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양달섭 선생님 지키기와 전교조 참교육 지지 투쟁 2

6월 9일(금) 점심시간에 긴급히 소집된 임시 교직원회의 석상에서 학교당국은 양달섭 선생님에게 전격적으로 직위해제를 통보했다. 그 순간 많은 교사들이 놀랐고 전교조 구로고 분회 조합원 교사들은 공권력의 부당한 탄압에 항의하며 곧바로 비상총회를 소집했다.

비상총회는 6월 9일 오후 4시 30분에 25명의 전교조 교사와 비조합원 교사 약간 명이 참여한 상태에서 제1 교무실에서 열렸다. 일단 비상체제인 만큼 조직을 다음과 같이 개편했다.

  분회장 : 김승만(수학),  총무 : 하성환(국민윤리),  대변인, 서기 : 김주영(사회),     회계 : 문정옥(스페인어), 교육연구부장 : 이인곤(역사), 친교부장 : 윤석룡(수학),

  선전홍보부장 : 윤경태(지리)    

 비상총회에선 양달섭 선생님 직위해제를 포함해 전교조 탄압 전반에 대한 대응방안을 논의했다. 당시 전교조 구로고 분회는 집중포화의 대상이 되어 탄압이 가중되었다. ‘공립고 전국 최초 전교조 분회 결성’이라는 역사적 사건은 신문 기사나 방송 언론을 타면서 권력은 탄압의 모든 화력을 쏟아 부었다.

비상총회에서 철야농성 등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두고 투쟁 방식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다. 부득이 표결 처리 결과 철야농성 찬성 13명, 철야농성 반대 11명으로 나오자 즉각 철야농성에 돌입했다.

조합원 교육동지들은 역할을 분담하여 「서울시 교육감에게 보내는 공개질의서」, 「교장선생님에게 보내는 공개질의서」, 「양달섭 선생님 직위 해제 무효화를 위한 서명 운동」을 진행했다. 그리고 양달섭 선생님 직위해제가 철회될 때까지 뜻을 같이하는 의미에서 조합원 교사들은 검은 리본을 달기로 결정했다.

항의농성 과정에서 여러 시민단체와 운동단체로부터 지지와 격려 전화가 쇄도했다. 비상총회가 열린 6월 9일 당일엔 인헌고등학교와 전교조 중앙위에서 격려전화가 걸려 왔다. 농성 첫날인 6월 9일 밤 자정엔 전교조 교육국 소속 교사들 8명이 직접 구로고 농성장을 방문해 응원해 주었다.

방문 과정에서 학교당국이 출입을 봉쇄하는 바람에 농성에 참여한 15명 교사들과 학교측이 충돌하였다. 교장실에서는 그날 밤 12시가 넘도록 교장, 교감, 교무부, 윤리부, 3학년부, 과학부 주임교사들이 전교조 교사들의 철야 항의농성을 예의주시하면서 같이 밤을 지새웠다.

학생들도 불의에 저항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구로고 학생들은 6월 9일 양달섭 선생님 직위해제 통보 소식을 접하고 분노했다. 학생회에서는 6월 10일(토) 2교시 마치고 운동장에서 항의집회를 열기로 계획했다.

그러나 학교당국이 학생회장을 불러 회유하자 학생회장은 직접 2교시 수업 도중 방송으로 4교시 마치고 운동장에 모일 것을 전체 학생들에게 알렸다. 학교당국은 담임들을 모아 놓고 3교시까지만 수업을 하고 4교시엔 각 반별로 직위해제 철회를 촉구하는 서명용지를 돌려 서명을 하도록 하는 것으로 대신하라고 종용했다. 어디까지나 운동장 집회를 방해하려는 교활한 책동이자 꼼수였다.

학교장 자신이 교사 양달섭에 대해 징계를 해달라고 징계의결 요구서까지 교육청에 보낸 당사자임에도 보신을 위해서든 신념에 따른 것이든 배반된 행동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학생들 동요나 대중 집회가 시위양상으로 번지는 것을 막아보려는 술책이었다.

총학생회(학생회장 류호철, 고3)는 학교당국의 꼼수에 말려들지 않았다. 방송에서 안내한 대로 4교시 후 운동장에 학생들이 모이도록 호소했다. 6/10(토) 토요일 일과가 끝난 이후라 운동장엔 300명이 좀 넘는 학생들이 모였고 항의집회를 시작했다.

