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교조 《구로고 분회》 창립 투쟁사 3

- Ⅲ 전교조 《구로고 분회》 창립 투쟁 前史 하성환 객원편집위원l승인2020.03.28l수정2020.03.29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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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로고 학생회 직선제 쟁취 활동과 고등학생운동

▲ 1975년 여의도에서 학도호국단 총검술 시범 훈련 장면(출처 : 국가기록원)

학도호국단은 1949년 이승만 반공국가에서 시작돼 1960년 4월 혁명으로 해체되었다. 그러나 박정희 제4공화국 유신정권에서 1975년 부활하여 학교를 병영화하였다. 그러나 1984년 정치적 유화국면을 배경으로 1985년 전두환 5공 정권 시절 해체되고 자주적인 학생회가 탄생하였다.

1984년 전두환 5공 정권이 취한 정치적 유화국면은 임명식 학도호국단 체제가 사라지고 대학가에서 총학생회 직선제가 실현되는 배경이 되었다. 학생회장 직선제 선출 흐름은 서울지역 고등학교에도 영향을 미쳤다.

서울지역에선 석관고등학교가 1987년 직선제 선거를 통한 학생회 구성을 최초로 이루어냈다. 구로고등학교 역시 1986년부터 직선제 회칙개정의 필요성에 공감하면서 대의원회에서 회칙개정 움직임을 보였다.

임명제에서 대의원회 간선제를 고집한 학교당국의 방해로 직선제 회칙개정은 난관에 봉착했다. 대의원회에서 직선제 회칙개정을 강력히 호소한 김관표 군이 간선제로 1987년 제5기 학생회장으로 당선되었다.

제5기 학생회는 회칙개정활동을 통해 학교당국과 줄다리기 끝에 1987년 직선제로 회칙 개정을 성사시켰다. 그 결과 1988년 제6기 학생회장 선거에서 2,200여 구로고 학생들이 직접 뽑은 학생회장을 탄생시켰다. 구로고 학생회 직선제 쟁취는 이후 구로고 학생자치 역량을 증폭시키는 초석이 되었다.

1988년 당시 서울지역에는 250개가 넘는 고등학교가 있었다. 그러나 직선제로 학생회장을 선출한 학교는 불과 20여개 정도의 학교에 지나지 않았다. 대부분 학교들은 1989년 7월~9월 전교조(참교육)지지 투쟁 과정에서 학교당국에 직선제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직선제 학생회를 간직한 학교들조차 자주적인 학생회 활동을 견실하게 수행할 정도로 학생자치 역량을 보유한 학교는 매우 드물었다. 그런 측면에서 수준 높은 자치역량을 보유한 구로고등학교 학생자치활동을 살펴보는 것은 80년대 고등학생운동을 이해하는 데 단초가 될 수 있다.

구로고등학교는 1982년 4월 6일 개교한 인문계 공립고등학교이다. 담벼락 하나로 신구로 초등학교와 영림중학교를 사이에 두고 있다.

80년대 당시 학교 주변 환경은 소규모 영세한 공장과 운수회사, 그리고 주변 대단지 아파트 건축공사로 소음이 끊이지 않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구로공단이 멀지 않은 곳에 있었고 구로(九老), 구로공단이라는 지역 이름이 주는 이미지 때문인지 학생들 스스로 학교에 대한 자긍심이 높지 않았다.

