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교조 《구로고 분회》 창립 투쟁사 2

- 80년대 노동운동과 전교협-<구로고 평교사회> 결성 하성환 객원편집위원l승인2020.03.24l수정2020.03.26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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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Ⅱ. 80년대 노동운동과 전교협-<구로고 평교사회> 결성

 

80년대 노동운동은 70년대 노동운동과 달리 질적 전환을 겪었다. 70년대 노동운동은 자신의 몸을 불사르며 열악한 노동현실에 항거한 전태일의 분신(1970.11)으로 사회운동 전반의 크나큰 반향과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60-70년대 내내 '반독재 민주화 운동'이 한국사회 모든 사회운동의 화두였던 시절이었지만 22살 청년 노동자의 죽음은 사회운동 전면에 깊은 충격과 성찰로 다가왔다.

▲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40주기 추모행사(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그것은 전태일의 죽음이 단순히 비참한 노동현실을 죽음으로써 고발한 사건으로 그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전태일 일기를 통해서 드러난 것은 죽음으로 항거하기까지 한 청년 노동자의 고뇌가 일기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어린 여공들에 대해 느끼는 전태일의 연민과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이 자신의 몸을 불사르는 행동의 동인으로 작용한 때문이다. 버스비 30원을 아껴 1원짜리 풀빵 30개를 사서 점심 끼니를 거르는 어린 소녀들 6명에게 나눠주고 자신은 청계천 6가에서 도봉산까지 두세 시간을 걸어 다닌 일화는 인간에 대한 사랑을 실천한 한 단면이었다.

실제로 전태일은 어머니가 밀가루 빵을 쪄서 신문지에 싸준 점심조차 어린 여공들 앞에서 꺼내 놓고 먹지 못했다. 아침 8시부터 밤 10시까지 먼지구덩이 속에서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나이 어린 시다들은 고된 노동일에 시달리면서도 점심을 굶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다들의 속사정을 잘 알고 있던 전태일은 고된 노동에서 오는 힘든 것 이상으로 마음의 고통이 컸다.

실제로 평화시장 뒷골목에 1964년 봄 시다로 들어가 노동자의 근로조건을 좌지우지했던 재단사에 이르기까지 7년 동안 전태일은 어린 여공들의 비참한 삶에 번민했다. 그 스스로 노동자의 운명을 쥔 재단사가 되려 했던 이유도 13-14살 어린 소녀들, 바로 사회경제적 약자 편에 서서 그들의 삶을 개선해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60년대 말경 평화시장 내 노동자의 80-90%가 여공들이었다. 여공들 대부분은 시다, 미싱사 보조, 미싱사로 종사했고 재단사와 재단사 보조는 남성들이었다. 그러나 명목상 재단사가 된 뒤에도 전태일의 삶은 정신적 고통의 연속이었다. 명목상 재단사가 된 1967년 3월 17일자 일기장엔 괴로운 일상을 이렇게 토로하고 있다.

"끝 날이 인생의 종점이겠지. 정말 하루하루가 못 견디게 괴로움의 연속이다. 아침 8시부터 저녁 11시까지 하루 15시간을 칼질과 다리미질을 하며 지내야 하는 괴로움. 허리가 결리고 손바닥이 부르터 피가 나고 손목과 다리가 조금도 쉬지 않고 아프니 정말 죽고 싶다...(중략)... 육체적 고통이 나에게 죽음을 생각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고통이 더욱 심하기 때문이다."- 1967년 3월 17일 전태일 일기 중에서 (조영래, 2005 ; 128-129)

▲ 전태일 평전은 1983년 초판본이 나왔지만 군사정권 시절 저자 이름을 밝힐 수 없었다. 1991년 1차 개정판이 나오면서 글쓴이가 1세대 인권변호사 조영래였음이 밝혀졌다. 조영래 변호사는 1차 개정판이 나오기 직전에 투병 중 별세했다. 고3시절 한일회담 반대 데모를 주동한 혐의로 정학처분을 받기도 했지만 서울대학교 시험에서 전체 수석으로 입학했다. 70-80년대 민주화운동가,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다 1990년 12월 폐암으로 작고했다.(출처 : 돌베개)

조영래의 『전태일 평전』에는 동생 전순덕보다 나이 어린 여공들이 점심을 굶고 14시간에 이르는 고된 노동 속에 고통 받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 모습을 전태일은 "인간을 물질화하는 시대 속에... 희망의 가지가 잘린 채, 존재의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人間像)을 증오한다"고 고백했다.

재벌 중심 성장일변도로 무자비하게 자행된 수탈적 자본주의 현실 앞에 인간성마저 고갈돼 가는 슬픔을 전태일은 일기장에 고통스럽게 썼다.

결국 전태일이 근로기준법 법전과 함께 자신을 불사른 사건은 하층노동계급의 열악한 삶에 대해 전 사회적 관심을 촉발시켰다. 나아가 기존 검정고시 야학을 극복하고 70년대 중반엔 노동야학이 등장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대학생 친구 한 명만 있으면 좋겠다"고 탄식한 청년 노동자의 죽음은 대학생 강학과 노동자 노학 간의 연대의 단초를 만들어 냈다. 1980년 당시 전국적으로 200개가 넘는 야학이 존재했으며 이후 노동야학은 80년대 야학의 일반적 형태가 되어 노학연대로 발전하였다.

즉 대학생들 가운데 상당수가 노동현장으로 들어가 소모임 형태로 노동자의 권리의식과 자주적인 노동조합 결성을 고취시켰다. 생각해 보건대 70년대 노동운동은 전태일의 분신 이후 노동문제가 사회적 의제로 떠오르기 시작해 사회적 관심을 촉발시켰다.

따라서 70년대 노동운동은 노동자의 임금과 작업환경, 근로조건의 개선을 촉구하는 '민주노조운동'으로 그 성격을 규정지을 수 있겠다.

그도 그럴 것이 당대 사회운동의 목표는 반독재 민주화를 촉구하는 '정치민주화' 운동으로 제한적이었으며 주체세력 또한 지식인, 대학생, 종교인 중심으로 한정되었다. 따라서 부문운동으로서 노동운동이 사회운동의 중심으로 들여갈 여지는 없었다.

다만, 60년대 급진적인 공업화가 진행된 결과, 섬유 의류 산업을 비롯해 제조업 중심으로 광범위한 노동계급이 새롭게 형성되었다. 따라서 18-19세기 유럽 자본주의 발달 초기 단계에 드러난 자본의 수탈과 착취, 그에 따른 하층노동계급의 열악한 근로조건이 70년대 초 한국사회 노동현실에서 그대로 재현되면서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었다.

70년대 초 전태일 정신을 이어받은 청계피복노조 건설투쟁을 비롯해 한국화이자노조, 한국나일론노조, 마산방직 구로동 편직공장 노조, 아세아자동차 광주공장 노조, 아이맥 전자노조, 신진자동차 부평공장 노조, 부산제철노조, 크라운전자 노조, 동방유량노조, 태광산업 서울공장 노조 결성투쟁들이 모두 전태일 분신 이후 1972년까지 지속된 민주노조결성투쟁 사건들이다.

