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모장군(禦侮將軍) 전방삭(全方朔) (24)

전방삭 장군 후손의 현창(顯彰) 사업 전종실 주주통신원l승인2020.03.19l수정2020.03.19 20:36

크게

작게

메일

인쇄

신고

충효사(忠孝祠)
전방삭 장군 후손들의 문중 사정은, 전방삭 장군께서 의병을 창의하기 이전 까지는 권세나, 경제적으로 읍내의 실정으로 보아 남부럽지 않게 생활했다. 그 뒤 전방삭 장군께서 의병을 창의한 뒤 군량미가 부족하자 전 재산을 군량미로 헌납해버린 뒤로 살림살이가 어려워 졌다. 아들 전홍례가 부친의 유지를 받들겠다는 신념으로 황무지인 벌교 영등으로 이거하여 논과 밭을 일구는 처지여서 매우 궁핍한 생활이 대대로 이어지고 말았다.

궁핍한 생활로 인해 학문에 눈뜰 겨를이 없어 학문을 익히는 자 또한 드물었다. 이는 마치 일제 강점기에 많은 애국지사들이 국가를 위해 전 재산을 헌납한 충성심에 후손은 가난했고 따라서 배움 역시 부족한 사태를 초래한 사래와 같다.

다른 한편에서는 일제에 앞잡이 노릇으로 부와 권력을 누린 자의 후손들이 한 점 부끄럼 없이 처신하는 현 세상을 우리는 단호히 척결(剔抉)해야 되지 않을까하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필자가 보성군의 선무원종공신 후손의 거취를 조사해본 결과 상당수 후손의 행방을 찾을 수가 없었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다행이도 전방삭 장군의 후손들은 학벌이 앞서지 못하고 경제적으로 넉넉지는 않지만 대를 이어 숭모(崇慕)정신을 잃지 않는 후손들이기에 다행스럽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 순사들에 의해 불태워진 쌍충각(雙忠閣)을 재건하는 데는 너무 많은 세월이 흘러갔다. 후손의 깨우침이 있어, 두고만 보고 있을 수 없다는 의견으로, 십시일반으로  거출한 자금으로 초라하지만 경모재(敬慕齋)란 이름하에 선조님들의 위패를 다시 모시게 되었다. 그 뒤 충효사(忠孝祠)로 이름을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후손들은 현 상태에서 벗어나 품격에 맞는 사우 건립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어 국가의 은전을 기다리고 있다.

▲ 충효사 외부
▲ 충효사 내부

 
전방삭 장군 실적비 

▲훈련원정 규암공 전방삭 실적비

  

▲선무원종공신 어모장군 규암공 휘 방삭 실적비명  

역문
선무원종공신 훈련원정 규암공 휘 실적비명
 
훈련원정 규암 전방삭 어모장군이 순절한지 사백여년이 되었으나 후손이 한미(寒微)하여 위대한 공의 사적을 기록한 유적비(遺蹟碑)를 세우지 못하고 있다가 뜻한바있어 후손 전원이 비를 세울 것을 찬동하고 영등마을 정면에 건립하기로 결의 하였다

공의 시조는 백제개국 십제공신(十濟功臣) 전섭(全聶)이요 중시조는 고려개국 공신 전락(全樂)이다 명종 때 장흥 도호부사를 지낸 전윤부(全潤富)의 아들로 보성군 보성읍 우산리 택촌에서 명종 을사년에 태어났으며 자는 일진(日進)이요 휘는 방삭(方朔)이며 호는 규암(葵庵)이다

선조8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별천(別薦)으로 훈련원 부정(副正)으로 제수 했는데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광해군 세자를 모시고 피난길에 올라 산 넘고 물 건너 밤이슬을 맞으며 피눈물 나는 고초를 겪었다. 그러다가 전쟁이 소강상태가 되자 세자가 군량미 관계로 전주에 들르셨을 때 아뢰기를, '고향인 전라 좌수영 이충무공 막하에서 군무를 돕고 직접 왜군과 싸울 것'을 간청하니, 구국충정(救國忠情)을 칭찬하며 쾌히 승낙하시어 단숨에 달려가 二十여회의 대소 해전에 참여해 승리를 거두었다.

