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미년에 우리 민족의 독립을 향한 뜨거운 열망을 담은 거족적 만세시위가 있었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한 만세시위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간도와 연해주에서 이어졌다. 당시 일본군 조선헌병사령부는 만주와 연해주에서의 만세시위 현장을 세세하게 조사하고 기록했다. 5월 15일에 집계된 이 사료에서 보듯이 만주 전역에서 대규모 시위가 두 달간 이어졌다. 5월15일의 집계 이후에도 만세시위는 계속 이어졌다.   

 

▲ 1919년 5월 15일 일제 조선군사령부가 조사해 지도로 기록한 '조선독립운동 소요요도'

조선인의 숫자가 많지 않았던 서간도 지역은 몇십 명에서 몇백 명이 모여 만세시위를 이어갔고, 집안현에서는 1400명이 모인 대규모 시위도 있었다. 그리고 주민의 대부분이 조선인이었던 북간도의 대부분 지역에서 각각 수천 명씩 만세시위에  참여했다.

 

3.11 집안현             1400명, 3.13. 화룡현 이도구 4400명, 3.13. 화룡현 용정 4000명,
3.16. 화룡현 두도구 1000명, 3.17 동녕현 삼차구 4000명, 3.18. 화룡현 청산리 900명
3.20. 훈춘현 훈춘 3000명, 3.26. 왕청현 백초구 1500명, 3.26. 연길현 국자가 2000명
3.28 훈춘현 구사평 4000명, 3.28 왕청현 라자구 1000명, 3.30. 훈춘현 한ㅇ자 수천명
4. 4. 화룡현 황전자 1500명, 4. 7. 훈춘현 녹도 1000명

 

▲ 북간도 왕청현 부근을 확대한 사진

이 사료에서 눈에 띄는 지역 몇 곳만 대충 훑어봐도 사만 명이 넘는 어마어마한 인원이다. 그리고 이 사료는 각 지역의 밀정들이 기록한 보고 자료에 의한 정리였으니 각 지역에 대한 밀정보고서가 존재한다. 참석자들이 몇 명인지, 주동자는 누구인지, 기념식이 어디에서 몇 시에 시작해서 몇 시에 끝났는지, 사람들이 얼마나 모였는지, 누가 발언을 했는지,  발언의 내용은 무엇인지 모두 자세하게 보고가 되었다.  

 

이 중 최운산 장군 형제들이 주도한 왕청현 백초구 시위에 대해서는 내용을 확인해 보았다. 1919년 소요사건에 관한 도(道)장관 보고철에 들어있는 밀정보고서의 내용은 "내무부장관에게 간도 백초구 보통학교 분교 부근의 소요사건에 관해서 당해 분교에 관련된 사항이 있으므로 아래 기재한 대로 정황의 개요 및 보고를 함"으로 시작한다.

 

▲ 3.26 왕청현 백초구 만세시위 보고서

보고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간도 백초구에서는 예전부터 3월 26일 오전 11시를 기하여 독립선언 시위운동을 개시하려는 것을 공공연히 말하였는데, 드디어 당일 대경자, 목단강, 하마힌, 대왕청, 나자구(백초구에서 26리)등에서 집합한 자가 약 1천 5벽명(이 중 사립학교 및 서당의 조선인 학생 약 2백명 및 중국인 약 1백명)은 백초구 왕청현서(경찰서)에서 북방 약 10정(일본영사분관에서 10정)의 산록에서 선언식을 거행하였다.

수괴자는 귀화 조선인 최명록 및 최모 등으로 구 한국기 또는 지나국기를 게양하고 각자는 작은 깃발을 손에 들고 만세를 높이 불렀으며, 식장에는 단군교, 시천교, 예수교의 목사 등이 차례로 일어나 연설을 하였다 (이 중 부인 연설자도 있었다고 함) 

해당 지역에서는 중국군 병사 및 순경의 엄중 경계에 의해서 군중은 마침내 부근에 접근하는 능력 없고 해산하거나 하였다. 해당 집합지점은 조선인 가옥 약 30호가 있는 부락으로서 이 지점에 2명의 통학 중이던 생도가 있었지만 학교에서는 전날 집회참가의 불허 지시 등 주변 사정에 대한 주의단속을 실시하여 다행히 학교 생도 중 당일 집회에 참가하는 자는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학교 학무위원 김윤협은 공공연히 위 집회에 참가하였고 현도윤, 구무경, 박창극 3인은 그 전 언젠가 도망함으로써 아마 당일은 참가하지 못하였고 이문백은 본 사건에 미리 관여하지 아니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선언서를 우리 분관에 밀송하여 내정의 원조를 하였다고 한다."

학교에서 일하는 교사나 직원이 밀정노릇을 하며 기록한 것으로 보이는 이 보고서는 독립만세를 외친 기념식이 열리는 그날의 상황을 비롯해 누가 독립운동을 하는지 누가 밀정인지 개인의 이름까지 정확하게 기록해 보고했다.   

이렇게 상세한 사료가 있었는데 3.1운동 100주년을 지내는 지난해에도 역사학계는 만주지역 만세시위는 용정 3.13뿐인 것처럼 이야기했다. 여러 번 개최된 100주년 기념세미나에서도 똑같은 내용만 되풀이 하고 있다. 3.1운동100주년을 기념하는 기념사업회조차 그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기미년의 대대적인 독립 선언 이후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대한민국의 독립군들은 무력 투쟁을 이어가면서도 해마다 3월 1일이 되면 성대한 기념식을 열고 대한민국의 독립정신을 기리며 투쟁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만주 전역에서 몇 달 동안 수십 곳에서 시위가 이어졌던 독립운동의 역사는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외면 당하고 있다.

국내의 만세시위는 한사람 한사람의 기록을 꼼꼼히 확인하고 독립유공자로 서훈하는 등 제대로 기억하기 위해 애쓰고 있지만 만주역은 사료를 찾기 어렵다는 이유로 제대로 기록조차 하지 않고 100년이 넘는 시간을 그냥 흘려보냈다. 

올해는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대한민국의 군대가 일본군을 격파한 승전 100주년이다. 그러나 아직도 후손들이 스스로 사료를 찾아 헤매며 만주지역 독립운동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만주지역 독립운동 연구에 국가적 관심과 지원이 절실하다는 공허한 이야기로 이 글을 마무리할 수밖에 없는 2020년 대한민국의 현실이 아프다.

 

최성주 객원편집위원  immacolet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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