박정희 유신체제 전반기(1973-1976)엔 삼원섬유노조, 경인에너지노조, 산업은행노조, 반도상사노조, 동아일보노조, 종근당제약노조, 한국일보노조, 신흥제분노조, 대림콘크리트노조, 삼풍섬유노조, 태화제지노조 결성투쟁들이 1976년까지 계속되었다.

박정희 유신체제 후반기(1977-1979)엔 동남전기노조, 제일제당 김포공장노조, 동국양행노조, 삼완산업노조, 한진콜크노조, 국제방직노조 결성투쟁들이 자본과 유착된 공권력의 탄압을 받았다.

특히 70년대 유신체제 후반 원풍모방과 동일방직 사건, 그리고 79년 YH무역 노동자들의 신민당사 점거투쟁은 모두 국가권력의 비호를 받는 수탈적 자본에 저항한 70년대 노동운동의 상징적인 사건들이었다.

따라서 70년대 노동운동은 노동조합 건설투쟁을 비롯해 임금 등 처우 개선과 열악한 작업환경에 대한 근로조건 개선을 촉구한 '민주노조운동'이 70년대 노동운동의 특징이었다.

다시 말해 70년대 노동운동의 특징은 도시산업선교회, 그리고 가톨릭노동청년회(JOC)와 연계돼 단위사업장이 중심이 돼 전개한 고립분산적인 조합주의 경제투쟁의 성격이 짙었다.

그런데 70년대 후반 박정희 정권은 기계, 금속, 조선, 전자, 석유화학을 비롯해 중화학 공업 부문에 투자를 집중시켰다. 전체 제조업 가운데 경공업 대비 중화학 공업이 차지하는 비율은 경제기획원 자료에 따르면 24.7% : 75.3%(1977), 20% : 80%(1978), 20.3% : 79.7%(1979)로 고도화되었다.

그에 따라 1980년 당시 한국사회 노동계급은 46.6%로 전체 계급 구성에서 절반에 육박했다. 1986년 당시 전체 산업 가운데 2차 산업인 광공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31.4%이고 1987년 2차 산업에 종사한 노동계급 비율이 27.4%에 달했다.

이는 80년대 중반 한국사회가 전형적인 산업자본주의 사회로 진입했다는 것을 반증한다. 80년대 중후반에 이르면 한국사회 전체적으로 광범위하게 산업노동자 계급이 형성된 것이다.

이러한 사회구조의 변화는 독점자본과 노동계급 간 모순과 갈등의 심화를 초래했고 무엇보다 노동계급의 사회경제적 불만이 누적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표현대로 양의 질로의 전환과 질적인 사회변혁이 가능한 객관적 조건이 성숙되어갔다. 노동계급이 87년 6월 민주항쟁에는 주체적으로 참여하지 못했음에도 87년 7, 8, 9월 노동자 대투쟁 당시 전국적인 수준에서 노동쟁의가 자연발생적으로 폭발한 것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 87년 6월 민주항쟁을 촉발시킨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에 항의하며 대학생들이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벌이며 전투경찰과 대치한 장면(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6월 민주항쟁으로 시민민주주의, 바로 자유민주주의가 첫걸음을 내딛고 숨통이 트여 공간이 열려진 그 순간, 가장 핍박받고 억눌렸던 제조업 생산직 하층 노동자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 폭발했다.

특히 독과점 대기업 생산직 노동자들의 투쟁이 인상적이었다. 이는 한국의 산업구조 상 독과점 기업의 시장 지배력이 지나치게 과도한 측면과 관련이 깊다. 한국의 독과점 대기업의 시장지배력은 판매액 기준으로 1984년 당시 세계 100대 기업 가운데 4개 기업체가 순위에 들어가 있었다. 이러한 수치는 세계 6위에 이를 정도로 당시 선진국 이탈리아나 캐나다보다 세계 100대 기업체수에서 많았다.

이러한 현상은 독과점적 시장지배력을 통해 뽑아 들인 초과이윤을 대기업 생산직 노동자들에게 돌아가기보다 거대 독과점 자본을 축적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따라서 87년 7, 8, 9월 노동자 대투쟁 직후 대기업 생산직 노동자들의 임금이 큰 폭으로 상승하여 투쟁을 주도했던 대기업 생산직 노동자들 스스로 이러다 회사가 망하는 건 아닐까 오히려 걱정할 정도였다. 그만큼 한국사회 독과점 대기업 집단군, 바로 재벌들이 수탈한 초과이윤은 그 규모면에서 천문학적이었다.

한편, 80년대 노동운동의 특징은 70년대식 조합주의 경제투쟁의 성격이 짙은 '민주노조운동'과 성격을 달리 했다. 먼저 80년대 초반 노동운동은 '반군부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정치투쟁'의 성격을 띠었다.

이는 전두환 5공 군부파시즘 정권이 70년대 박정희 유신체제의 연장 속에서 노동운동에 대한 제3자 개입금지와 노사협의회라는 어용조직으로 더욱더 탄압의 강도를 강화한 것과 관련이 깊다.

더구나 서울의 봄(1980. 3)과 광주민주화운동(1980. 5)이 좌절되면서 학생운동 출신과 지식인들이 느꼈던 시대의 절망과 상실감은 너무도 컸다.

실제로 제3자 개입금지는 노동운동가들을 감옥으로 직행하게 만든 악법 가운데 최악의 악법이었다. 노사협의회 역시 자본의 떡고물을 받아먹는 어용 노동자들을 양산시킨 것으로 노동계급의 권익을 전혀 대변하질 못했다.

노사협의회 위원들 가운데에는 기업체에서 운영하는 구내매점이나 이발소, 목욕탕들에 대한 운영 권한을 받아 챙긴 대신, 머슴처럼 일했던 동료 노동자들을 철저히 외면했다. 80년대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참담한 실상 가운데 한 단면을 읽어보자.

"현대중공업 정문을 통과하려면 경비들과 제일 먼저 부딪히게 된다. 대부분 해병대나 특전사 출신들이어서 덩치도 크고 자기들끼리 계급관계도 뚜렷했다. 노동자들은 이들을 두려워했다. 회사의 기물을 지키는 일보다 노동자 감시가 이들의 주된 임무였다. 정문에서 바리깡을 들고 출근하는 노동자들의 머리를 검사해서 목과 귀를 조금이라도 덮으면 가차 없이 그 자리에서 밀어버렸다. 머리에 흉한 고속도로가 난 채로 일하다 점심시간에 짬을 내 이발을 해야 했다.(중략) 그것도 50대 가장들까지 신체를 감시당하고 머리를 깎이면서 산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중략) 경비들은 머리 감독뿐만 아니라 복장 검사, 출퇴근 체크, 출입증 확인, 퇴근 시 몸 수색 등 노동자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권한이 있었다.(중략) 말로는 날마다 우리는 한 가족이라고 하면서 회사는 가족인 노동자들의 머리를 강제로 깎고 정해진 작업복에 안전화로 군인을 만들어서 출근시켰다. 이건 가족이 아니라 군대였다."

말이 80년대이지 80년대 노동현장은 대기업 생산직 노동계급에겐 여전히 자본주의적 수탈과 봉건적 노사문화가 횡행한 시절이었다. 따라서 반독재 민주화투쟁은 노동자의 인간적인 대우와 존엄성을 지켜내기 위해서라도 노동현장의 민주화투쟁은 유효했다.

