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는 중요한 선박 추진 기구 중 하나로, 동서양에서 사용하는 것의 작동 원리와 방법이 다르다. 서양의 노는 한 쌍 혹은 여러 쌍을 설치해 배에 앉아서 잡아당기는 반작용으로 선박이 움직인다. 이러한 형태의 노는 노라고 하지 않고 ‘도(櫂)’라고 한다. 도는 저을 때 몇 개가 되던 일시에 잡아당기고 일시에 멈춰야 해서 배가 가다가 멈추는 걸 반복하게 된다. 또한 도가 양옆으로 나가 있기 때문에 근접전에서 아주 불리하다. 만약 다른 배와 붙는다면 도를 저을 수도 없지만, 이로 인해 도가 다 부러지게 되는 불편함이 있다.

동양의 노(櫓)는 한 척의 배에 길이 방향으로 나란히 설치하기 때문에 다른 배와 붙더라도 계속해서 저을 수 있다. 방향을 전환할 때도 서양식 도는 어느 한쪽을 눌러서 도가 물에 닿지 말아야 방향을 전환할 수 있지만, 동양식 노는 저으면서 방향 전환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영국 해군은 노 끝의 회전에서 착안해 현대 선박의 스크루를 개발했다고 한다.

성종 시대 기록을 보면, ‘적선(賊船)의 출입을 알 수 없고 병선(兵船)은 노(櫓)가 없고 도(棹)만 쓰기 때문에 완급(緩急)에 마음대로 운용하지 못하니 심히 불편하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전선(戰船)의 체제가 무겁고 크며 높아서 얕은 물이나 큰바람을 만나면 사람의 힘으로는 진퇴(進退) 시키고 돌릴 수가 없으니 별도로 비선(飛船)을 건조하는 데 본판 3장(배의 밑이 좁아졌음을 알 수 있다)을 길이가 7발 되게 하고 협판(挾板)에는 5개의 도리를 얹은 다음 배 위에 기둥을 세우고 들보를 걸쳐서 판옥(板屋)을 만들고 판옥 안에는 10개의 노를 설치해 열 사람이 앉아서 노를 젓도록 한다’고 했다. 앉아서 노를 젓는 것은 도에서만 행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 기록을 통해 과거 우리 전선에도 도(櫂,棹)를 사용한 배가 있었단 걸 알 수 있다.

중국의 북송 때 문헌인 태평어람(982) 권771 주부(舟部) 편에는 선박에 관한 여러 가지 기록이 남아있다. 공자(BC551~479) 이전에 기록된 시경에선 ‘회즙송주(會檝松舟)’라 했다. 즉, 노송으로 즙을 만들고 소나무로 배를 만들었던 것이다. 서경과 회남자(淮南子) 등 상고 문헌들도 하나같이 노를 즙(檝)이라 했으며 접으로도 발음한다. 이후 최초의 한자자전인 허신의 설문해자(說文解字, AD100)에 이르러 즙을 도(棹)라 했으며, 이것이 지금의 도다. 이처럼 중국 배의 추진 기구는 옛날부터 즙, 접, 도라고 했다. 작은 것은 접이라 하고 큰 것은 도라고 구분하기도 했지만 기능은 다 같다. 이때까지만 해도 중국에는 노가 없었다.

노는 1세기경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기원후 100년경에 저작된 석명(釋名)에서 처음으로 배의 옆을 노(勞) 또는 려(旅)라고 했다. 이것이 노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다. 청나라 강희년간(1622~1722)에 기록된 정자열의 정자통(正字通)에는 선박의 노는 도에서 차용한 것이며 세간에서 노(櫓)로 개작됐다는 언급이 있다. 그러나 사실은 노가 도에서 차용된 건 아니고, 뱃사람들이 노라고 부르던 것을 노(櫓)로 표기한 것이라고 한다. 노는 원래 중국어가 아니라 이방인들이 쓰던 외래어였을 것이다. 그 증거로 무비지 등 중국의 사서를 보면 모두가 하나같이 도선(櫂船)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노가 등장한 1세기는 백제인들이 주산군도로 진출해 ‘회계동제인(會稽東薺人)’으로 불렸던 때였다. 노와 백제인의 등장 시기는 1세기로 동일하다. 이는 백제인이 중국의 전통적인 도선과는 전혀 다른 노선을 타고 진출했음을 의미한다. 오나라 손권이 즉위하기 직전인 219년, 조조에게 쫓긴 유비는 제갈량의 천하삼분책에 따라 촉나라 땅으로 들어가서 한중왕(漢中王)으로 즉위했다. 이때 관운장은 촉의 입구인 형주(荊州)의 장강연안에 척후병을 배치했다. 손권의 부하였던 여몽이 정병을 숨긴 선박을 백의(白衣)로 하여금 노를 젓게 해(使白衣櫓) 적진에 접근해 강변의 척후병부터 제거한 후 관운장을 생포한 일화가 삼국지를 통해 전해진다. 여기에서 여몽이 노를 젓게 한 백의(白衣)가 우리가 자랑하는 백의민족(白衣民族)이다. 즉, '백의민족이 사용한 배'는 '백제인이 탄 노선'이었을 것이다.

또한 월절서에 의하면 대익(大翼)이라는 군선이 길이가 120척(당시의 1척: 약 23cm)이고 폭이 1장 6척이며 승무원 수가 91명(이 중 26명은 전사, 50명은 도졸(櫂卒, 노군))이라고 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볼 때 중국의 배에는 노가 아닌 도가 설치됐던 것이 확실하다.

다음 글에서는 우리나라와 일본, 중국의 노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마광남 주주통신원  wd341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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