1987년 입학한 1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교복을 입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설문조사를 했을 때 학생들 과반수가 교복입기를 원했다. 이유는 구로고등학교가 구로공단 내 산업체 부설학교로 오해받는 낯선 시선이 부담스럽다는 이유였다. 심지어 일부 학생들은 학교이름을 구로고등학교가 아니라 축제 이름을 따서 상록고등학교로 개명하자는 주장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80년대 당시 학교문화는 군대식 학교문화의 연장이었다. 70년대 학도호국단으로 병영화된 학교풍경을 고스란히 반복하였다. 필자의 교단일기장엔 1987년 4월 9일(목) 아침 교직원회의 때 교감이 발언한 내용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시교위(서울시 교육위원회의 약칭, 오늘날 서울시 교육청)에서 우리학교 공납금 납부 실적이 제일 저조하다고 한다. 2, 3학년 400명 정도가 납부하지 않았다. 수업시간에 서무실(오늘날 행정실)로 호출하겠다. 담당 교과 선생님의 양해를 구한다. 그리고 장학 검열이 13일부터 있으니 청소 등 철저한 준비를 부탁한다." - 아침 교직원회의 때 교감 발언 내용

수업시간에 공납금 미납 학생들을 불러내겠다는 교감의 발언은 교사의 교육권과 학습권을 침해하는 태도로 교육자로서 위험한 발언이 아닐 수 없다. 당시 상명하복의 교직사회 문화를 읽을 수 있는 대목으로 비교육적이고 부끄러운 장면이었다.

1987년 4월 9일 오후 자율학습 시간엔 이런 지시도 내려왔다. 당일 풍경을 일기장에 기록된 내용 그대로 인용한다.

"1, 2학년 각반 반장, 부반장은 자율학습시간에 교련사열 준비를 위하여 운동장에서 제식 훈련 등 사열준비를 한다. 이 날 3학년 학도호국단 간부들은 1, 2학년 후배들을 엎드려뻗쳐를 비롯해 얼차려를 주면서 훈련을 시켰다. 억압적 지시가 교육행정가와 평교사 사이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권위주의 학교당국과 학생, 그리고 교사와 학생, 나아가 선후배 간에도 전염된 느낌이다. 특히 1, 2학년 반장, 부반장 앞에서 군림하는 3학년 간부 학생들의 모습은 마치 훈련소 조교 같았다."- 1987. 4/9 하성환 교단일기 중에서

▲ 87년 6월 항쟁 서울역 앞 시위 당시 전투경찰이 시위대를 검거하러 가는 모습(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987년 6・10 민주항쟁을 하루 앞둔 6월 9일 아침 교직원회의에선 교장이 직접 일어나서 마이크를 잡고 대통령 각하 지시사항(6/5일자)을 운운하며 "학생들 집회 참가를 막도록 조심할 것, 일체 불법집회는 참석하지 않도록 하고 특히 학교에서 붙들어두어 자율학습을 시켜 하나도 희생이 없도록 8시~10시까지 붙들어두도록" 재차 강조하였다. 그러면서 "만일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연대책임의 우려가 있으니 각별히 조심할 것"을 강조했다.

교장 발언 직후 교감도 일어나 이렇게 발언했다. "결석사유 중시하고 학생들 동태를 파악, 주시하여 보고할 것, 그리고 교내 유인물 살포여부를 중시하고 교사는 이석(離席)을 금지하고 오늘만은 착실히 근무해 달라"고 요구했다.

또한 "전날 대회 집회장에 가지 말 것을 내용으로 하는 유인물을 배포하고 버스 정류소나 사람이 우글거리는 곳에 가지 말도록 당부"했다.

"특히 오늘만은 교사들이 남아서 자율학습지도를 하고 분위기 흐리는 학생들을 보통 집으로 보내는데 오늘만은 보내지 말고 습성을 길러주는 방향으로 지도 당부한다며 정부 시책에 차질 없이 긴장해서 학생들을 지도할 것을 요망한다"고 발언했다.

그럼에도 1987년 6월 민주항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은 구로고 학생들 의식 저변에 광범위한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학생들의 숨겨진 참여의식과 억눌린 자치활동 역량이 지표면 위로 표출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밑으로부터 움직임은 1988년 고양된 학내 분위기 속에서 대중적인 학생자치역량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1988년 들어서서 문예반 학생들은 수개월에 걸친 편집회의 끝에 교지 특집을 기획하였다. ① 구로 지역의 역사 ② 문학 작품 속에 나타난 구로 ③ 구로지역의 환경 실태 ④ 구로지역인의 삶 ⑤ 구로지역인의 의식구조를 문헌연구나 사회조사방식으로 취재하여 기획 특집기사로 다루었다.