그리하여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군부파시즘의 폭압이 한층 강화되자 학생운동 출신과 지식인들은 노동현장에 진출하거나 야학운동이나 소모임 활동을 통해 노동운동과의 연대를 중시하였다.

전두환 5공 정권 초기 비록 상층 비합법・비공개 정치조직으로 구성되었지만 전국적인 조직화를 꾀했던 '전국민주노동연맹'(1980-1981, 약칭 전민노련)의 등장이 그러하다. 그러나 전민노련은 노동현장의 조직화를 통해 하부에서 상부 단위로 튼실하게 조직화된 운동단체가 아니었다.

하부단위인 노동조합을 비롯해 노동현장의 대중조직이 부재하거나 선진 노동자들의 정치투쟁 경험 역시 매우 일천한 상태였다. '반군부 반독재 민주화운동'이라는 5공 초기 상부 단위 정치투쟁을 기계적으로 노동현장에 결합시키려 했던 조급성과 모험주의적 성향이 짙었다.

80년대 노동운동이 본격적으로 기지개를 펴는 것은 83년 말 ~ 84년 초 조성된 정치적 유화국면을 배경으로 등장했다. 공개조직을 표방하거나 반합법조직들이 등장했다. 70년대 청계피복노조를 중심으로 민주노조운동을 주도했던 활동가들이 주체가 돼 만든 '노동자복지협의회'(1984. 3)의 출현이 대표적이었다.

민주화 운동단체인 '민주화운동 청년엽합'(1983, 약칭 민청련)과 '민주통일 민중운동연합'(1985, 약칭 민통련) 등 재야 민주화운동단체의 출현도 정치적 유화국면을 배경으로 했다는 점에선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85년 초 대학가에선 학도호국단을 폐지하고 직선제 학생회장 선출이 꿈틀거렸던 것도 정치적 유화국면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된 현상이었다.

나아가 대학생들이 노동야학에 몸담거나 직접 대학생 신분을 벗어던지고 노동현장으로 대거 뛰어들었던 시기가 80년대 노동운동의 특징이었다. 노동자의 정치투쟁이 일천한 현실에서 노동대중을 자각하게 하고 노동대중을 조직화하려는 움직임이었다.

그러한 사상적・실천적 고민 속에서 80년대 난무한 운동이론들이 등장했다. 선도투쟁론, 대중투쟁론, 전위조직론, 소모임 운동론, 현장론(준비론), 야학비판론, 정치적 대중조직론, 혁명적 대중조직론, 자주적 노동조합론 등 수많은 이론투쟁들이 난무하며 팸플릿 형태로 지하에서 배포되었다.

거기다 85년 2・12(12대) 총선에서 야당인 신민당의 돌풍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추진하는 '개헌 국면'이 조성되었다. 정치적으로 '개헌 국면'이 조성되면서 제1 야당인 신민당은 1986년 3월 23일 부산대회를 시작으로 3월 30일 광주대회, 4월 5일 대구대회를 통해 현판식 집회 분위기는 그 규모 면에서 예상 밖으로 놀라웠다. 대중 집회로서 현판식 집회 분위기는 사회변혁을 가져올 정도로 뜨거웠다.

그러나 서울대학교 학생운동권에선 야당에 의해 주도되던 당시 '개헌 정치 국면'을 부르주아적 개량주의라고 단칼에 잘라 비판했다. '개헌 국면'을 주도한 주체 세력이 김영삼+김대중으로 대표되는 보수 야당(신민당)이자 부르주아 정당으로 당대 사회운동을 왜곡시킬 것으로 판단했다. 서울대 학생운동권은 개량주의 성격인 '개헌'보다 '민주헌법을 제정하고 민중의회를 쟁취'할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1986년 4월 24일 <민족민주선언>이라는 서울대 유인물을 통해 뚜렷해졌다. '개헌 국면'은 정치적으로 부르주아적 개량주의 전술이기에 '민주헌법을 제정하고 민중의회를 쟁취'하는 방향으로 정치사회운동이 나아가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대중 집회로서 보수 야당(신민당)의 개헌 현판식 집회는 그 대중적 열기가 충격적일 정도로 뜨거웠고 대단했으며 변혁적이었다. 이러한 변혁적인 뜨거운 변혁 열기에 기름을 부은 사건이 87년 1월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이었다.

▲ 87년 1월 남영동 대공분실로 강제연행된 지 10시간 만에 물고문으로 사망한 박종철 군 32주기 시민추모식 안내문. 남영동 대공분실은 오늘날 민주인권기념관으로 변경되었다. (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그리고 사회변혁의 기운을 전국적인 투쟁으로 촉발시킨 사건이 87년 6월 이한열 군 최루탄 피격 사건이었다. 비록 보수 야당이 주도한 개헌 국면이지만 이는 87년 6월 항쟁, 바로 6월 시민혁명을 추동한 동인으로 작용했다.

▲ 87년 6월 민주항쟁을 전국적인 시위로 불붙인 이한열 열사 31주기 추모식 장면. 이한열 열사는 당시 연세대 경영학과 2학년에 재학하였다. 6,10 민주항쟁을 하루 앞두고 6/9일 연세인 결의대회를 마치고 교문으로 진출하여 전투경찰과 대치하는 도중 연세대 정문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 직격탄에 맞아 7/5일 운명했다.

(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986년에 들어서서 당시 사회운동의 중심이었던 학생운동은 사상투쟁을 거치며 두 갈래로 갈라졌다. 서울대 인문대를 중심으로 제헌의회 그룹(CA그룹)을 비롯해 <반제 반파쇼 민족민주투쟁>(약칭 민민투) 계열은 개헌 열기의 대세에 밀려 점차 학생운동의 소수세력으로 밀려났다.

대신 신민당 개헌 현판식 대중 집회가 인천 민주화 시위(1986. 5. 4)로 폭발하면서 이후 서울대 사회대 중심의 학생운동권은 보수적인 야당 정치세력에 융통성을 보이며 직선제 '개헌 국면'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이들 학생운동 세력이 <반미자주화 반파쇼 민주화투쟁>(약칭 자민투) 계열이다.

이들은 '개헌 국면'이 비록 보수 야당에 의해 시작되고 주도되었지만 대중적 열기가 혁명적 분위기로 치닫는 만큼 6월 '개헌 국면'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자민투 계열 학생운동 세력은 서울대 사회대, 고려대, 한양대를 비롯해 80년대 후반 전국 각 대학 학생운동의 중심세력으로 부상했다.

▲ 87년 전두환 5공 정권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보수야당과 국민적 열망에 대해 4/13 호헌을 천명했다. 그러자 서울지역 대학가에선 <호헌철폐>, <군부독재타도>를 외치며 길거리 가두시위에 대규모로 참여하였다. 전투경찰 백골단의 체포 진압이 시작되자 이를 피해 황급히 달아나는 학생들 모습(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80년대 후반 학생운동세력의 대명사인 '전대협'(전국대학생 대표자협의회의 약칭)은 명실공히 대학가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을 비롯해 학생운동의 중심이자 사회운동의 핵심선도세력으로 활약하였다.

