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독일 탈핵 탐방 때 찾아간 함부르크 시내의 주요 건물들을 둘러 본 이야기

▲ 함부르크 시청 건물. 멀리서 찍어서 작게 보이지만 참 크고 웅장하면서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상당히 세련된 무늬의 장식과 조각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건물이었다. 대부분 유럽 나라들이 그렇지만 이렇게 시청이 있는 곳에는 그 앞에 커다란 광장이 있어 옛날부터 시에서 중요한 일이 있을 때에는 이 광장으로 모여 광장 정치가 이루어졌던 것도 유럽 여러 나라의 특징 중의 하나이다.

함부르크 하면 떠오르는 것은 요즘 유럽을 강타하고 있는 국가대표 축구선수 손흥민이 처음으로 유럽에 진출하여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던 '함부르크sv' 축구팀이 떠오른다. 손흥민이 고교 2학년으로 우리나라 축구협회의 유학생으로 추천되어 '함부르크sv' 팀에서 유학을 하였다. 그가 그곳에서 축구 공부를 하면서 그의 실력이 인정되어 그곳 유소년팀을 거쳐 1군 선수로 활약을 하면서 많은 골을 터트려 유럽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곳이다. 그후 손흥민은 독일의 '레버쿠전' 팀에서 활약을 하고, 그곳에서도 그는 많은 골을 터트려 실력을 인정받아 2014년 현재 프리미어 리그 '토트넘 레스퍼'의 에이스로 맹활약을 하고 있다. 바로 그 손흥민이 축구선수로서 처음 유럽무대에 친출한 곳이 독일 제2도시인 함부르크에 있는 '함브르크sv' 팀인 것이다.

▲ 이 탑은 시청 건물 앞 강변에 세워져 있는데, 제2차대전 때 이 지역 사람들이 4만 명이 희생이 되었다는 내용이 적혀있는 비라는 것을 노진철 교수님이 읽고 설명해 주셨다. 함부르크에서만 4만 명이 희생되었으면 독일 전체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을까? 히들러의 게르만 제일주의를 관철하고 유럽 일대를 다 점령하기 위한 야망으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는가? 몇몇 인간들의 무모한 영웅심으로 인하여 불쌍한 민중들이 이렇게 처참하게 죽어간다는 생각을 할 때, 한 국가의 지도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한 번 더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원래 히틀러도 선거를 통해서 진출한 정치가인데, 그가 이런 나치즘의 선봉이 되어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킬 줄이야...
▲ 시청 옆을 흐르고 있는 엘베강의 모습. 이곳 함부르크는 1962년 대홍수가 나서 도시 대부분이 물에 잠기는 엄청난 재산과 인명 피해를 입었다고 합니다. 그 사진들이 시청 전시홀에 가득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비록 함부르크가 발트해에 연해 있지만 밀물일 때 엘베강이 범람하여 물이 빠지질 않아서 피해가 엄청났다고 합니다.
▲ 시청 뒤편에 있는 함부르크의 명품가. 하지만 우리가 지나가는 날은 일요일이어서 그런지 거리는 한산했다.
▲ 시청 옆을 흐르고 있는 엘베강의 모습. 이곳 함부르크는 1962년 대홍수가 나서 도시 대부분이 물에 잠기는 엄청난 재산과 인명 피해를 입었다고 합니다. 그 사진들이 시청 전시홀에 가득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비록 함부르크가 발트해에 연해 있지만 밀물일 때 엘베강이 범람하여 물이 빠지질 않아 피해가 엄청났다고 합니다.
▲ 점심을 거하게 먹은 이탈리아 음식점. 생선 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집에 10명이 들어가 가능한 생선요리를 9가지 시킨 후 코스요리처럼 돌려 먹었다. 한 마디로 배가 터지게 먹었다. 점심이지만 값이 1인당 우리 돈으로 약 15,000원짜리인데, 시청 뒤에 있는 명품가에 있어서 그런지 독일에 와서 먹은 음식 중에 가장 푸짐하게 잘 먹었던 것 같다.