구로지역을 사회역사적으로 접근해 봄으로써 자기부정적인 비하의식을 극복하기 위한 건강한 동아리 활동이었다. 구로고등학교 학생들 의식 저변에 뿌리박힌 열등감을 과학적으로 규명함으로써 스스로 주체성을 획득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6개월에 걸친 특집 기획기사를 준비하고 실천하는 과정에서 문예반 학생들은 스스로 놀라운 자기의식의 변화를 경험했다. 나아가 학생대중들 역시 불건전한 과거의식에서 벗어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주체적인 학생자치활동이 가져온 놀라운 의식의 변화였다.

그렇다면 문예반 학생들의 그러한 소중한 경험과 성과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거기엔 80년대 중후반 구로고 학생들의 공개・비공개 소모임 활동과 서클활동의 결실이었다. 1984년 학생만남회(SMC : Student Meeting Club) 활동과 1987년 철학서클 활동, 그리고 1982년 개교 이래 지속돼온 고르반 노래서클활동이 존재했다.

SMC는 문학서클 활동으로 3학년 학생이 중심이 돼 1, 2학년 학생들 가운데 문학을 좋아하는 30명 정도 학생들로 구성된 비공개 조직이었다. 현실참여적인 작품들을 소개하거나 창작하여 회보 형태로 공동 발표하는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핵심적으로 활동한 3학년 학생들이 시국관련 유인물을 소지한 혐의로 경찰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교내 대자보사건과 연루되었다. 그 결과 교칙에 의해 징계 처벌을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활동이 위축되었고 결국 해체되었다.

1987년 3월에 조직된 철학 서클은 학내 문제에 관심을 보인 2학년 학생들이 주도했다. 현실문제의식이 뛰어난 학우들끼리 모여 독서토론을 하고 바람직한 고등학교 생활에 대해 생각을 나누는 비공개 소모임 활동이었다.

그러나 철학 서클은 2학기 들어서 학급신문 문제로 학교당국과 갈등을 빚으면서 징계 위협 끝에 활동이 위축되고 급기야 해체되었다. 이들 학생들은 기존 철학 서클을 해체하고 87년 2학기에 비공개 문학 서클을 조직했다.

▲ 1987년 2학기에 비공개 문학서클이 공동시집 형태로 발간한 64쪽 분량의 문집 <멜랑콜리 에콜라이>(출처 : 하성환)

자신들이 습작한 작품들을 그해 12월에 『멜랑콜리 에콜라이』라는 공동시집형태로 발간하기도 하였다. 이 시집 머리글에 한 학생은 이렇게 썼다.

"시를 해체하여 분석한다는 것이 얼마나 비평가들의 알량한 조작인가를, 특히 교과서의 그나마 편협한 시를 조작하는 교육풍조가 안타깝다. 나는 시에 있어서 작위성을 축소키 위해 의식 속에서 어느 새 위에 올라버린 미제국주의 문화를 부정하지 않았다. 또한 교과서에서 부르짖는 소위 전통시의 공허감에서 비롯된 반동적인 측면도 없지 않다. 나는 민족주의자는 아니다. 오로지 나는 한국인이다. 그러나 나는 서정주를 미워하고 이광수를 싫어한다. 글자 띄엄띄엄 읽으시는 우리들의 어머니를 사랑하고 친구들을 사랑한다." - 『멜랑콜리 에콜라이』머리글(1987. 12)

3인 공동시집형태로 발간된 『멜랑콜리 에콜라이』는 갑갑한 입시위주의 획일적인 교육풍토를 뛰어넘어 초현실로 치닫는 느낌이 강렬했다. 이러한 경향은 숨겨진 문학적 재능을 간직한 학생들이 87년 12월 대통령 선거의 좌절과 갑갑한 입시현실을 초월하려는 강렬한 욕망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반면에 기독교 선교중창단 학생들로 구성된 고르반 노래서클은 구로고등학교 학생자치활동의 역사 속에서 가장 오래된 서클이었다. 그러나 공개 순수서클이었음에도 학교장의 승인을 받지 못한 불법서클이었다.