85년 2・12 총선 이후, 86년 정치권에서 일기 시작한 '개헌 투쟁'국면의 혁명적 열기 속에 한국사회는 84년부터 청년재야단체에서 논의된 초기 사회성격논쟁(CDR-NDR-PDR)에서 80년대 후반 치열한 이론 투쟁을 거쳐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로 그 성격을 규정하는 데 합의를 보았다.

다만 '신식민지=반제국주의'에 비중을 두는가 아니면 '국가독점자본'에 방점을 찍는가에 따라 민족해방(NL)계열과 민중민주(PD)계열로 전체운동권이 양분되었다. 따라서 80년대 후반 노동운동은 양분된 전체운동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교육노동운동, 전교조 역시 예외일 수 없었다. 전교조 30년 교육노동운동의 역사 속에 NL과 PD 정파 간 갈등은 골이 깊었다.

다시 교육운동을 주도한 전교협과 교육노동운동의 핵심, 전교조로 돌아가자. 87년 7, 8, 9월 노동운동의 폭발적 열기 속에 그리고 80년대 후반 전체운동의 흐름 속에 전교협(1987년 9월) - 전교조(1989년 5월)가 출범하였다.

교사노동조합의 전신인 전교협(1987년 9월, 전국교사협의회의 약칭)의 등장과 그 운동 인맥과 물적 기반을 고스란히 계승한 전교조(1989년 5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약칭)는 교직사회 80년대 교육노동운동의 산물이자 결실이다.

그렇다면 80년대 교직사회 교육(노동)운동을 살펴봄으로써 전교협과 구로고등학교 평교사회 결성을 복기해 보고자 한다.

1987년 9월 창립된 전교협은 80년대 초반 교육운동을 이끌어 온 양대 산맥, 바로 'YMCA 중등교육자협의회'(1982, 약칭 Y교협)와 이오덕 선생이 주도한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1983)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물론 80년대 교육운동의 흐름 속엔 공개, 비공개 조직이나 지역 소모임 형태도 존재했다. 대표적인 공개조직으로 Y교협과 글쓰기교육연구회, 흥사단교육문화연구회(1984), YWCA 사우회를 거론할 수 있다.

그런가하면 민중교육운동의 일환으로 노동야학 관련 지역 야학교사 소모임이 비공개로 존재했다. 그리고 교육운동의 거대한 저수지인 '서울 강서 남부지역 교사모임'도 비공개 조직으로 활동 중이었다.

이들 노동야학 교사들이나 지역교사 모임에 참여한 교사들 상당수는 80년 광주학살의 참상을 딛고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참교육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한 20대 청년교사들이었다.

이들은 제도교육권 내에 광범위하게 형성된 교육운동의 객관적 상황에 주목했다. 30만 교사가 매일 1,000만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육현장을 민중교육을 실천할 수 있는 토대로 인식하였다.

70년대 말부터 한국사회에 널리 보급된 파울로 프레이리의『페다고지』와 이반 일리치의『탈학교 사회』, 『새시대를 위한 선언』그리고 80년대 출판문화운동에 힘입어 소개된 마틴 카노이의『교육과 문화적 식민주의』, 카라벨과 사무엘 보울스의 『교육과 사회구조』, 성내운, 김상봉의 『세 학교의 이야기』, 엘리아스의 『의식화와 탈학교』, 『민족해방과 교육운동』, 일본교원노조, 바로 일교조를 다룬『인간의 벽』, 사회주의 교육을 소개한 『소련의 학교교육』,

그 외에 『교사와 권리』, 『교육노동운동』, 『교육사상사』, 『민중교육론』등 교육운동과 제3세계 민중교육이론이 청년교사들 의식에 깊은 영향을 준 탓이다. 이와 더불어 광주학살에 대한 부채의식과 신군부정권의 폭압적 통치를 종식시키고 이 땅에 민주주의와 정의가 흘러넘치게 하려는 기백이 시대의 소명으로 주어졌다.

무엇보다 학교현장에서 맞닥뜨린 교육현실은 참교육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거짓과 위선의 교육으로 청년교사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일제 식민지 교육의 연장이자 국가주의 관료행정의 폐단이 버젓이 교육인 양 학교현장을 짓누르고 있는 양상은 참을 수 없는 교육모순이었다.

정의에 눈멀지 않고 양심을 저버리는 교사가 아닌 이상, 학교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청년 교사들의 가슴 속에 저절로 자연스럽게 응축돼 갔다.

서정주를 비롯해 20대 젊은 날 친일시와 소설을 쓰며 일제를 찬양한 자들의 작품들이 버젓이 국정교과서에 실렸던 게 80년대 풍경이었다. 아이들은 시험에 나올세라 작품을 분석하고 암기하는 데 정신이 없었다.

최초의 신소설 『혈의 루』를 훌륭한 작품으로 외며 이인직을 머릿속에 기억해 두는 것도 당시 모습이었다. 나라를 팔아먹는 데 앞장선 인물이라는 사실은 가르쳐주질 않았다. 역사청산이 단 한 번도 없었던 한국사회는 교육현장마저 수십 년 동안 기형적인 불구의 상태가 지속되었다.

오직 단편적 지식을 강압적으로 달달달 암기시켜서 시험에 많이 합격시키는 게 당대 교육자들이 처한 모순된 현실이었다. 강고한 학벌주의 이데올로기가 한국사회를 뒤덮었다. 학교교육은 입신출세 위주로 정형화된 참담한 현실이 계속되었다.

게다가 암울한 교육현실에 질식된 채 매년 100명 가까운 어린 학생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이 반복되었다. 86년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를 절규하며 자살한 15살 어린 여중생의 죽음은 비록 교사사회에 크나큰 울림으로 다가왔지만 학벌사회는 변화의 미동도 없었다.

전국의 모든 학교들은 여전히 강제 보충수업과 밤 10시까지 야간 자율학습을 강요하던 시절이었으니까! 필자가 근무했던 구로고등학교에선 어느 반의 경우 밤 12시까지 야간자율학습을 시킨 성실한(?) 교사도 있었다.

거기다 월요일마다 열리는 운동장 애국조회, 매일 반복해서 전 국민을 통제했던 국기강하식 행사, 청소년 수련활동을 빙자한 군대식 극기 훈련 강요는 빠질 수 없는 교육일상이었다.

무엇보다 상명하복의 권위주의 학교문화가 교직사회를 무겁게 '침묵의 문화'로 고착시켰다. 지시와 전달만 있을 뿐 교직원회의에서 토론은 없었고 부교재 채택비, 촌지문화 등 부조리와 불의가 상존했다.

이렇듯 교육모순과 학교의 비민주적인 일상에 깊은 회의를 느낀 청년교사들은 70-80년대 학생운동과 사회운동을 통해 체득한 의식에 기초해 거대한 모순 앞에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

1980년 서울의 봄과 광주민중항쟁이 무참히 짓밟힌 절망 속에서 당시 '저항'은 시대의 교사로서 존립 근거이자 최소한 교육자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부끄럽지 않을 자기 존재 이유였다.

YMCA 합법 공간을 이용한 'Y교협'은 맨 먼저 대구 Y교협(1981년 말경)이 창립되고 이어서 광주 Y교협(1982년 1월), 서울 Y교협(1982년 2월), 여수 Y교협(1982년 7월), 부산 Y교협(1982년 7월), 서울 초등 Y교협(1983)이 결성되었다.