전쟁이 느슨해지자 요새지로 판단되는 벌교읍 영등포(현 영등)에서 의병을 일으켜 고흥, 보성, 낙안 등지에 침입하는 왜적을 혈맹(血盟)의 관계인 송대립(宋大立), 최대성(崔大成), 김덕방(金德邦), 황원복(黃元福), 정회(鄭繪)등과 기이한 전략으로 수차에 걸쳐 승리를 거두고 보성군 득량면 죽전벌 전투에서 왜장 희입(喜入)과 교봉(交鋒)하여 많은 살적(殺敵)이 있었으나 조총에 맞아 분하게 순절 하시니 오호통재로다. 보성 도촌방 학봉 후산에 안치했다가 후손이 벌교읍 영등리 부용산 자락으로 이장하였다

아들 절충장군(折衝將軍) 홍례(弘禮)는 부친의 유지를 받들어 영등으로 이거하여 마을을 설촌 하였고 一六0六년 무과 급제후 훈련원 판관(判官)으로 재직 중 병자호란 발발로 효종 임금님을 강도로 모시다가 순직 하였다.

몸을 초개(草芥)와 같이 던져  의리를 취함은 고금을 통하여 그 전철을 밟은 자가 드문데 일문(一門)에 쌍충은 천세만세 장하도다. 그들의 애국정열은 불꽃보다 뜨겁고 빛나며 충절의 정신은 일월보다 밝기에 후인들이 숭조(崇祖)하며 찬양(讚揚)함이 하늘을 찌르도다. 공들이시여 다시 살아 이 나라 이 민족 아름다운 우리강산을 지켜 주소서! 

이에 선조임금께서는 공에게 선무원종공신록권(宣武原從功臣錄券)을 하사하시고 훈련원정(訓練院正)으로 승진 발령하셨다. 이 충의의 넋은 후세까지 모범이 되어 길이길이 전하여질 것이며 공의 구국충정은 사기(史記)에 무궁토록 존재 하리라!
                신축(서기1961년) 3월 상순 서흥(瑞興) 김규태(金奎泰) 삼가 지음