학생들이 서클등록을 신청했음에도 학교장은 승인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유는 학생자치활동으로 승인 받을 경우 예산 배정을 해야 하는 부담 때문이었다. 불법 공개서클 고르반은 공연기금을 모아 결핵환자를 돕거나 소외 계층에 기부하는 활동을 꾸준히 펼쳐나갔다.

학교의 행・재정적 지원이 전무했음에도 탄압받지 않고 학교당국의 방임조치에 따라 지역사회 교회로부터 공연초청이 쇄도하는 등 구로지역 청소년 문화 활동으로 건재했다.

1987년 6월 항쟁의 여운 속에 구로고등학교 학생들은 1987년 2학기에 교내 학급신문 제작활동을 활발하게 펼쳤다. 나아가 교외에선 학교 간 연합서클형태로 고등학생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1학년 2개 반, 2학년 6개 반이 각자 학급신문을 제작하였는데 이러한 활동은 학생들 스스로 학내문제를 주체적으로 인식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1987년 9월 7일에 제작 발간된 『작은 외침』이라는 학급신문은 창간사설에서 보여주듯이 학생들 자신의 삶을 정직한 모습으로 표현해 보고 싶은 자연스러운 욕구에서 출발하였다.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기형적인 틀 안에서 하나의 기계가 되어버릴 수 있는 현실을 거부하면서 뛰어난 글재주나 문학작품을 발굴하고자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학생 자신들 삶의 모습을 보다 자유롭게 학생 자신들의 눈으로 비평해 보고자 만들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학급신문을 제작한 학생들은 공동체 삶의 표현의 장으로 학급신문을 생각하였고 학생들 스스로 ‘이상적인 학교사회’를 꿈꾸었던 것이다.

그러나 1987년 2학기부터 시작된 학급신문 파동은 학교당국의 거센 압박과 탄압에 직면했다. 실제로 학교당국의 방해는 위협적이었고 거칠었으며 반교육적이었다. 쓸데없이 학급신문을 만들어 면학분위기를 해친다든지 심지어 학급신문과 관련된 특정 담임교사를 인신공격하는 식으로 탄압했다.

결국 학급신문을 만들어 배포하는 것을 교육적으로 문제 삼을 명분이 부족하자 학교당국은 '지도'라는 미명 아래 학급신문에 대해 검열과 통제를 강화하며 학생들 자율 활동을 방해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학교당국의 집요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2학기 내내 학급신문을 발간하였으며 겨울방학까지 신문발행은 계속되었다.

학급신문과 관련된 학교당국의 대표적인 탄압 사례로 ‘연합문집(「하늘 가까이」)’ 탄압사건을 들 수 있다. 1987년 겨울방학 전부터 2학년 11반, 12반, 13반 3개 학급은 서로 연합하여 연합문집을 기획하였다.

▲ 1987년 구로고 2-11반, 12반, 13반 학생들이 만든 연합문집「하늘 가까이」(출처 : 하성환)

150쪽 분량으로 편집되었으나 학교당국의 방해로 해를 넘기면서 1988년 2월에 44쪽 분량으로 발간되었다.

그리하여 150쪽 분량으로 편집했으나 학교당국의 검열과 탄압으로 대부분 삭제된 채 44쪽 분량으로 발간되었다. 그것도 겨울방학이 다 지난 1988년 2월에 나온 것이다. 그만큼 학교당국은 학생들 스스로 자기의식이 성장하는 것을 불온시했고 억압했다.