1984년 들어서 정치적 유화국면을 타고 평택, 성남, 인천, 마산, 목포, 홍성에서 Y교협이 속속 결성되었다. 1985년엔 진주, 춘천, 대전, 거창, 해남, 안동, 울산, 순천에 그리고 1986년엔 전주에서 YMCA교사협의회가 창립되었다.

따라서 지역 교사조직을 토대로 87년 6월 항쟁 직후 그 열기를 모아 전국적인 교사대중조직인 전교협을 건설하는 데 중요한 한 축을 형성할 수 있었다.

이오덕 선생이 중심이 돼 만든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1983)도 1987년 6월 항쟁 당시 회원수가 1,000명이 넘을 정도로 전국적인 대중조직의 형태를 갖췄다. 이들 글쓰기 연구회 회원들은 1987년 전교협 결성과 1989년 전교조 결성 초기에 경기지부, 충북지부, 충남지부, 대구지부, 경북지부, 부산지부, 인천지부, 제주지부에서 초기 지도부를 구성하는 데 기여하였다.

다시 말해 전교협(1987)과 전교조(1989)의 탄생에는 80년대 초부터 시작된 'YMCA 교사협의회'와 '글쓰기 교육연구회'라는 두 개의 전국적인 지역교사 대중조직이 튼튼한 토대로 작용하였다.

특히 이오덕 선생이 만든 글쓰기교육연구회는 '글쓰기교육'이야말로 아이들을 낡은 질서로부터 해방시키는 '참교육'임을 강조하였다. 실제로 '참교육'이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한 분이 이오덕 선생으로 그분은 당대 의식적으로 선진화된 교사들에게 크게 주목을 받고 있었다.

1989년 출범 당시 전교조가 내세운 '참교육' 이념인 「민족교육, 민주교육, 인간화교육」 가운데 '인간화교육'이라는 표현을 써야 한다고 유독 강조한 분도 역시 이오덕 선생이었다.

▲ 어린이 문학가 권정생 작가를 발굴한 이오덕 선생. 둘은 12살의 나이 차이에도 30년 지음으로 지냈다. 경북 안동 일직교회로 권정생 작가를 찾아갔을 때 찍은 사진이다. 이오덕은 낡은 교육질서를 깨뜨린 한국의 페스탈로치였다.

(출처 : 양철북 제공)

전교조 출범과 동시에 교육운동의 하나로 내건 슬로건 가운데 '촌지거부운동' 역시 이오덕 선생이 주창한 내용이라는 사실은 교육운동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전교협은 출범 직후 기관지 『전국교사신문』을 발행하고 『상록회』 사건(1983), 『민중교육』지 사건(1985), 『교육민주화 선언』 사건(1986) 등으로 쫓겨난 해직교사 복직투쟁을 시작으로 교육법 개정 투쟁과 사립학교 정상화 투쟁, 강제 보충자율학습 폐지 투쟁, 관제 연수 개선 투쟁, 대한교련 탈퇴운동, 교재 채택료 거부운동, 촌지거부운동, 근무평정 폐지운동, 교원인사위원회 설치 운동을 전개했다. 전교협의 교육운동은 전국적으로 학교현장의 뜨거운 지지와 호응을 얻었다.

이러한 전교협 중앙조직의 활동과 별개로 또는 전국적인 교사대중조직 전교협의 결성에 영향을 받아 1987년과 1988년 11월 사이에 지역 교협과 단위학교 평교사회가 속속 결성되었다.

1989년 3월 전교조 결성 전까지 지역교사협의회는 전국적으로 130개 시군구 지역에서 창립되었다. 단위학교 평교사회 역시 1987년 9월에 창립된 여수 구봉중학교 평교사협의회를 비롯해 여수지역에서만 25개 단위학교에서 평교사회가 창립되었고 1989년 5월 전교조 결성 전까지 전국에 걸쳐 750개가 넘는 평교사회가 결성되었다.

구로고등학교 역시 1987년 6월 항쟁 '개헌 국면'에서 4・13호헌조치 철회를 요구하는 「조속한 정치민주화를 촉구한다」는 서울교사 105인 선언에 김동춘, 하헌종, 하성환 교사 3명이 선언에 참여하였다.

이들 3인 교사들은 1987년 7월 3일 성균관대학교 금잔디 광장에서 열린 '민주교육법 쟁취와 보충자율학습 폐지를 위한 전국교사대회'에 참가하였다. 그리고 이들 교사들은 남부지역 교사 소모임 활동에 학교대표자로 참여하거나 구로고 학교현장에서 벌어지는 비민주적인 관행을 개선하기 위해 비정기적인 소모임을 갖기도 하였다.

이들 중 일부 교사는 구로공단에서 노동야학 강학으로 활동하며 학생운동 출신 현장 노동자들과 비공개 소모임을 갖기도 하였다. 그들 중 일부는 울산 현대중공업, 현대정공이 있는 울산으로 내려가 울산지역 대기업 노조결성에 심혈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이후 구로고등학교 교사들은 1988년 들어서 송인석 선생님을 중심으로 새로 전근해 온 김승만 선생님, 김을식 선생님, 그리고 신규발령을 받은 김주영 선생님, 임영종 선생님, 강경구 선생님, 신영준 선생님과 함께 현장 활동 역량을 강화시켜 나갔다.

전교협 산하 서울 '강서남부지역교사협의회'가 1988년 창립되고 초대 회장엔 김승만 선생님(구로고)이 추대되었다. 당시 강서 남부지역은 교사운동, 교육운동의 거대한 저수지였다. 최소 200-300명 이상 현장 활동가 교사들이 지역교사 소모임 활동을 통해 교육모순, 학교현장의 문제들을 공유하며 단위학교 활동가로 그리고 지역 교육운동 연대의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실제로 1989년 전교조 결성 당시 강서남부지역 해직교사들은 200명이 넘어 부산, 대구, 광주, 대전, 인천지부를 비롯해 여타 시도 지부 해직자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서울지부를 제외하고 가장 많은 해직교사를 배출한 지부는 광주지부로 127명에 지나지 않았으니 강서남부지역 교사운동, 교육운동의 역량이 얼마나 컸는지 가히 놀라울 정도였다.

이에 따라 구로고등학교 평교사들은 구로고 평교사회를 조직하기 위해 노력했다. 1988년 11월 17일 송인석 선생님(지구과학)을 초대 회장으로, 윤상천 선생님(한문)을 부회장으로 그리고 김동춘 선생님(지리)을 총무로 선출하였다. 구로고 교사 총 85명 가운데 40명이 평교사회 소속으로 가입하였다. 구로고 평교사회 결성과정을 좀 더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구로고 평교사회 결성과정 경과>

① 1988년 봄 : 몇 명의 젊은 교사들이 사석에서 평교사회 결성의 당위성과 필요성에 대해 논의를 하였다.

② 1988년 9월-10월 : 평교사회 결성의 당위성과 구로고등학교의 현실적 조건에 대해 사석에서 토론하였다.

③ 1988년 10월 31일 : 10명이 넘는 20대-30대 젊은 교사들이 평교사회 건설 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전체 교사들을 대상으로 학교문제에 대한 여론 수렴과 평교사회 결성 취지, 그리고 향후 전개할 평교사회 활동을 적극 홍보하였다.

