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안면 출신, 故 신동희 선생 독립유공자 포상

제101주년 3·1절 계기 독립유공자 포상

 

지난 달 국가보훈처는 제101주년 3․1절을 맞아 1924년 9월 15일 ‘소안노동대성회’ 사건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故 신동희 선생을 포함한 106명을 독립유공자로 포상하였다.

▲ 표창장

신동희(申洞熙, 1902~1986) 선생은 1902년 완도군 소안면 미라리 출신으로 부친 신두정, 모친 김여섭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후에 사립 중화학원을 졸업하고 사립 소안학교 교사를 지냈다.

1920년 3.15운동 이후 소안도내 청년을 규합하여 항일운동단체를 만들고자 4월에 송내호와 정남국이 주도하여 100여 명의 규모로 ‘소안 배달청년회’를 조직했다. 3년 후 청년회를 쇄신해 ‘소안 노동연합대성회’로 개편됐다. 이후 1924년 9월15일 대성회 제2회 총회가 있었는데, 회의 중에 일본 순사가 회의장에 들어오자 회원들은 순사를 회의장에서 쫓아낸다. 이 사건으로 일본 경찰은 대성회 간부 12명을 구금하게 됐고, 재판 끝에 신동희 선생은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당시 이 사건은 동아일보에서 ‘세상의 이목을 놀라게 하다’라는 제하의 기사로 전국에 알려지게 됐다.

소안도는 일제 강점기에 불령선인(不逞鮮人 : 일제 강점기에, 일제가 '불온하고 불량한 조선 사람'이라고 부른 명칭)으로 불렸던 애국지사가 800여명에 달했다. 또 독립운동가 89명 중에 건국훈장 서훈자가 20명이었으나, 이번 신동희 선생의 추서로 21명이 됐다.

한편 이번에 포상되는 독립유공자는 건국훈장 23명(애국장 9, 애족장 14), 건국포장 14명, 대통령표창 69명으로, 포상자 중 생존 애국지사는 없으며, 여성은 5명이다.

 

이로써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은 분은 1949년 포상이 시작된 이래 건국훈장 11,068명, 건국포장 1,331명, 대통령표창 3,532명 등 총 15,931명(여성 477명)에 이른다.

이렇듯 작은 섬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었을까?

어느 지역보다 신교육을 빨리 받아들인 점도 있었지만, 함경도 북청에서 항일운동을 하다가 일본 순사에게 쫓기어 피한 지사들이 피난처로 삼은 곳이 소안도였다. 그들이 자녀들을 교육을 시키고 조국을 지켜야 한다는 점을 스스로 느끼게 한 점이 그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할수 있지 않을까?

마광남 주주통신원  wd341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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