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교육자협회 그리고 4,19 교원노조와 전교조

<전교조 구로고 분회>는 전국 공립고 최초로 창립대회를 치렀다. 31년 전 20-30대 젊은 혈기로 학교민주화 나아가 교육민주화 운동에 헌신했던 교육동지들의 삶을 하나씩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다.

 

Ⅰ. 여는 말

Ⅱ. 80년대 노동운동과 전교협-<구로고 평교사회> 결성

Ⅲ. 전교조 《구로고 분회》 창립 투쟁 前史

1. 구로고 학생회 직선제 쟁취 활동과 고등학생운동

2. 서초동 꽃동네 철거민 공부방 활동과 학생회

Ⅳ. 전교조 결성과 《구로고 분회》 창립 투쟁약사

1. 5・27 한양대 잠입과 5・28전교조 결성

2. 6・3 전국 공립고 최초 《구로고 분회》 창립 대회

3. 양달섭 선생님 지키기와 전교조 참교육 지지 투쟁

Ⅴ 맺는 말

 

Ⅰ. 여는 말

전국교직원노동조합(약칭 전교조)은 4・19교원노조(정식 명칭은 한국교원노조총연합회)의 정신을 이어받아 1989년 탄생했다. 4・19교원노조는 해방 직후 결성된 이만규의 《조선교육자협회》를 이어받은 것이다.

이만규의 《조선교육자협회》는 '국대안(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안의 약칭) 반대 투쟁'(1946~1947) 당시 미군정의 탄압으로 1947년 11월 지하화하고 1948년 해체된다.

《조선교육자협회》가 해체된 지 꼭 12년 만에 4・19교원노조(1960)로 부활했다. 이승만 파시즘 권력이 4월 학생혁명으로 붕괴되면서 맨 먼저 창립된 대중조직이 4・19교원노조였다.

4・19교원노조는 대구 경북여고에서 시작하였다. 4월 혁명의 서곡인 '대구 2・28 학생 데모' 당시 대구 교사들은 불의에 분노한 학생들의 데모를 저지하는 데 앞장섰던 잘못을 범했다. 따라서 대구 지역 교사들 스스로 깊이 참회하는 의미에서 4・19교원노조는 대구에서 맨 처음 만들어졌고 또한 대구가 중심이었다.

그러나 대구에서 처음 시작된 교사노동조합의 전국 조직인 4・19교원노조는 안타깝게도 창립 1년 만에 해체되는 운명을 맞았다. 박정희 군부쿠데타(1961) 세력이 5,16쿠데타 바로 다음날 4,19교원노조를 해체시키며 집중적으로 탄압했다. 그리고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30년 군부독재정권이 지속되었다.

이 땅의 교사들은 자주적인 교사대중조직이 해체된 지 28년 만에 또다시 전국교직원노동조합(1989)을 탄생시켰다. 전교조 탄생을 가능하게 한 결정적인 요인은 내적으로 80년대 초부터 시작돼 온 교육운동과 외적으로 87년 6월 민주화운동에서 그 동인을 찾을 수 있다.

불행하게도 전교조의 탄생은 가시밭길을 헤쳐 나온 역사였다. 왜냐하면 1989년은 연초부터 공안탄압이 시작돼 서슬 퍼런 공안정국이 조성된 해였기 때문이다. 비록 87년 민주 항쟁의 여운이 남아있던 시기였지만 끝물이었다.

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직선제를 쟁취했음에도 보수 야권의 분열로 전두환 5공 정권에 이어서 노태우 군부독재세력이 여전히 지배권력으로 군림하던 시절이었다. 88년도엔 선도적인 학생운동세력이 87년 민주화 운동 열기를 이어받아 남북학생회담(1988) 판문점 개최를 촉구하며 진보적인 사회운동세력과 함께 통일운동으로까지 치고나갔다.