④ 1988년 11월 8일 : 전체 교사를 대상으로 평교사회 결성 취지문을 배포하고 가입을 권유하는 서명활동을 전개하였다.

⑤ 1988년 11월 10일 : 41명의 서명을 기초로 평교사회 발기인 대회를 개최하고 그 자리에서 평교사회 건설의 절차와 평교사회 활동 내용을 집중적으로 논의하였다. 아울러 평교사회 건설 준비위원회도 발족시켰다.

⑥ 1988년 11월 17일 : 서명자 가운데 1명이 탈퇴하고 40명의 평교사를 확보한 상태에서 30명 교사들이 참가하여 역사적인 구로고 평교사회 창립대회를 개최하였다. 김동춘 선생님이 사회를 진행했다. 창립대회는 경과보고-축사-창립선언문 낭독-정관 통과-의장단 선출-평교사회 활동 내용 및 계획 검토 - 결의문 낭독-축가 순서로 진행되었다.

회장단엔 송인석(회장), 윤상천(부회장), 김동춘(총무)가 선출되었고 근처 학교인 구로중학교와 영림중학교 평교사회 교사들이 참여하여 축사와 함께 마지막엔 축가를 불러주었다.

⑦ 1988년 11월 24일 : 평교사회 임시총회를 개최하고 사업계획을 심의하였으며 회장이 선임한 각부 부장교사들을 임시총회에서 인준하였다.

총무 : 김동춘 선생님(지리), 연수홍보부 : 하헌종 선생님(사회),

교원부 : 윤만길 선생님(음악), 학생교육부 : 이재선 선생님(영어),

친교부 : 최정렬 선생님(물리)이 선임되었다.

▲ 1988년 11월 17일 창립대회를 마친 구로고 평교사회 1기 집행부 조직도(출처 : 하성환)

* <1988년 평교사회 각부 활동 계획>

① 교원부 :

교육활동을 위한 교사의 교육환경 개선을 추구하되 구체적으로 교사의 교육활동 여건 개선, 학교교육 환경 개선, 학교에 대한 교사의 창구 역할을 담당. 단기 계획으로 설문 조사 분석, 각종 편의시설 개선 건의, 교사 수칙 마련, 그 외 공개토론회, 집단 면담 등을 추진할 예정.

② 연수홍보부 : 회보 「매듭」 발간(월 1회)

교사의 자기수련 보조, 각종 정보 수집과 전달, 각종 연수 계획

③ 학생교육부 : 학생 심성 개발 프로그램 마련 및 시행, 학생 자치 활동 중 학급 모둠 활동 운영 소개 및 실천 장려

④ 친교부 : 방학 중 한 번의 MT 계획 추진하고 내년에 영림중 등 주변 학교와 친선 경기를 갖도록 함.

구로고 평교사회는 교육악법 개정 투쟁에 발맞추어 1988년 12월 7일 국민정신교육관에서 24명 교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교육법 토론회를 개최했다.

윤상천 선생님(평교사회 부회장)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교육법 토론회에서 발제를 해주신 40대 중견교사 나동현 선생님은 "지식인은 역사적으로 표리부동했고 우리나라 교육의 역사도 예외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식민잔재와 외세에 의한 권위주의 정권이 대물림되면서 교육현실은 일방통행이었고 그 그늘에서 교사는 무기력한 모습으로 타성에 젖어버렸다"고 비판했다. "거기에 교육법조차 많은 제한을 두어 교사의 교육활동을 크게 위축시켜 왔음"을 지적했다.

따라서 "이번 전교협이 제시안 교육법 개정안이 통과되지 못하더라도 교사들은 교육법 개정 투쟁을 위한 노력을 지속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20대-30대 젊은 교사들의 활동을 격려했다.

학생교육부장 이재선 선생님(영어)은 "'행복한 교사가 행복한 아이를 키운다'고 생각하면서 이제껏 교사인 자신은 정말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행복했었는가 자신에게 반문해 본다"고 했다.

"참교사가 되기 위한 오늘 교육법 개정을 위한 토론회 모임이 너무 값지고 알찬 시간이었으며 교사를 일차적으로 규정하는 외부 틀인 교육악법 개정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활동"이라고 소회로 밝히기도 하였다.

구로고 평교사회에서 매월 1회 발간하는 회보 「매듭」은 1988년 12월 20일 겨울방학을 앞두고 25쪽 분량 창간호로 나왔다. 회보 이름을 「매듭」으로 지은 것은 지나간 역사와 앞으로 다가올 시간 속에서 잘못 매어진 매듭은 풀고 또한 구로고 선생님들의 마음을 올곧게 맺자는 뜻에서 「매듭」으로 회보 이름을 정했다.

▲ 구로고 평교사회 회보 25쪽 분량의 <매듭> 창간호(출처 : 하성환)1988년 11/17일 20-30대 젊은 교사들이 중심이 돼 구로고 평교사회를 창립하였다. 그리고 한 달 뒤 12/20 평교사회 회보 <매듭> 창간호를 발간하였다.

선생님들의 교단 체험이나 생활글, 그리고 교육문제에 대한 비판적 의견이나 문예활동 등을 원고로 실었다. 구로고 평교사회 회보 「매듭」은 창간호로 막을 내렸다. 결국 「매듭」은 1989년 전교조 결성과 탄압 국면에서 전교조 구로고 분회에서 발간한 「교육과 노동」으로 그 맥을 이어나갔다.

▲ 1989년 6/3 전교조 《구로고 분회》를 창립하고 회보 <교육과 노동>을 발간했다.(출처 : 하성환)

외적으로 1989년 2월 대의원대회에서 교원노동조합(전교조) 결성을 의결한 결과, 새학기를 맞은 1989년 3-4월은 숨 가쁘게 전교조 결성 투쟁 국면으로 진입한 탓이었다.

내적으로는 2기 구로고등학교 평교사회 활동과정에서 학교당국과 갈등을 빚으며 평교사회 내부 이견이 노출되며 집행력이 떨어진 때문이었다. 4월 들어 5-6번에 걸친 평교사회 운영위 회의와 확대운영위 회의, 그리고 운영위 비상회의가 열릴 정도로 학교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갔다.

구로고 평교사회 2기 집행부는 1989년 4월 3일 평교사회 운영위에서 구성되고 4월 15일 평교사회 총회에서 인준을 받기로 하였다.

▲ 1989년 4월 구로고 평교사회 2기 집행부 조직도(출처 : 하성환)

2기 구로고 평교사회 집행부는 1989년에 구로고등학교로 발령을 받은 이인곤(역사), 양달섭(역사), 윤석룡(수학), 이서복(지리) 선생님 등 역량 있는 교사들로 구성되었다. 안타까운 것은 80년대 중후반 구로고 교육운동의 핵심 활동 인자였던 김동춘 선생님이 역사문제연구소로, 그리고 하헌종 선생님이 수도여고로 떠났다.

대신 열혈 활동가인 이인곤 선생님과 양달섭 선생님이 그 빈자리를 훌륭히 메워주었다. 2기 평교사회 회장으로 이인곤 선생님, 부회장에 윤상천 선생님, 총무엔 하성환 선생님이 지명을 받았다.