2012년 2월 19일 우리 독일 탈핵 탐방단은 함부르크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보내고, 일부 사람들은 새벽 시장에 들러 함부르크 시민들의 삶의 속살의 한 부분을 들여다보고 나서 숙소 호텔로 돌아왔다. 그 날은 마침 일요일이어서 모든 관공서나 단체가 문을 닫기 때문에 방문하여 안내를 받을 수 없었다. 그레서 우리 탈핵 탐방단은 함부르크 시내 투어에 나섰다.

함부르크 시내 탐방을 하면서 보고 들었던 이야기들을 당시 찍었던 사진과 '초록교연대' 카페에 실었던 내용을 중심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 함부르크에서 둘째 날 우리 일행을 안내한 문기덕씨의 대학 친구이자 동창인 도미니크. 둘째 날 안내를 문기덕씨와 함께 우리를 도왔는데, 상당히 열정적이고 친절한 친구였다.

우리 탐방단은 시청 주변에서 자유롭게 팀별로 점심을 먹고 나서는 문기덕 씨의 독일인 친구가 우리를 안내했다. 문기덕 씨가 이곳 대학에 유학을 와서 학부과정(브르트브란트 공대)에서 같이 공부를 했다는 '도미니크'라는 친구이다. 그는 이곳 중구청에 근무를 하는 공무원이라고 한다. 그는 중구청의 건축심의위원회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건축심의가 들어오면 심의위원회에서 찬반 관리를 하는데, 그 일을 하다 보니 함부르크 시내에 있는 건축물들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하였다. 마침 그날 시간이 나서 자원봉사로 안내를 나온 것이다. 이 친구는 대학에서 '도시 및 지역 계획학'을 공부하였다고 한다. 그러니 도시 건축에 대해서는 상당한 전문적 지식과 식견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함부르크에는 19세기에 중심가에는 11만 명의 인구가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밀집하여 살다보니 1840년에 콜레라가 돌아 1만 명의 사람들이 숨지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1842년에 대화재가 발생하여 목조로 되어 있는 데다가 집들이 너무 밀집되게 지어져 있어서 그때 도심의 주요한 건물들은 화재로 다 전소되었다고 한다. 그 후 도심에 다시 건축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19세가 말에 도시를 재 계획하면서 도심에 살던 사람들은 시외로 이주를 시키고, 중앙에는 사무실들을 중심으로 도시를 재 구조화하였다고 한다. 블록과 블록 간의 간격도 넓게 구획하여 햇빛이 잘 들어오도록 설계하였다고 한다.

이날은 독일에서 있었던 날 중에 제일 쌀쌀한 날이었다. 아침에 따뜻한 것 같아 우리 일행들 중에는 옷을 가볍게 입고 나와서 추워서 어쩔 줄 몰라하는데, 이 친구는 젊고, 백인들 특유의 추위에 강한 체력이라서 그런지 모르지만 우리 일행이 추위와는 크게 개의치 않고 정말로 열정적으로, 그리고 친절하게 안내하기 위하여 우리를 이리저리 데리고 다니면서 함부르크에서 역사성이 있는 건물들은 죄다 안내를 자세하게 해 주는 것이었다. 그 친절과 열정에 감탄했고, 고마웠다.