구로고 학생들의 교외 연합서클 활동은 구로고 학생들이 항상 중심적으로 이끌었다. 대표적인 활동을 소개하면 구로고 학교 앞 시립도서관을 중심으로 전개한 독서회 활동, 바로 '상록독서회' 활동을 들 수 있다.

7개 지역 학생들로 구성된 연합서클인데 주제토론, 자유토론, 독서토론, 강연회 등 활동 영역은 다양했다. 특히 1987년 12월에 개최한 '늘 푸른 마을'문화강좌는 지역사회 청소년 문화 활동으로서 뜻깊은 행사였다.

그 중에 학교사회 체벌에 대한 공개토론회는 구로지역 학생 대중에게 현실 인식을 공유하고 공감을 유도한 매우 수준 높은 지역사회 활동이었다.

1988년 4월에는 교외연합서클 학생들이 대림제일교회에서 교육 문제를 지역사회에 널리 알리는 공개토론회 행사를 주도한 적이 있었다. 이 행사에는 학생, 학부모 수백 명이 참석하였는데 문병란 시인의 '교단'이란 시가 낭송되고 입시경쟁교육의 척박한 현실에 항거하면서 죽어간 친구들의 유고시가 소개되었다.

학생들은 일그러진 교육현실을 상황극으로 고발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러한 지역문화행사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학생들은 당연 구로고 학생들이었다.

풍물반 학생들은 1년 간 갈고 닦은 능력을 교외문화공간을 활용하여 맹렬히 활동 중이었다. 풍물반 학생들 가운데 88년 하반기 직선제 쟁취 투쟁 과정에서 직선제 초대 학생회장이 나오고 직선제 학생회 간부들이 구성되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점이다.

연극반 학생들 역시 스스로 대본을 만들고 다듬어서 연습에 정진하였고 은밀히 자신들의 성향에 맞고 지도능력을 갖춘 교사를 선정해 활동하였다.

구로고 학생들의 자발적인 비공개 소모임 조직과 지역 사회 활동에 더해 80년대 후반 구로고 학생대중의 의식을 크게 변화시킨 결정적인 역사적 사건이 두 가지 존재했다.

하나는 87년 12월 대통령 선거 당시 '공정감시단' 활동을 실천하던 교사들과 함께 '구로구청 부정선거' 규탄 대회에 구로고 학생들 수백 명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거나 진압 현장의 끔찍한 장면을 직접 목격했다는 점이다.

▲ 1987년 12월 <구로구청 부정선거 항쟁> 당시 미개봉된 구로구청 부재자 투표함이 2016년 7월 21일 중앙선관위의 의뢰를 받은 한국정치학회의 주관으로 29년만에 개봉되었다.(출처 : 한겨레 자료사진)

구로고등학교와 구로구청은 직선거리로 500m 정도여서 2학년 교실에선 진압현장인 구청 옥상이 훤히 보였다. 실제로 대선 당일인 1987년 12월 16일 밤 12시에 부정선거를 규탄하던 옥외방송에 끌려 구로고 학생들 다수가 모여들었다. 이들 중 수십 명은 17일 새벽까지 항의 농성에 참여하였다. 그들 중엔 대입학력고사 일주일을 앞둔 고3 학생들도 있었다.

'구로구청 부정선거' 규탄 항의농성에 대해 군부독재정권은 18일 아침 6시 30분에 28개 중대 전투경찰병력 4,000명을 투입해 무자비하게 진압하였다. 전쟁터를 방불케 한 진압현장은 등교하던 학생들이나 보광아파트에 거주하던 어린 학생들에게 크나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진압 장면을 목격한 학생 가운데엔 계속 눈물을 흘리거나 횡설수설하기도 하였다. 실제로 당시 구로고 2, 3학년 학생 10명이 경찰서로 강제 연행되었다.