집회 후 학생회는 월요일(6/12)부터 학년 전체를 대상으로 직위해제 철회를 촉구하는 서명 활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했다. 그리고 총학생회는 이틀 후 6/12(월)에 비상대의원회의를 개최했다.

그 회의에서 6/14(수) HR 학급회의 시간을 화요일(6/13) 5교시에 진행할 수 있도록 학교당국에 수업시간 변경을 요구하여 관철시켰다. 학생투신이라는 비극적인 사건이 있으리라곤 아무도 예견하지 못했던 바로 6/13(화) 5교시로!

6/12과 6/13(화) 5교시에 전체 학년 2,000여명이 참여한 '양달섭 선생님 직위해제 무효화'를 촉구하는 서명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6교시 수업을 마치고 7교시가 시작될 즈음 2학년 동아리 대표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운동장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잠시 후 인문계 고등학교인 만큼 입시준비에 여념이 없는 고3 학생들까지 대거 동참했다. 그러면서 고1 학생들의 동참을 유도했다. 고2, 고3 선배들은 운동장과 학교 건물 전체를 무리지어 돌면서 ‘스승의 은혜는 하늘같아서’로 시작하는 스승의 노래와 교가를 부르며 동참을 유도했다.

방관하던 2, 3학년 학생들 일부와 1학년 학생들의 동참을 이끌어 내기 위해 운동장을 행진하면서 노래를 불렀다. 전교조 교사들은 숙직실에서 또는 교무실에서 그 광경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선생님을 지키기 위해 학생들이 전면에 나선 것이다. 

전교조 결성 초기인 1989년 5월과 6월엔 탄압이 극에 달해 '전교조 사수' 투쟁이 강도 높게 진행되었다. 20-30대 교사들의 헌신! 특히 20대 젊은 교사들의 눈물겨운 희생과 열정은 가히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잠을 줄여가면서 며칠씩 수면부족에 시달리면서도 집회 참여, 선전 홍보, 서명운동, 항의농성, 심지어 단식 농성을 전개하면서 수업은 수업대로 다했기 때문이었다.

전교조 사수 투쟁은 6월과 7월 서울을 비롯해 전국 중고교 각급학교 학생들 사이에서 ‘전교조 선생님 지키기 투쟁’으로 표출되었다. 1989년 7/22일까지 전국적으로 200개가 넘는 학교에서 연인원 20만 명이 넘는 학생들이 시위와 농성에 참여하였다.

학생들의 전교조 사수(선생님 지키기) 투쟁도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되었다. 구로고등학교처럼 ‘직위해제 철회 서명 운동’도 있었고 ‘선생님을 사랑해요! ’(서울 신목고), ‘선생님을 때리지 마세요!’라는 구호나 플래카드가 등장했다.

▲ 1989년 8/22일 전교조 교사들에 대한 부당징계 철회를 촉구하며 신목고 학생들 400여 명이 수업을 거부한 채, 운동장에서 항의농성을 벌이자 교실에 남아 있던 학생들이 교실 창문 바깥으로 <선생님, 사랑해요> 펼침막을 내걸며 농성을 지지하는 모습.(출처 : 한겨레 자료사진)

전교조 교사 징계에 항의하는 학생들은 도시락을 교실 한 쪽에 모아놓고 점심 단식 투쟁을 전개한 학교도 있었다.(경남 마산여상, 충남 금산여고, 경기도 평택여중) 그런가하면 집단 자퇴원을 제출하거나(광주 동아여중・고) 밤샘공부로 항의하는 학교도 있었다.(서울 구로고, 충남 천안중앙고, 대전 명석고, 광주 동아여중・고). 서울 고척고에선 종이비행기를 날리는가 하면 서울 성심여고에선 학생들이 참교육 뱃지를 가슴에 부착하는 방식으로 선생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했다.

학생회장단이 삭발하거나(부산 동인고, 전북 우석여고) 신규채용교사 수업을 거부하는 학생들도 있었다.(광주 동아여고, 경북 안동 중앙고, 전남 목포 홍일고) 구로고처럼 조기방학을 거부하며 항의한 학교도 있었고(서울 성동고, 광주 사례지오고, 대구 덕원고, 전주 영생고, 전남 구례농고, 해남여고) 학생비상총회와 성명서를 발표한 학교도 있었다.(서울 구로고, 강원 춘천여고, 강주 숭신공고).

