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음이 죽은 지 얼마나 되었을까

어느 날
마음이 먼저 죽는 날이 올 거다

어떤 어깨
오른쪽으로 가방을 메는 사람에게는
왼손을 비워두어야 했던 이유가 있었을 거다

풍경에 길들여진 얼굴은
지하철에서도 자꾸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본다

물건을 오래 쓰고 고쳐 쓰다보면
흔적을 사용하는 방법을 알게 된다

처음 빙판을 걸었을 때
보폭을 망가뜨리는 일이 즐거웠다
둘 다 서투니까
손을 놓을 수 없으니까
자꾸 같이 넘어지면
먼저 일어나서 일으켜주고 싶어지니까

내가 아는 속기사는
형편없는 기억력을 가졌는데
병실에 누워 의식이 부서질 때도
옆 침대에서 들리는 유언을 받아 적었다
그 병실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어떤 첼로
마찰을 지속하지 않은 현은
아무도 건들지 않는 거실 구석에서
음과 음의 기억을 떠돌다가
한 번도 내보지 못한 고음을 내며
펑, 끊어지기도 한다

믿음도 연습이야
그 단 한마디에 구원을 버린 적이 있다

그러니까 어느 날
무언가 먼저 죽는 날이 올 거다
그래도 우리는 살아 있어서 유능할 것이다

몸의 착각으로 만들어진 마음이 있는 것처럼
오늘도 오후 네시가 지나간다

- 최현우, ‘오후 네시’ -

 

언제부터인가 시를 읽어보고 나서는 받아쓰기 하듯 따라 써보고 그리고 다시 읽는다. 쓰는 동안의 느린 호흡이 시인이 선택하고 익혀냈던 단어들과 문장들을 다시 보게 만든다. 그냥 훅 지나치던 풍경들, 잠시 멈춰 서서 바라보면 보지 못했던 것들이 풍성히 드러나던 것처럼, 읽은 다음 써내려가다 보면 깊고 담담한 마음을, 익숙하지만 보지 못했던 풍경들처럼 만나보게 된다.

 

언젠가 ‘예정’된 죽음을 앞두고, 우리는 모두 아무도 없는 거실 구석에서 기억으로 떠돈다. 누군가의 시선을 느끼고 ‘펑’하고 소리를 내려는 순간, ‘펑’하고 끊어져버리는 의식들. 의식에 대한 위험을 잊을 수 없어 하면서 우리는 매일매일 오후 네 시를 지나치고, 잊으며 잠들고, 다시 깨어나 예정된 죽음을 마주한다. 시인은 살아 있어서 유능한 거라고 자조하듯 위로하지만, 살아 있다는 건 어렵지 않다. 마음을 세우고 살아 있다는 게 어려울 뿐이다.

회사는 단축조업을 결정했다. 정부의 보조로 나흘만 일하고 사흘을 쉬며 시월까지 생명을 연장했다. 시월이 지나면 낡은 기계의 매연과 소음에 시달리는 노동이 계속되거나, 써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을 가지고 반백의 머리를 들이밀어야 할 것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어렵지 않고, 오후 네 시는 여전히 내 시간을 통과할 것이다. 그것이 착각이 아니라고 느낄 때 나는 비로소 살아 있는 것이 될 것이다.

빈 병상을 떠돌 유언 따위는 남기고 싶지 않다. 누군가 말했다.

“파블로프의 조건반사는 종을 치는 기억을 저장한 뉴런들과 먹이 먹는 기억을 저장한 뉴런들이 강하게 연결된 것 뿐이다. 이게 전부이다.” *

*김상욱의 과학공부, 김상욱, 동아시아, p67

 

편집 : 박효삼 객원편집위원

김해인 주주통신원  logca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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