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난중일기는 여러분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듯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7년 전쟁 중에 쓴 이순신 장군의 일기이다.
1592년 양력 5월 23일(음력 4월 13일)에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하여 1598년 12월16일(음력 11월 19일)까지 무려 6년 6개월 23일 동안(2.696일) 벌어진 치욕적인 전쟁이다.

▲ 필자가 읽은 난중일기(1)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기록으로 남긴 날은 1,657일(정유년 일기 중에서 64일분 중복됨) 이다. 중복된 날을 뺀다면 1,593일간의 일기를 남기신 것이 된다. 그렇다면 전쟁 중 일기를 쓰지 않았던 날은 며칠일까? 1,103일이다. 이를 대강 전쟁 기간의 날짜와 비교해 본다면 2,696일 중 1,593일간의 일기를 남겼으니 59%에 해당하고, 일기를 쓰지 않는 날이 1,103일간이니 41%에 해당한다.

일기의 내용은 매우 간략하게 기술하고 있다. 조선 수군 1만여 명의 사연을 다 기록하거나 매사를 기록하지는 않았다. 기록되지 않는 내용의 일부는 호남절의록에 기록이 전하고 있다.

난중일기에 등장한 인물을 필자가 조사한 결과로는,

∎일본-가등청정, 풍신수길. 사고여음, 연은기, 사이여문, 소서행장, 현소, 사택정성, 망가시로, 여문연기, 야시로, 야여문, 여문연기, 등

∎명나라 – 진린(진 도독). 담종인, 마귀, 손광, 양기, 왕경, 왕경득, 왕재. 유정, 이여송, 이요, 이종성, 장홍유, 형개 등

∎우리나라 조정 – 선조, 광해군, 류성룡 등의 명단을 제외하면 이순신 막하 관련된 장수, 병사, 가노, 군량미 지원자, 무기나 화약 제조자 등 988여 명이 등장하고, 인척은 20여 명이 등장한다. 더 자세히 말씀드리면 이순신 본가의 종인 경(京)은 15번 등장하고, 종의 신분  62명이 116회 등장한다. 그리고 범법자로 효시를 당하거나 사형, 또는 곤장을 맞은 자, 도둑질하다가 잡혀 이마에 도(盜)자를 세긴 자, 일본과 내통하여 군 기밀을 제보 한 자 등도 33명이 등장한다.

여수 충민사 이충무공진충제공추모비에 108명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 44명이 난중일기에 등장하고 64명의 기록은 없다. 그뿐만 아니라 호남절의록에 이충무공 동순절자 명단이 58명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 8명은 난중일기에 등장하고 50명의 기록은 없다. 그렇다면 난중일기에 이름이 나오지 않는 분들은 허위일까? 아니다. 다른 서적으로 보아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고 생사를 넘나들며 구국대열에 앞장선 분들이 확실이다.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난감하다. 난중일기가 아닌 다른 기록을 참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저자에 따라 행여 다른 내용이 기록되어 있을지 모르기에 난중일기 3편을 읽어보았다. 그런데 저자의 주관적인 견해는 찾아볼 수 없었다. 난중일기를 다 읽고 난 뒤,

첫 번째 궁금한 것은 일기에 나오지 않는 이순신 장군의 전술이다. 무기와 병력이 왜군보다 약세이면서도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 장군의 전술은 우리국민의 감탄은 물론이고 세계가 놀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사적 통계로 보아 우리나라 군인과 민간인 20여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는데도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사실은 놀랍다. 이는 하늘의 도움이 아니고 이순신 장군과 우리 병사들의 구국에 대한 열망과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끝까지 싸운 애국심의 극치라고 생각된다. 

두 번째로 기억나는 사실은 이순신 장군의 주량이다, 이순신 하면 술이요, 술 하면 이순신이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순신 장군을 대장부? 혹은 영웅이라 칭할 수 있지 않을까? 

세 번째로는 모함을 당하면서도 감내하는 성격이다. 국가와 백성을 위한 언사가 아닌, 개인의 욕망과 야욕으로 꾸며진 모함인 줄 모를 리 없건만 크게 대적하지 않았다.  후세들도 잘 알고 있는 원균의 처사는 마땅히 규탄 받아야 한다.

네 번째로는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 사랑이다. 전쟁의 와중에서도 항시 어머니와 부인 그리고 자식을 걱정하는 마음씨는 타고난 성품인 듯하다. 

다섯 번째로는 공을 독차지하지 않았다. 명나라 장수 진린에게 자기가 쌓은 공을 서슴없이 나누어주어 상대방의 위신을 세워주었다. 

이순신 장군께서는 모든 역경을 감내하면서 오직 나라를 구하고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불운하게 왜적의 총탄에 맞아 쓰러지면서까지도 병사들의 사기와 왜적이 알게 되었을 때의 사정을 미리 짐작하여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 하신 말씀은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를 두고 후세인들이 말하기를 “죽은 이순신이 살아있는 왜적을 물리치셨다”라고 한다,

필자는 이순신 장군과 동순절자로 역사가 증명한 어모장군 전방삭 후예로서 모든 애국 충신들께 백배하고 영혼이 평안하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한다.

▲ 필자가 읽은 난중일기(2)

지금으로부터 420여 년 전의 조선 시대의 학문과 모든 문화를 한번 생각해 보자. 그중 글을 쓰기 위해서는 지, 필, 묵이 준비되어야 하고, 편지나 공문을 전달하는 수단은 사람이 직접 걸어가거나 말을 달려 전달하는 시기이다. 중요한 회의를 할 때도 인편으로 알려서 지정한 장소에 모이게 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이순신 장군은 너무나도 자랑스럽게 일기를 남기신 것이다. 성웅 이순신이 분명하다.
 
당시의 전쟁은 관군과 의병이 활약했던 상황이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이름이 나오지 않는 분은 주로 의병들이다. 그렇지만 의병 중에는 이순신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이순신의 군무를 도운 분들이 많이 있다. 그런데 그분들의 이름이 난중일기에 기록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그 공적을 인정하지 않고 무시해도 좋은가? 

7년 간의 전란을 통해 난중일기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수많은 의병과 승려 그리고 기생까지 나서 나라를 구했다. 어떤 사람은 간혹 조작된 거짓 정보로까지 의심하는 경우가 있어 이를 바로 잡고 싶다. 마음 같아서는 난중일기에 거명되지 않았지만 이순신과 함께한 공적이 있으신 분들을 전국적으로 조사해 보고 싶으나 능력의 부족으로 이룰 수 없어 너무나 안타깝다.  

▲ 필자가 읽은 난중일기(3)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는 국보 76호로 지정되었다. 국가적인 보물로 충분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감히 평을 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부족한 생각으로 접어 두시기 바란다.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전종실 주주통신원  jjs627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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