▲ 함부르크가 북유럽의 중심 도시가 되면서 상업과 무역이 크게 번성하여 19세기 말에 도시를 재 구조화하면서 도심에는 사무실 중심으로 설계를 하였는데, 그 당시 야심 차게 세워진 건물이란다. 마치 배가 떠가는 모양을 하고 있는 모양이 인상적이다. 상당히 날렵하면서도 아름다운 건축미를 자랑하였다.
▲ 당시 독일에서는 최신의 건축물로서 유럽 최고의 모던한 것과 역사를 함께 만들자 하여 건축된 것이라고 한다. 벽돌 고딕 양식이 특징이다. 유럽에서 두 번째로 큰 건물이라 한다. 2,200여 개의 사무실이 있다.
▲ 당시 유럽에서는 제일 큰 사무실로서 칠레인이 지었다고 한다.
▲ 지금은 이 거리가 다 포장이 되었지만 19세기 말까지만 하여도 이곳에 배가 드나드는 운하가 있었다고 한다.
▲ 19세기에는 바로 이 건물 아래에 배가 들어와서 로프를 이용하여 화물들을 들어 올려 보관하던 창고였다고 한다. 이 일대는 맥주를 만들어서 부자가 되었다고 하여 'REICHENHOF' '부잣집'이라는 뜻으로 '리치 거리'라 불린다 하였다.
▲ 이 사진에서 바닥에 하얗게 보이는 것들이 옛날 성이 있었고, 그 안에 있던 요새의 기둥이 세워졌던 자리의 표시라고 한다. 원래는 이곳에 가톨릭 주교가 23m의 지하에 주춧돌을 놓고 돔 요새를 지었다고 하는데, 몇 년 전에 이곳을 파서 발굴작업을 하였다고 한다. 이 곳은 당시 함부르크의 시발점이었다고 한다.
▲ 시멘트 구조물로 되어 있는 곳이 당시 성곽이 있었던 자리라고 표시해 놓은 것이다. 이 인근에는 커다란 5개의 성당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 학교가 있었는데, 2차 대전 때 다 파괴되었다고 한다.
▲ 고딕양식 부흥 건축물로 함부르크 대화재 때 소실되었다가 1845년 건축을 시작하여 18년에 걸쳐 1863년에 완성되었다. 지금 보이는 147m의 첨탑은 1874년에 완공되었다. 독일은 종교개혁 이후에도 대체로 북독일 쪽은 신교가 남독일은 구교가 차지하게 된다. 이 성 니콜라이 교회는 함부르크에 있던 5대 복음 교회 중의 하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폭격으로 파괴되다 남은 모습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니콜라이 교회 모습. 2차대전 때는 연합군 폭격기들이 이 목표물을 보고 폭탄을 투하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 건물이 1874년부터 76년까지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다고도 한다. 2차대전 당시 교회의 본 건물을 파괴되었고 첨탑만이 남았있다. 이렇게 1950년까지 방치 되었다가 1987년 교회 복원재단에 의해 복원작업을 시작했다.
▲ 니콜라이 교회의 주 줄입문이 있는 곳의 모습. 상당히 화려하게 지어진 교회였는데, 2차 대전으로 인하여 심한 폭격을 받고 파괴되었다고 하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 1912년에 건설이 되어 금년에 100주년을 맞는 전철과 역사. 문화유산으로 지정이 되었다고 한다.
▲ 이곳 함부르크는 옛날부터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다 보니 부둣가에는 부두 노동자들도 많이 거주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이들이 많이 거주하는 부둣가 근처에 있는 상파울리라는 지역에는 17세기부터 사고들이 많이 벌어지고 '레버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면서 이곳에는 깡패집단이 들끓거나 마약범죄 등 다양한 사고들이 일어나는 지역이었으며 환락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90년 이후에는 가족 단위의 거주지들도 생겨나고, 사무실 등이 들어서면서 많이 건전해졌다고 한다.
▲ 함부르크시 주변으로 만들어진 해자, 지금은 다 매워져서 공공건물이 들어서거나 공원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 성 미셀 교회 앞에 세워진 종교 개혁운동의 선구자 루터의 상, 1740년 경에 세워진 건물로 바로크 양식이다.
▲ 성 미셀 교회에 있는 3대의 파이프 오르간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것이라고 한다. 그 규모가 컸다.
▲ 이곳 함부르크가 영국령이었던 지역으로 영국왕실에서 사용하던 백자기들을 진열해 놓고 있는 건물 앞에서 찍은 사진 함부르크는 옛날부터 교역이 활발하고 상업이 발달하여 다른 지역보다 세금을 많이 내던 곳이다. 함부프크에는 큰 교회 5개가 있는데, 미셜교회는 신도시의 상징이고, 니콜라이 교회는 구도시의 상징이다. 상파울리는 함부르크의 관문 역할을 하는 곳이다. 10년 건축을 하면서 미셀 교회 앞에 커다란 건물이 들어설 수 있도록 한 것은 도시학적으로 죄악이다. 이곳 함부르크는 제2차 세계 대전 때 도시가 많이 파괴되었다. 독일에서는 새로 건물을 지으면서도 가급적 문화유산을 훼손하지 않고 리모델링을 하는 형태로 재건축을 하려는 노력들이 돋보였다. 우리가 보고 배워야 할 점이다.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김광철 주주통신원  kkc082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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