또 하나 구로고 학생들의 의식을 변화시킨 것은 이듬해 4・26총선 당일 개표소로 쓰던 구로고등학교에서 개표부정이 발생한 사건이었다. 십 수 대의 경찰차량과 수백 명에 이르는 전투경찰이 운동장에 상주한 속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던 구로고 지역 주민들과 학생들은 항의시위를 벌였다.

경찰의 폭력적인 진압에 맞서 구로고 학생들 수십 명은 강제해산 과정에서 부상을 당한 시민들을 들쳐 업고 고대구로병원으로 옮기거나 새벽 2-3시까지 지속된 시위대열에 동참했다.

'구로구청 부정선거' 규탄 항의 농성 사건(1987. 12)과 '4・26총선 개표부정' 항의 시위 사건(1988. 4)은 구로고 학생들에게 한국사회 불의한 현실의 한 단면을 체험하게 한 사건으로 학생들 의식의 성장에 일정 부분 영향을 끼쳤다.

역사적 사건을 생생하게 직접 체험하고 목격함으로써 구로고 학생들은 민주주의의 살아있는 교육을 경험했다. 그것은 고스란히 학생 대중의 정치적 자각과 의식의 성장을 가져왔다.

이러한 농축된 구로고 학생 자치역량은 그대로 학생회 직선제 쟁취 투쟁으로 연결되었다. 1987년 회칙개정활동을 통해 직선제로 회칙을 개정한 상태에서 1988년 하반기 직선제 학생회장 선거를 맞이했다.

제6기 학생회장 선출과정에서 학교당국이 내세운 상위 20% 성적제한 규정을 무력화시키고 2,400명 학생대중의 압도적 지지를 받은 자신들의 대표! 학생회장을 선출한 것이다.

실제로 학교당국은 이듬해 제7기 학생회장 선거 때도 학생대중의 전폭적 지지를 받고 있는 민주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해 어용후보를 급조해 내세우며 직선제 학생회를 철저히 방해했다.

무엇보다 감격스러운 것은 직선제로 처음 뽑는 88년 제6기 학생회장 선거에서 학생회장 후보조건으로 학교당국이 내건 성적제한 규정을 학생대중의 힘으로 무너뜨리고 당당히 직선제 학생회장을 탄생시켰다는 사실이었다. 이는 87년 6월 항쟁 이후 대통령 '직선제 쟁취'라는 정치 사회분위기가 학교사회에 그대로 투영된 결과물이었다.

1988년 하반기 풍물반, 문예반, 연극반, 신문반 활동을 하던 선진적인 학생들은 또다시 회칙개정소위에 적극 참여하여 학생회장 성적제한 철폐투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나아가 89년 7기 학생회장 선거에서 학교 당국이 지원한 어용후보를 낙선시킨 경험은 학생들 스스로 대중의 힘을 느끼게 해준 소중한 체험이었다.

무엇보다 학생대중의 이해와 권익을 대변할 학생회장을 자신들의 손으로 직접 뽑았다는 사실은 구로고 학생들에겐 민주주의에 대한 생생한 경험이자 고등학생운동이 이룩한 훌륭한 위업이었다. 나아가 학생대중 스스로 귀중한 정신적 자산을 획득한 사건이었으며 성숙한 자치역량을 확인시켜 준 교육적 자산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직선제 쟁취투쟁 끝에 건설한 자주적인 제6기 학생회는 거수경례 등 고쳐야 할 비교육적인 학교문화를 철폐하고 소음공해에 따른 이중창 설치 요구 등 교육환경 개선에 앞장섰다. 나아가 학생휴게실과 구내식당, 게시판 설치 등 학생복지 공간 마련을 요구했다.

그리고 1987년부터 학교당국과 갈등을 빚었던 학교신문발간과 미등록 서클의 양성화와 동아리 예산 배정 등 학생자치활동의 전면적인 활성화를 촉구했다. 자주적인 학생회가 건설되면서 구로고등학교는 학교축제인 제1회 상록제(1988. 11. 5)를 지역사회문화 행사로 공식화하였다.

