번을 만나도 고개를 숙이며 공손하게 인사해, '인사 잘 하는 아이들'이라는 칭찬을 들었다. 그렇게 자라선지 요즘에도 저녁마다 전화를 걸어서 엄마의 안부를 묻는다.

낡은 초가집을 허물고 새 양옥집을 지은 것도 우리 가족에게는 보람 있는 일이었다. 남의 소를 키워서 번 돈으로 소를 10마리까지 늘렸다고 했는데, 그것이 새 집을 짓는 든든한 밑천이 되어주었다. 벽돌 쌓는 일만 시누이 남편의 도움을 받고 나머지 집을 짓고 문을 짜는 일까지 거의 모든 공정을 남편이 도맡아서 처리했다. 아마도 그래서 새 집에 대한 애착이 더욱 강해진 것 같다.

▲ 마을 제일 위에 있던 외딴 초가집은 빨간 벽돌집으로 탈바꿈했다. 벼, 포도, 고추, 호박, 참외 등 온갖 농사를 짓고 봄이면 나물을, 가을이면 도토리를 주워 묵을 만들어 팔며 일군 결과다. 그의 부지런함은 일흔이 넘은 지금도 여전하다. 24일 오후 박씨가 직접 다듬은 고추를 들고 잠시 포즈를 취했다.

 

잠 못 이루는 연정(戀情)과 모정(母情)

반세기 가까이 동고동락했던 남편이 75세에 먼저 세상을 떠났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장례식 날, 나는 울며불며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고생만 하다가 살림이 피려는데 죽기는 왜 죽어!"

집 뒤에 있는 산에 남편을 묻고 돌아온 그날 저녁 나는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아무리 자려고 해도 잠이 오지 않았다. 며칠 동안 병원과 약국에 다니고, 아무리 탕약을 먹어도 불면증은 고쳐지지 않았다. 결국 나는 6개월 동안 집을 떠나 친척 집에서 지내다 돌아와야 했다.

"어머니가 이러시면 자녀들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특히 큰아들의 상심이 커서 걱정입니다."

어느 날 누군가 해준 말을 듣고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때부터 단단히 마음을 먹었더니 불면증이 어느 정도 완화됐다. 그렇게 버틴 덕분에 68년 전에 헤어졌던 큰오빠도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남편 생각이 자꾸만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오늘도 남편이 당장이라도 이렇게 말하며 나타날 것만 같다.

"당신 바쁘게 일하는 것 보니 오늘도 시장에 나갈 모양이군. 내가 도와줘야겠지?"

 

▲ 사진 촬영이 끝난 후 박언년씨가 전동차를 타고 밭일을 나가고 있다.

 

▲ 직접 농사 지은 고추를 손질하고 있는 박언년씨.
▲ 8.15 금강산 이산가족 상봉 행사장에서 만난 박언년씨 가족들. 사진 왼쪽이 막내동생 박범인(인천)씨, 그 옆이 큰 오빠 박범태씨의 아들. 안경을 쓴 이가 대전에 사는 조카 박병선씨. <사진제공: 박언년씨>
▲ 이번 상봉 행사에 함께한 박언년씨와 동생 박범인씨, 조카 박병선씨. <사진제공: 박언년씨>

 

글 정지환 객원기자·사진 박누리 기자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편집자주] 정지환 기자는 1993년부터 월간 말, 오마이뉴스 등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안티조선 전문기자’라는 애칭을 얻는 등 우리 사회에 숱한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논쟁적 기사를 남겼다. 2004년에는 입법전문지 '여의도통신' 창간을 주도하기도 했다. 2010년 사회적 좌절을 맛보고 ‘감사’를 만나면서 기업, 학교, 군대, 지자체 등에서 1000회 넘게 '감사' 강연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1인기업 감사경영연구소 소장과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로 일하고 있다. ‘내 인생을 바꾸는 감사 레시피’, ‘30초 감사’, ‘감사 365’ 등 10여 권의 저서가 있다.

* 이 글은 옥천신문(http://www.okinews.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정지환 옥천신문 객원기자  lowsaeja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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