구로고 평교사회 2기 집행부는 89학년도 연중 계획과 학교예산 공개 문제, 그리고 4월 월례회의와 MT (관악산 산행) 문제를 주요 안건으로 다루었다. 특히 학교예산 공개 문제와 더불어 학교교육계획 수립과 학교운영에서 교사의 주체적 참여를 활동의 중심에 두었다.

이를 확실하게 다루기 위해서 '학교 육성회 예산 공개 특위'를 구성하여 특위에 평교사회 회장단과 김을식, 김승만 선생님이 참여하고 예산 공개 논의를 위해 양달섭, 하성환, 김주영 세 선생님이 자료를 준비하기로 하였다.

구로고 평교사회 활동은 수십 년간 누적된 학교현장 내 교육모순을 개선하는 데서부터 시작하였다. 육성회비, 학생회비, 찬조금, 교부금들 학교예산을 교직원회의 때 예산 총액과 세부 예산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에서부터 담임 배정과 업무분장을 주관할 교원인사위원회 설치를 요구했다.

나아가 학생회 주관 4・19 혁명 기념행사를 촉구했고 다가올 5월 교원노동조합(전교조) 건설 분위기 확산을 위한 교사토론회와 홍보활동을 전개했다.

1989년 당시 구로고등학교 학생회는 직선제로 선출 구성돼 있어서 학생 대중조직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1988년 구로고 학생회는 서울에서 석관고등학교에 이어 두 번째로 학생회 직선제를 쟁취한 선진적인 학교였다.

학교 내 풍물반, 연극반, 신문반 등 다양한 동아리들이 연대해 구로고 축제인 상록 축제도 학생회 임원들과 동아리연합회가 상시적인 회의를 통해 지역문화센터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구로고 학생 대중의 선진적인 의식의 성장은 1987년 6월 항쟁 당시 영등포역 시위를 비롯해 거리시위에 참여한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더구나 87년 12월 대통령선거 당시 구로구청에서 투개표함 선거부정 사건이 발생하자 대학생, 시민들과 함께 구로고 학생들이 구로구청 항쟁에 참여한 경험을 안고 있다.

▲ 2016년 7월 21일 서울시 종로구 선거연수원에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의뢰를 받은 한국정치학회(회장 강원택)의 주관으로 개표 및 계수 작업이 이뤄졌다. 1987년 12월16일 13대 대통령선거 당일 ‘문제의 투표함’이 된 지 29년 만이다. 봉인된 부재자 투표함을 29년만에 개표한 결과 노태우 후보가 72.4%를 획득하고 2위 김대중 후보가 13.3%에 머무는 등 압도적인 표차이를 드러냈다. 이는 당시 구로을구 지역투표에서 김대중 후보가 1위로 득표했음에도 군대 내 군부재자 투표가 공정하게 치러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광범위하게 부정이 저질러졌음을 충분히 암시한다. 전두환 5공 정권은 28개 중대 병력 4천명을 동원해 2박 3일 동안 부정선거에 항의농성하던 시민과 학생을 무자비하게 진압하였다. 옥상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헬기까지 동원하고 다연발 최루탄을 쏘아대는 등 백골단은 시위학생 1천여명을 연행해 208명을 구속하고 114명을 기소하였다. 폭력적인 진압과정에서 양원태 군(서울대 경영학과 3년)이 5층 강당에서 추락해 척추가 절단되는 심각한 척추 손상을 입는 것을 비롯해 수십 명이 부상당했다.

(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구로구청 선거부정에 항의하는 시민과 학생들의 정당한 항쟁을 군부독재정권은 새벽에 전격적으로 경찰병력을 투입해 잔인하게 진압하였다. 문제는 잔인하게 자행된 진압 장면을 구로고 학생들 다수가 직접 목격했다는 사실이다.

전쟁터를 방불케 만든 진압장면은 어린 학생들로 하여금 커다란 정신적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구로구청 건물 벽을 맞대고 보광아파트에 살던 구로고 학생들은 새벽에 개시된 진압작전의 실상을 충격 속에 접했다.

아침까지 이어진 진압작전은 등교시간대 학생들에게 트라우마로 남아 아이들 중엔 당시 전쟁터 같은 진압장면에 눈물을 흘리고 몸을 떨면서 당시 상황을 힘들게 진술하기도 하였다.

노동자의 일상을 접하게 되는 구로공단이 가까이 있고 구로구청 항쟁을 목격한 시대배경 이외에 구로고 선진적인 학생들은 학교 내 소모임 활동과 지역교회를 기반으로 하는 구로 지역사회 활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였다.

뿐만 아니라 학생회 간부들 상당수가 서초동 철거민 지역 방치된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공부방을 운영하는 활동을 하는 등 도시빈민 민중운동과도 깊은 연대를 맺고 있었다. 구로고 학생들의 선진적인 의식의 형성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게 아니었다. 먼저 구로고 평교사회 활동부터 살펴보자.

1989년 4월 구로고 평교사회 활동은 평교사회 조직을 통해 교사대중을 교육문제 인식과, 문제제기, 그리고 문제 해결의 주체로 묶어세우는 노력 못지않게 5월 교원노조 건설을 위한 선전홍보와 조직 활동에 주력하였다.

이를 위해 평교사회 2기 집행부 2차 회의(1989. 4. 10)에서는 일상적인 교육활동에서 전체 교사의 참여를 유도해 교직원회의를 '토론의 장'으로 활성화 시킬 생각이었다.

역사문학기행, 체육대회, 야유회들을 통해 교사 간 친목을 도모하고자 3차 집행부회의(1989. 4. 19)에서 5월 8일 안양유원지로 MT장소를 결정했다. 또한 회보 『매듭』과 소식지를 발간하여 학교문제를 수면 위로 드러내 교사토론을 활성화하고자 하였다.

나아가 현대사, 과학, 성경 모임 등 다양한 분야의 교사학습모임을 조직하기로 하고 교사 월례발표회를 통해 교사대중의 의식을 고양시키기로 하였다.

이 시기 구로고 평교사회가 주도적으로 실천한 활동 가운데 풍물반, 연극반 활동과 학급신문, 학교신문 만들기, 그리고 학습지도안 검열을 폐지시키기 위한 교사 의견수렴과 토론회 개최를 들 수 있다.

그 외에 교사, 학생 화장실과 숙직실 환경 개선, 교사휴게실, 교사연구실 등 시설 마련, 그리고 담임교사가 잡부금을 걷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의견이 문제의식으로 대두되었다.

평교사회 2기 3차 집행부회의에서는 4월 월례 총회를 4월 24일 개최하기로 하고 안건으로 학교신문 발간과 MT 시기와 장소, 그리고 교원노조 건설에 대해 다루었다. 특히 노동조합원(전교조) 교사를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가 주된 관심사였다.

평교사회 소속 교사들을 중심으로 하고 주변 교사들에게 교원노조 발기인 서명 작업과 함께 투쟁기금을 마련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이 시기 구로고 평교사회는 전체 교육운동이 학내 민주화 투쟁 국면에서 교원노조 건설 국면으로 급격히 이행되는 바람에 4/20 평교사회 집행부 비상회의가 열렸다.