 
전방삭 장군 유적비 

▲임란공신 어모장군 전방삭 유적비
▲임란공신 어모장군 전방삭 유적비명

임란공신 어모장군 전방삭 유적비명 

嗚呼라! 우리 조선 임⦁정 양란의 변을 어찌 가히 차마 말 하리오. 다행히도 하늘이 우리 동방을 도우시사 1545년 명종 을사년에 宣武原從功臣 禦侮將軍 葵庵 全公 方朔이 보성읍 우산리 대대로 살아온 자택에서 탄생 하였다.
 그 先系를 상고하니 본관은 天安이며 백제 개국 십제 공신 환성군 聶이 시조요 누전하여 樂은 고려 개국 공신 天安君 으로 중시조요 翊은 고려 공민왕 때에 보문각 대제학으로 派祖다. 俱生은 광주 목사니 중세 顯祖이며 自明은 상주목사요 壽完은 금성 판관으로 支派祖며  瓚의 6세손이다. 고조는 守요 증조는 大福이니 훈련 봉사요 祖는 靑이니 진사요 考는 潤富니 장흥 부사이다.
 公은 어려서 부터 地藝가 탁월하고 지기가 강계하며 체신이 장대 하였다. 나이 십 세에 수학하여 학문과 무술연마에 비상한 재주를 가지고 있어 사람들이 장차 將軍감이라고 칭찬하였다.
 선조 8년 을해에 무과에 登科하여 建功將軍에 오르고 선조 二十五년 임진 四월 十三일에 왜로 수십만 군이 明을 정벌코자 가도를 빙자하여 부산포 등지를 점거하여 우리 강토를 약탈 하고 백성을 죽이고 짓밟으니 공은 분개함을 이기지 못하여 즉시 충무공 이순신막하로 가서 대소 전투 二十여차 교전 하니 도처에서 함성이 자자하였다.  
 적세가 느슨하니 공은 고향 택촌으로 귀향하여 군량미 五十석을 헌납 하니 愛國의 忠情을 능히 짐작할 것이다. 이때 영등포구에 진지를 마련하고 의병 三백명을 모집 무예를 훈련하였다.
선조三十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여 왜장 宇喜田秀家가 一만三천명을 이끌고 남원 성을 함락하고 小西行長이 五만군중으로 노량 전투를 감행하니 국가의 운명이 풍전등화의 지경에 처해 있을 때 公이  宋大立, 崔大晟, 金德邦, 黃元福 등 제공과 보성 예당, 안치, 고흥 첨산등지에 침입하는 왜적을 섬멸 하고, 익년 무술 七월 十二일에 보성 득량 죽전벌 전투에 왜장 宇喜田秀家를 격퇴하고 마상에 앉아 늠름하게 장병을 지휘하니 적의 시신이 산 같이 쌓이고 유혈이 낭자 하였으나 時運이 불행하여 향년 五十四세로 적탄에 맞아 殉節 하시고도 모발은 꿋꿋하고 안색이 태연하며 오른손에는 장검을 왼손에는 활을 쥐고 반나절을 살아 있는 사람처럼 하니 그 충의가 마음속에 충만하여 죽어도 굴하지 않으니 성스럽고 장 하도다. 순절 후 보성군 도촌방 효죽봉하 酉坐에 모시니 이 功으로 어모장군으로 승진하고 1605년 선조대왕께서 “선무원종공신록권”을 하사 하셨다. 그 후 후손이 이장 영등리 부용산하 정좌에 배 광산 김씨와 合葬하여 모셨다. 아들 弘禮는 훈련원 판관으로 先考의 유지를 받들어 1607년 영등포구로 이거하여 영등마을을 설촌 하였고 병자호란에 왕을 강화도로 모시다가 순절하였으니 일문 一忠도 어려운데 일문 雙忠이야 더 말을 할 수 없이 천세 만세 장하도다. 손자 以斌은 병조참의를 제수 받았다. 銘曰 지조가 굳고 또 확실하니 賁育같은 장사라도 가히 지조를 뺐지 못하리라. 서세 416주년을 맞아 이 아름다운 忠義을 비석에 새기니 百世도록 나의 말을 증거 하리라.  
                      西紀二千十三年 癸巳 六月 流頭節 礪山 宋在烈 謹撰

전방삭 장군의 고증을 위한 후손의 노력
앞서 자주 말씀 드린 데로 전방삭 장군의 유물인 문적과 각종 교지, 당시의 서신, 왜적을 물리친 활, 그리고 장검과 단검, 위엄 있게 입었던 장군복과 투구 등은 일본 놈들에게 모두 약탈당한 후손의 한을 풀어보기 위해 전방삭 장군의 공적을 찾아 동분서주 발이 부르트도록 헤매던 날이 얼마나 될까?. 미완성에 지나지 않지만 나름대로 제작 배포한 서적은 다음과 같다.      

 

  ▲ 천안전씨 영등종회 보감

 

▲ 어모장군전공창절록 (2009년 전종실 편저)
▲ 애국충신의 기수 어모장군 전방삭
▲ 어모장군 전방삭 임란전투 공적 증거 자료 (2018 년 전종실 편저)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전종실 주주통신원  jjs6271@naver.com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전종실 주주통신원의 다른기사 보기

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 마포구 효창목길 6 (공덕동 116-25) 한겨레신문사 주주커뮤니케이션팀  |  전화 : 02)710-0124  |  등록일 : 2015년 1월 15일  |  발행일자 : 2015년 1월 1일
등록번호 : 서울 아03523  |  발행인 : 양상우  |  편집인 : 김광호  |  에디터 : 이동구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광호
편집위원 : 김경애, 김국화, 김동호, 김미경,김태평, 서기철, 심창식, 정혁준, 허익배   |  객원편집위원 : 김혜성, 박효삼, 안지애, 양성숙, 유원진, 최성주, 하성환
Copyright © 2020 한겨레:온.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