이 시기 구로고 평교사회는 직선제 1기 학생회와 연대활동을 도모하고자 했으나 평교사회 내부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무산되었다.

 

2. 서초동 꽃동네 철거민 공부방 활동과 학생회

구로고 학생들의 고등학생 운동 가운데 특별히 기억할 만한 활동이 있었다. 초대 직선제 학생회장이자 제6기 학생회장으로 당선된 류호철을 비롯해, 최규식, 김영헌, 서윤석 학생들은 지금 법원과 검찰청사가 들어선 서초동 꽃동네 판자촌에 가서 방치된 아이들을 돌보며 공부방을 운영하였다.

당시 서울교대를 중퇴하고 서초동 꽃동네 지역에서 도시빈민운동을 하던 여성 활동가와의 인연으로 공부방 활동에 참여하였다. 철거민 지역이라 맞벌이 부부가 다수인 초등학교 아이들이 방과 후에 방치되거나 소외돼 있다는 사실을 접하고 아이들 숙제와 학습을 지도하며 놀이도 함께 했다.

구로고 선진적인 학생들이 보여준 놀라운 봉사정신이자 소외계층에 대해 도움의 손길을 내민 연대정신의 발로였다. 구로고 학생들은 공부방 운영을 하면서 아이들 학습지도와 공동체 놀이를 통해서 사회문제에 대해 더욱 깊게 인식하는 계기를 마주했다.

학생들은 정기적으로 서초동 꽃동네를 찾아가 아이들의 든든한 공부방 교사가 되어주었으며 소외된 아이들이 일탈하지 않도록 멘토 역할을 훌륭하게 감당했다. 공부방을 운영하며 꽃동네 봉사활동을 실천하던 학생들은 구로고 교사인 필자에게 자신들의 활동 소식을 전했다.

그런 소식을 전해들은 필자 역시 정기적으로 꽃동네를 찾아가 도시빈민 성인들을 대상으로 저녁시간 한자교육을 담당했다. 당시 필자는 구파발 천주교회에서 야학교사로 활동하던 시절이라 서초동과 구파발을 번갈아가며 야학 활동을 했다.

▲ 1989년 11/26일 <89 민중대회> 당일 청량리에서 노태우 정권의 공안통치 분쇄를 열망하는 대학생 거리시위 장면

(출처 : 민족사진연구회) 

공안통치 분쇄 및 5공 광주 학살 주범 전두환, 정호용, 노태우 처단을 위한 <89 민중대회>가 1989년 11월 26일 전국 대학가를 비롯하여 서울 시내 곳곳에서 열렸다. 노태우 6공화국 군사정권은 전투경찰 95개 중대 병력, 1만 명이 넘는 전투경찰을 시내 곳곳에 풀어 원천봉쇄하였다. 당일 시내 곳곳에선 최루탄과 백골단의 쇠파이프, 그리고 대학생들이 던진 화염병이 격톨하면서 전쟁터를 방불했다.

당일 연세대에서도 전민련, 전교조, 전노협, 전대협, 전빈련(전국도시빈민연합의 약칭) 등 민주화운동 세력이 <민중운동 탄압 분쇄 및 전교조 합법성 쟁취 결의대회>를 열었다. 그러나 페퍼포그 차량에서 다연발탄을 난사하는 것을 시작으로 쇠파이프를 든 백골단 등 전투경찰 1,000여 명이 연세대로 한꺼번에 돌진하였다. 도서관, 학생회관을 지나 사회대 건물 뒷편에서 쇠파이프를 손에 쥔 백골단과 화염병을 든 대학생들이 맞서며 공방전이 벌어졌다.