극단적으로 징계를 저지하기 위해 학생들이 혈서를 쓰기도 했고(광주 금호고, 중앙여고, 송원고, 대구 학산고) 심지어 '선생님 한 분 징계할 때마다 학생 한 명씩 투신하겠다'고 결의한 학교도 있었다.(광주 서석고) 구로고등학교에선 실제로 고3 학생 두 명이 투신하는 참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전교조 선생님들을 지키기 위한 학생들의 분노와 투쟁은 선생님에 대한 사랑이자 참교육을 받고 싶은 뜨거운 열망이었다.

실제로 향후 고등학생들의 투쟁은 '참교육 요구 투쟁'으로 발전해 나갔다. 우리는 참교육을 받고 싶다는 학생들의 외침은 학생들의 학습권 요구 차원에서 전개된 것으로 고등학생 운동이 좀 더 목적의식적인 차원으로 고양되어 갔다.

고등학생 운동이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면서 6/14일 나주지역 고등학생연합(약칭 나고협)의 성명서가 나온 것을 시작으로 7/24일 서울지역 고등학생 대표자 협의회(약칭 서고협), 7/29일 '광주지역 고등학생 대표자 협의회'(광고협), 부산에서 부고협(8/3)이 조직되었다. 9/30일엔 마산, 창원 지역 9개교 고등학생들 200여 명이 경남대에서 마창고협을 결성했다.

서울과 광주, 나주, 부산, 마산, 창원지역, 인천지역 고등학생들의 전교조 지지와 참교육을 촉구하는 조직적인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가장 조직력이 탄탄했던 지역은 광고협이었다.

광고협은 광주민주화운동의 영향 때문인지 당시 광주시내 17개 학교 고교생 5,000여 명을 동원할 수 있는 대중조직력을 지니고 있었다. 서울고등학생연합인 서고협을 비롯해 나머지 부고협, 나고협, 마창고협, 인천지역은 선진적인 학생들 상부조직일 뿐 학생대중과의 결합력은 미약했다.

직위해제 철회를 촉구하는 양달섭 선생님의 항의농성이 직위해제 당일인 6/9일 바로 시작되자 전교조 구로고 소속 교사들도 항의 농성에 돌입했다. 그런데 농성 4일째까지 성명서 한 장을 내질 못했다. 그러자 취재 차 들른 한겨레신문 박찬수 기자가 교무실에 찾아와서 왜 성명서가 없냐고 의아해했다.

▲ 한겨레 신문 박찬수 기자가 취재 차 학교에 들른 뒤에 왜 성명서가 없냐는 말을 듣고 급히 작성한 89년 6/12일자 성명서 <농성 4일째를 맞으며> (출처 : 하성환)

우린 그때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서울시 교육감과 학교장에 대한 공개질의서나 서명운동은 전개했지만 정작 대외 언론이나 외부 상황을 소홀히 하였다. 그리하여 아래 <우리의 요구>와 <앞으로의 투쟁 방향>까지 정리하여 바로 성명서를 작성해 전교조 구로고 분회 이름으로 교무실 칠판에 부착했다.

농성 4일째를 맞는 6/12일 성명서 내용은 "그동안 이성과 자제력을 잃지 않으면서 가장 온건한 방법으로 농성에 임해왔지만 당국은 최소한의 요구인 직위해제 무효화와 전교조 구로고 분회 탄압 중지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며 당국을 통렬히 비판했다.

그러면서 "오히려 당국은 간교한 술책으로 탄압의 부당함을 정당화하려 하고 있다며 공안당국-문교부-서울시 교위-학교현장으로 이어지는 무자비한 폭력 구조를 직시하며 더 높은 투쟁을 향해 나아갈 것이고...(중략)... 그날까지 점점 더 강도를 높여가며 가열 차게 싸워나갈 것"을 천명했다.