그러나 89년 정국은 수세에서 공세로 급반전되었다. 통일운동에 화들짝 놀란 분단지배세력은 방북 사건을 계기로 반격의 포문을 열었다. 문익환 목사 방북사건(89. 3)을 계기로 임수경 양 방북사건(89. 6)이 터지고 연이어 서경원 의원 방북 사건이 터졌다. 평민당 출신 서경원 의원 사건은 88년 8월에 당국의 허가없이 방북했던 사실이 89년 6월 말 뒤늦게 방북 사실을 알리면서 구속돼 국가보안법 공안정국이 조성된 것이다.

▲ 1989년 3월 문익환 목사의 방북 사건은 군부정권이 89년 공안정국을 조성해 공세적인 국면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그래도 문익환 목사 방북 사건은 석달 뒤 임수경 양 방북 사건과 같이 수구세력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국민들로 하여금 잊고 지냈던 민족의 <분단과 통일>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실제로 문익환 목사는 <통일은 잠꼬대가 아니라며 걸어서라도 북한을 가겠다>고 민족의 통일을 염원했던 민족 민주 인사였다. 민주화운동가 문익환 목사는 항일민족시인 윤동주와 친구 사이이기도 하다. (출처 : 한겨레 신문사 자료사진)

87년 민주화운동과 88년 통일운동으로 한껏 수세적 위치에 몰렸던 군부정권은 민주인사들이 몰래 방북한 사건들을 빌미로 태도를 돌변해 적극 공세적으로 탄압했다. 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비록 <민주 대 반민주> 세력의 대결 구도가 지속되던 시기였지만 89년은 수구세력의 공안정국 조성과 함께 민주화운동세력에 대해 탄압이 가시화되던 시기였다.

그런 엄혹한 89년 정세 속에서 자랑스러운 민주화운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전교조가 탄생한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89년 전교조의 탄생은 '수업 중 북침설', '빨갱이 교사', '국가보안법 구속 교사'라는 공안정국의 탄압을 뚫고 건설한 민주화운동의 상징적 사건이었다.

더구나 '전교조 구로고 분회 결성대회'는 전국 공립고 가운데 최초이자 서울시내 초중고 공립학교 가운데 최초였다. 따라서 전교조 사수 투쟁 초기 단계에서 구로고등학교 전교조 분회는 권력의 탄압이 집중되면서 남모를 수난을 겪었다.

당시 전교조 초기 지도부는 구속 또는 수배된 상태여서 탄압의 칼끝이 구로고 분회를 겨냥했다. 따라서 그 탄압의 강도와 양상은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했다.

매일같이 신문, 방송 언론사 기자들이 들이닥쳤다. 다른 분회에 없는 자체 대변인직을 두었고 사실을 왜곡하는 관제언론과 맞서 싸워야 했다. 당시 한겨레신문은 전교조 구로고 분회 교육동지들에겐 최대의 우군이었다.   

전교조 구로고 분회 창립 직후 조합원으로 가입한 숫자는 교사 85명 가운데 36명이었다. 그러나 군부정권-안기부-문교부-경찰-교육청 관료-학교당국의 전 방위적 탄압으로 마지막 8명이 남았다.

마지막 8명 중 7명은 파면, 해임의 징계처분으로 해직되었고 1명은 탄압 와중에 스스로 사직서를 제출했다. 교단을 떠난 이후 일부는 가족이 해체되고 경제적 고통으로 또는 병마에 시달리며 고스란히 시대의 고난을 감수했다.

30년이 훌쩍 지나 한 세대가 교체된 지금, 89년 당시 20-30대였던 젊은 교사들은 이제 60대 전후의 나이가 되었다. 전교조 구로고 분회 운동 1세대들은 매년 한 차례 모임을 가지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제 참교육 투쟁 1세대가 이미 교단을 떠났거나 떠날 시점이다. 가물거리는 기억을 되살려 그날의 가슴 뜨거운 시절을 복기해 보고자 한다. 무엇보다 당시 1차 자료에 근거하되 사실에 입각해 역사의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다.

어느 해직교사의 표현대로 "그 젊은 날 신들린 듯이 고난을 감수하며 오직 순수한 열정 하나로 노동조합 건설에 신명을 바치며 묵묵히 걸어갔던" 그 날들을 교육민주화운동사로 기억하고 싶기 때문이다.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hsh70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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