예정됐던 4/24 월례 총회는 평교사회 확대운영위 회의로 대체되었다. 17명이 참석하여 평교사회의 위상과 역할, 그리고 교원노조와 관련하여 평교사회 활동방향과 노선에 대해 열띤 토론이 전개되었다. 당일 논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1989년 4월 24일 구로고 평교사회 확대운영위원회 회의 정리>

장소 : 상담실, 참석인원 : 17명

1. 평교사회 조직 위상과 역할에 대하여

① 교원노조 결성 전까지만 존속하는 것으로 하자

② 평교사회 활동이 지지부진하고 오히려 교사 대중의 적극적 활동을 방해하는 역할 을 하기에 당장 폐지시키자.

③ 교사 대중의 의견을 수렴하는 창구로 존속시켜야 한다.

④ 평교사회를 교사협의회로 개편해 주임교사(오늘날 부장교사)들을 편입시키자.

⑤ 평교사회는 학내 문제에만 국한시켜 논의하자

⑥ 집행부를 다시 구성하여 실질적인 활동을 추진하자

⑦ 교원노조 건설과 관련하여 평교사회 활동 목적에 위배되는 회원교사들을 징계규정 을 두어 정리하자. 이는 평교사회 집행부 결정으로 총회에서 인준을 받아 교사 본 분에 어긋난 회원교사들을 정리하자

격론 끝에 ③번으로 의견이 모아짐.

 

2. 교원노조 건설과 관련한 문제에 대하여

① 평교사회 활동에 대해 냉랭한 분위기를 유도하거나 극히 보수적인 생각을 지닌

교사들의 태도로 교원노조조직 활동에 방해가 된다.

② 평교사회 활동이든 교원노조에 대해서든 학교장과 일상적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다.

③ 교육관의 차이에서 빚어지는 문제인 만큼 보수적인 교사들이나 학교장의 존재는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다.

④ 의식화 교육을 문제시하는 것에 대해 교육담론으로 대응해야 한다

⑤ 평교사회 소속인데 교원노조 관련하여 한겨레신문에 성명서를 발표하는 것은 교권 실추로 가는 것이다.

이들 문제와 함께 1989년 3월 개학과 동시에 구로고 평교사회 소속 열성적인 교사들이 담당했던 풍물반, 연극반, 신문반 동아리 활동이나 학급신문 발간과 관련하여 학교장과 대립, 갈등하는 상황이 지속되었다.

따라서 17명이 참석하여 진행된 평교사회 확대운영위 회의(1989. 4. 24)는 그런 학교 문제 갈등 상황을 안고 진행된 만큼 상당히 다양한 의견과 깊이 있는 토론, 그리고 정세분석까지 이뤄지는 등 당시 교원노조건설을 앞두고 활동가 교사들이 처한 의식적 단면이 도드라진 회의였다. 발언 교사들을 중심으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송인석(1기 평교사회 회장) :

"현 2기 평교사회 집행부는 퇴진해야 한다. 초반의 문제 제기 가운데 문제 해결에 진전을 보인 것은 일숙직 문제 정도이다. 나머지 문제는 진전이 없다. 오히려 학교장과 감정 대립을 초래했고 이로 인해 평교사회 회원 간 분열을 조장했다. 교장, 교감은 평교사회 존재의의를 깨닫지 못하는 만큼 평교사회를 탈퇴하여 평교사회의 중요성을 일깨워주고 싶다. 평교사회를 해체하고 소수 인원으로 일할 수 있는 사람들끼리 확실하게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김을식(연극반 지도교사) :

"평교사회 집행부의 뚜렷한 과오가 없는데도 집행부 퇴진을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다. 집행부의 노력을 인정하되 개인의 과오는 처벌조항을 신설하면 된다. 풍물반, 신문반 활동에 대해 자세히 소명하도록 하자."

윤석룡(전교조 해직교사) :

"평교사회 전체 구성원들의 의견이 집약되어서 평교사회 활동이 이루어져야 한다."

양달섭(전교조 구로고 2대 분회장) :

"교사의 교권이 강조되는 차원에서 평교사회의 중요성을 교장에게 인식시켜야 한다. 교육현장의 모순을 해결하는 활동이 평교사회의 본질적인 문제이자 존재이유이다."

권칠선 :

"학교분위기는 조화와 화합을 통해 원만하게 조성돼야 한다. 갈등으로 치달으면 안 된다. 학급신문 발간에는 절차상 문제가 있다. 이 문제는 해당 반 담임과 상의할 필요가 있다. 평교사회 안건은 학내 문제로 한정시키고 평교사회를 교사협의회로 바꿔 주임교사들도 참여시키는 게 좋다."

하성환(평교사회 2기 총무) :

"전체 교사들의 다양한 의견이 표출될 수 있도록 소식지가 자주 나와야 한다."

최정렬 :

"평교사회가 지역교사협의회와 무관한 학교 자체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평교사회 본래 처음의 취지와 다르게 흘러서 나 스스로 활동에 소극적이다."

김승만(전교협 강서남부지역교사협의회 초대 회장, 전교조 구로고 초대 분회장) :

"현재 갈등 양상의 원인은 교원노조건설과 관련한 시국에서 학교 내 비판세력을 탄압하기 위한 국면에서 나오는 사회의 반동세력의 추세이다. 평교사회 나아가 교원노조를 지향하는 활동가 교사들을 탄압하고 그들을 무력화하기 위한 국면으로 시류에 편승한 채 기회주의적 속성을 노골화한 측면이 크다. 평교사회 지도부를 과격한 모습으로 고립시키고 교사들 간 분열을 조장해 결국 평교사회 무용론이 고개를 들게 하려는 저의가 있다. 학교장, 서무과장(행정실장)과 대립하며 과격한 이미지로 평교사회를 고립시키는 것은 결국 활동에 소극적인 교사들을 이탈시키고 학교장의 입지를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그리고 그 틈을 비집고 불안한 학교 분위기를 이용해 개량주의가 고개를 들 수 있다. 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선 평교사회 창립취지를 재고하며 원칙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 대화와 화합으로 상호 존중하되 위기를 극복함으로써 조직력을 오히려 강화하고 평교사회에 대한 신뢰와 교원노조건설에 대한 지지를 두텁게 할 수 있다."

 

89년 1학기 3-5월 내내 구로고 평교사회는 학교 육성회비 예산 공개나 학습지도안 검열 폐지문제, 그리고 학급신문 발간과 풍물반 지도교사 선정 문제, 신문반 활동 과정에서 학교장과 사사건건 대립하며 갈등하였다.

다가오는 5월 교원노조 건설 투쟁과 관련하여 평교사회의 위상을 발전적으로 전환시키려는 노력은 결실을 보지 못한 채, 떠밀리듯이 역사적인 1989년 5월을 맞았다. 구로고 평교사회는 1989년 4월 24일 확대운영위 회의를 끝으로 종결되었다. 이후 열린 교사회의는 전교조 구로고 분회 회의로 1989년 6월 12일에 처음 개최되었다.

▲ 87년 6월 항쟁 서울역 앞 시위 당시, 전투경찰이 시위대를 체포하러 가는 모습(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87년 6월 항쟁의 여파로 어느 정도 열린 공간을 배경삼아 구로고 평교사회가 1988년 11월 창립되었다. 그러나 창립된 지 6개월여 만에 누적된 학교모순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채 교원노조건설 투쟁이라는 역사의 격랑 속으로 뛰어들었다.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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