<우리의 요구>

- 양달섭 교사의 직위해제를 즉각 무효화하라

- 전교조 구로고 분회 탄압을 즉각 중단하라

- 학생, 학부모 사이의 분열 책동을 즉각 중단하라

- 양달섭 교사에 대한 직위해제 요구자는 즉각 사죄하라

<앞으로의 투쟁 방향>

- 12일부터 참여교사수를 대폭 늘려 무기한 농성을 전개할 것이다

- 12일부터 학생, 학부모, 동문 졸업생, 타학교 교사들에게 투쟁의 정당성을 홍보하고 서명운동도 확산시켜 나갈 것이다.

- 14일을 전후해서 직위해제 무효화 쟁취 및 전교조 탄압음모 분쇄를 위한 연합집회를 개최할 것이다

그러자 양달섭 선생님 또한 강도 높게 투쟁에 나섰다. 이튿날 6/13부터 무기한 단식 농성을 시작했다.

학생들 또한 6/12일 비상대의원회의에 이어 6/13일 5교시 직위해제 철회 서명운동을 1, 2, 3학년 전체 학생들을 대상으로 전개했고 7교시엔 운동장 항의집회에 순식간에 1,000명이 넘게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당황한 학생회장 류호철 군은 학생대중의 들끓는 분노를 학생회 자신들이 통제하여 집회를 끝낸 뒤 상황을 정리하여 해산시키겠다고 학교장에게 얘기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을 통제하기 위해 학생회장은 간절한 마음으로 수차례 마이크를 요구했다.

그러나 학교장은 학생회장의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심지어 학생회장은 마이크를 주지 않을 경우 투신하겠다고 하면서 재차 마이크를 달라고 요청했다. 학생대중의 분노를 통제해야 하는 학생회장으로서 절박한 모습이었다. 학생회장의 투신 이야기가 나오자 전교조 교사가 크게 놀라면서 적극 만류했다.

학생회 간부 서윤석 군(총무부장)은 자신들이 학생들을 통제해야 한다며 학교장에게 무릎을 꿇으면서 애원하듯이 마이크를 요구했다. 그러나 학교장은 거듭되는 마이크 요구를 거절했다. 학교장의 마이크 거절은 결국 학생들 분노에 기름을 끼얹는 결과를 낳았다.

학생대중들은 분노했고 통제가 불가능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결국 학생회장과 총무부장은 마이크를 거절당한 채 학생대중의 분노를 통제할 수 없었고 1시간 30분 뒤 3층에서 투신함으로써 학교당국의 처사에 항의하였다.

투신 사건을 다시 정리하면 6/13일 7교시 항의집회는 학생회에서 기획하고 주관한 집회가 아니었다. '양달섭 선생님 직위해제' 사건이 터진 이후 학생들은 이미 충분히 분노하고 있었다. 구로고 학생회 역시 그 사실을 알고 학교당국에 적극적으로 항의하였으나 학교당국의 방해로 문제해결의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그러자 외부에서 고등학생 운동을 하던 공개, 비공개 동아리 학생(2학년)들이 중심이 돼 학생회 투쟁의 미진함을 질타하며 학생회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유인물을 몇 차례 교내에 뿌렸다. '학생회장이 비굴하고 무책임하다'는 유인물이 두 차례나 교내에 배포되었다.

심지어 '학생회가 제대로 투쟁하지 않는다'며 총학무용론이나 학생회장의 사퇴를 촉구하는 내용의 유인물도 배포되었다. 6/13일 학생집회는 학생대중의 타오르는 분노가 6/13일 5교시 학생회가 주관한 서명운동 직후 7교시 2학년 문예반과 풍물반 학생들이 중심이 돼 학생대중의 자발적 시위로 분출한 것이었다. 특히 학생회장 류호철 군(3학년)이 풍물반 출신이라는 점에서 류호철 군이 받았을 충격 또한 적지 않았다.

이에 구로고 학생회는 당황했고 이들 학생대중의 항의집회를 학생회의 통제 아래 두고자 했다. 그러나 학교당국은 그런 학생회의 마이크 요구를 여러 차례 거절한 것이다. 그게 화근이었다. 학생회장과 총무부장의 투신 사건의 본질은 그러했다.

결국 학교장의 처사에 분개한 류호철 군(학생회장)과 서윤석 군(총무부장)이 3층에서 항의 투신하는 비극적인 상황으로 치달았다. 투신 당시 류호철 군과 서윤석 군은 서로 껴안고 화단으로 몸을 던졌다. 불행 중 다행으로 나뭇가지에 조금 부딪치면서 추락했다.