오늘날 50대 전후 세대는 그 시절이 얼마나 치열했는가를 직접 몸으로 체험한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

이러한 도시빈민 연대활동은 1988년부터 1990년 초까지 지속되었다. 1989년 '89민중대회'가 연세대학교에서 개최되었을 때 경찰의 원천봉쇄에도 불구하고 캠퍼스 안에서 서초동 꽃동네 야학에서 만난 어른들을 뵈었던 기억이 있다. 당시 필자는 전교조운동에 매진하던 때라 도시빈민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지 못하고 뒤에서 지원하는 정도에 그쳤다.

서초동 꽃동네 공부방 경험을 통해 학생들은 서로 간 우정을 돈독히 쌓았다. 이러한 모습은 88년 하반기 직선제 학생회 쟁취투쟁과 89년 상반기 학생회 활동 당시 내부 결속과 함께 투쟁력을 발휘하는 힘이 되었다. 88년 하반기 직선제 학생회 출범 당시부터 학교당국의 집요한 방해와 탄압을 받았던 터라 학생회 임원들 간 문제인식을 공유하고 단합된 힘으로 학교현장의 모순을 헤쳐 나갔다.

1989년 들어서 교장과 교감이 새로 부임하였음에도 학생회에 대한 학교당국은 비협조로 일관했다. 오히려 학생회 활동을 더욱 노골적으로 방해하는 모습으로 치달았다. 89년 상반기 학생회비 예・결산 처리과정에서 학생회 의견을 무질러버린 적도 있었다.

게다가 풍물반 지도교사 선정과정에서 풍물에 해박한 지식과 경험이 많아 풍물반 학생들이 인정한 양달섭 선생님을 일부러 배척하고 다른 교사를 임의로 배정했다. 새로운 학교관리자들이 학생회 간부들을 길들이는 일종의 수순이었다.

더구나 지난 해 대의원대회에서 약속한 학교신문 발행에 대해 새로 부임한 교장은 신문 발행을 허락하지 않았다. 신문반만 유일하게 서클 등록도 불허했다. 심지어 신문을 발행할 경우 관계당국에 고발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대학입시를 중시해야 할 현실에서 신문발행은 무의미하다는 반교육자적 태도를 서슴없이 드러냈다. 4월 혁명과 5월 광주민주화운동 기념행사조차 불허했다. 구로고 총학생회에선 한 발 양보하여 운동장 행사가 아닌 방송으로 진행하겠다고 타협안을 제시했으나 이마저도 불허했다.

합법적인 공개조직인 학생회 활동이 학교당국의 협박과 위협 속에 위축되자 학생대중은 직선제 학생회 활동의 한계에 직면했다. 결국 합법, 비합법 동아리별로 조직된 학생대중은 학교당국의 반교육적인 태도에 분노하는 대자보와 이를 규탄하는 유인물을 20여 차례에 걸쳐 배포했다.

89년 상반기 무려 석 달에 걸쳐 학교당국의 처사를 격렬히 비판하는 선진적인 학생들의 은밀한 선전활동은 학생대중의 분노에 기초해 있었다. 이렇게 응축된 대중의 분노는 89년 6월 부당하게 해직된 ‘양달섭 선생님 지키기’ 시위운동에서 거대한 활화산처럼 폭발했다.

역사의 거친 격랑으로 내몰린 '전교조 사수'와 '참교육 확보' 투쟁에서 그들 꽃동네 공부방 봉사활동을 했던 학생회 간부들은 동지적 일체감과 연대감 속에서 학교에서 쫓겨난 ‘양달섭 선생님 지키기’ 운동에 희생과 헌신을 마다하지 않았다.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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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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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동호 2020-04-01 18:37:02

    지금 한겨레:온에는 전교조가 탄생하기 전의 시대적 배경과 노동운동사를 거쳐 , 당시의 학교 상황을 깊이있게 서술하는 전교조의 역사가 연재되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육성회비를 못 내서 수업중에 집으로 돌아갔던, 간다고 없는 돈이 생길 일도 없었지만.

    하성환 통신원의 일기장 속에 공납금 문제로 서무실 호출 내용을 보고 저도 선생님 그만 미워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신고 |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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