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종환 詩, '꽃 피는가 싶더니 꽃이 지고 있습니다'

- 짧은 화려함을 지나, 삶과 사랑은 이어집니다. 김해인 주주통신원l승인2020.04.11l수정2020.04.11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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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었던 꽃이 어느새 지고 있습니다
하게 하늘을 수놓았던 꽃들이
지난 밤 비에 소리없이 떨어져
하얗게 땅을 덮었습니다
꽃그늘에 붐비던 사람들은 흔적조차 없습니다
화사한 꽃잎 옆에 몰려오던 사람들은
제각기 화사한 기억 속에 묻혀 돌아가고
아름답던 꽃잎 비에 진 뒤 강가엔
마음 없이 부는 바람만 차갑습니다
아름답던 시절은 짧고
살아가야 할 날들만 길고 멉니다
꽃 한 송이 사랑하려거든 그대여
생성과 소멸 존재와 부재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아름다움만 사랑하지 말고 아름다움 지고 난 뒤의
정적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올해도 꽃 피는가 싶더니 꽃이 지고 있습니다

- 도종환, '꽃 피는가 싶더니 꽃이 지고 있습니다'

▲ 떨어진 꽃잎들은 서로 어울려 반짝입니다.

꽃놀이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화사한 빛깔의 향연 속에 자리 잡고 앉아 술 마시고 고기 굽고 노래 부르는 행위들이 작은 신성모독 같았으니까요. 있는 그대로 두지도 바라보지 않은 채 그 찬연한 색깔들 사이에 억지로 몸을 들이밀어 한 자리를 차지하려 할까요. 꽃놀이를 종종 미워했습니다.

지천명을 넘기고 나서야 알아갑니다.

때 맞춰 피워내는 순간의 생명력, 흐르다 못해 주변을 흠뻑 적시는 그 생명력이 부러워서 꽃을 사랑하는 것이라 알았습니다. 피지 않은 가지들을 골라 꺾어서 거실 한 구석에 두는 이유가 저 찬란한 생명력에 있을 거라 확신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하나, 이룰 수 없는 것에 대한 갈망의 끝이 아름다울 수 있을까요?

갈구함이 깊어지면 끝내 알겠지요.

꽃 한 송이 사랑하려면 생성과 소멸, 존재와 부재, 그리고 떠나간 뒤의 정적까지 사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누구나 생성과 존재 있는 것을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사랑이 익어, 꽃피우고 나면 소멸과 부재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정적까지 사랑의 대상이 됩니다. 아름답던 시절은 짧고 살아가야 할 날들만 길고 멀다는 시인의 말에 쓴 웃음이 납니다. 사랑할 수 있는 날들 또한 짧기만 합니다.

떨어진 꽃잎들이 가도(街道)위를 굴러다닙니다.

차창 밖으로 '안녕'하고 마음속 인사를 보냅니다. 아마도 곧 나는 더 이상 인사를 보내지 않을 참입니다. 찰나의 생명력에 대한 경외감, 짧은 내 삶에 대한 상련(相憐)의 인사가 무색해질 순간이 곧 올 테니까요. 그래도 이 꽃들과 나, 그리고 당신은 오래도록 순간에 남아, 이어지는 세상이 끊이지 않도록 한 점(點)을 뒷받침하였노라고 내년, 다시 피는 꽃들이 소곤거릴 것입니다.

편집 : 박효삼 객원편집위원

김해인 주주통신원  logca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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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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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미경 2020-04-22 08:31:22

    선생님의 시평이 또 하나의 시가 되는군요. 잔잔하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선생님의 시평을 자주 보고 싶습니다. 고맙습니다.신고 | 삭제

    • 김동호 2020-04-15 10:00:39

      새로운 한 주가 기대됩니다. 바쁘고 급할수록 쉬어가고 돌아가는 지혜.

      그래서 시가 있는 주말을 맞이합니다. 정제된 도종환 시인의 시와 김해인 통신원의 생성과 존재의 의미를 생각합니다.신고 |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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