땅바닥에 추락 당시 위쪽에 있던 서윤석 군(총무부장)은 크게 다치질 않았다. 그러나 아래쪽에서 충격을 심하게 받았던 류호철 군(학생회장)은 경추를 손상당하면서 크나큰 중상을 입었다.

투신사건 이후 6/13일 당일 오후 늦게 신원을 밝히지 않은 학부모 20여 명이 학교당국과 몰래 협의한 뒤 교무실로 난입했다.

그들은 항의농성 중인 교사들을 향해 "불에 태워 죽여도 시원찮을 놈들!", "12명은 다 감옥에 쳐 넣어야 할 놈들!", "전부 젊은 놈들이야! 운동권 출신이야!", "지 놈들이 6・25를 겪어봤어? 아무것도 모르는 젊은 놈들이!" 라고 폭언과 심한 욕설을 퍼부으며 전교조 교사들을 향해 '이놈, 저놈' 하면서 삿대질을 일삼았다.

그러면서 교무실 칠판에 게시된 성명서와 벽보를 죄다 찢어버렸다. 심지어 양달섭 선생님 직위해제 철회를 촉구하는 교사 서명지(67명이 서명)조차 북북 찢어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들 학부모들은 6/13일에 이어 14일, 15일, 16일 계속해서 학교를 찾아와 전교조 교사들을 향해 폭언을 퍼붓고 난동을 피웠다. 매일 매일이 살얼음판을 걷는 극도로 긴장된 상황의 연속이었다.

학교당국은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놀라 6/14부터 무기한 휴교조치를 단행하려 했다. 그러자 전교조 교사들은 교육권과 학생의 학습권 침해라며 강력히 반대했다. 학생들 또한 학교 당국의 일방적인 휴교조치 소식을 듣고 교내에서 500명이 넘는 학생들이 이에 항의하는 규탄시위를 1시간 동안 전개했다.

결국 학교당국은 휴교조치를 철회했고 학생들은 철회 소식을 듣고서 자진 해산했다. 전교조 구로고 분회에서는 6/13일 비상회의를 소집해 학생들을 진정시키기 위한 방법을 논의했다. 전교조 교사 2명은 놀란 학부모들과 대화를 시도했고 이후 다수 학부모들이 이해하고 귀가하였다.

학생 투신 이튿날인 6/14일에 전교조 구로고 분회는 성명서를 발표하여 "책임이 누구에게 있든 작금의 사태는 유감스럽고 심히 불행한 일이라며...(중략)...교육자로서 죄스럽고 가슴이 아프다"고 고백했다.

▲ 학생 투신 이튿날 전교조 구로고 분회에서 낸 6/14일자 성명서 <이번 사태에 대한 우리의 입장 - 무조건 농성을 해제하며>(출처 : 하성환)

그러면서 "금번 투신 사태의 본질적인 원인으로 전교조에 대한 반민주 교육세력의 부당한 탄압과 학생들의 최소한의 의사표현을 위기감으로 여기고 불온하게밖에 보지 못하는 학교 측의 무책임한 대응에 1차적인 원인이 있음"을 분명히 했다.

나아가 "일방적으로 휴업조치를 내리고 학생들의 최소한의 의사표현과 집단행동을 무책임하게 방기하거나 바르게 지도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죄 없는 교사들을 경찰서에 고발조치하여 강제 연행하게 하여 학생들을 흥분시키고 양달섭 선생님에 대해 계속된 탄압을 자행한다면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임을 또한 천명했다.

또한 6/14일자 성명서는 "결과적으로 학생들이 심대한 교육적 피해를 입고 있는 현실에 깊이 있게 책임을 통감하면서 6/14일부로 조건 없이 단식, 철야 농성을 해제하기로 결의하였다.

아무리 전교조 활동이 정당성을 갖고...(중략)... 교육을 개혁할 수 있는 유일한 단체라 할지라도 무엇보다 전교조는 학생들을 위해서만 존재해야 한다는 판단 아래 이번 사태를 무거운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학교를 정상화하고 학생들을 진정시키는 데 최선의 노력과 함께...(중략),,,학생들의 과격한 집단행동을 극력 자제할 것을 간곡히 호소하기로 결의하였다."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hsh70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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