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52대 효공왕의 무덤에 들르다

- 잠시의 만남을 공간을 떠도는 기록으로 기억하다 김해인 주주통신원l승인2020.04.19l수정2020.04.19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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初憲康王觀獵, 行道傍見一女子姿質佳麗

'처음으로 헌강왕이 사냥을 구경하다 길 옆의 아름다운 여인을 보았다.'

삼국사기 권11 진성왕편은 이렇게 전한다. 만약, 직접 사냥에 나섰다면 길가에 선 여인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효공왕의 아버지, 헌강왕은 어릴 때부터 영특하여 한 번 본 것을 잊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무력(武)이 아닌 제도(法)으로 편안하게 했다는 그의 시호는 재위기간 내내 무너져가는 신라를 변혁하려 한 그의 노력을 증거한다.

신라의 통치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사방에서 지방의 군웅들이 발흥하던 시대 그는 머리를 식히러 사냥 구경을 나왔을 것이다. 이른바 신라 진골의 마지막 왕, 딸만 둘이던 그에게는 대를 이을 아들이 없었다. 여인은 아들인 효공왕 요(嶢)를 낳았지만 삼국사기는 그를 적통(嫡統)없는 서자라 기록한다. 헌강왕을 이어 왕위에 오른 것은 누이동생인 만헌(曼憲)이었다.

'孤之兄弟姉妹骨法異於人,此兒背上兩骨隆起 眞憲康王之子也'

짐의 형제자매의 골격은 다른 사람들과 다른데, 이 아이의 등에는 양쪽으로 뼈가 솟아 있으니 진정 헌강왕의 아들이다.

진성왕은 스무 살 즈음에 즉위했다. 무너져가지만 아직 남아있는 철저한 골품사회, 여인의 몸으로 보위에 올랐으니 정통성은 수면 아래 잠재한 위험이다. 왕은 흠결을 내치려 향가집을 편찬하는 등 문화를 부흥하고 위홍을 각간으로 중용하여 국정을 개혁하려 했다.

하나 연인이자 삼촌인 위홍의 죽음은 모든 것을 무위로 돌렸다. 개혁은 무너져 재정은 텅 비고 곳곳에서 민란과 도적이 발흥한다. 병약하여 국정을 제대로 돌보기 힘들었던 그녀는 요(嶢)를 불러 양위한다. 이 때 요(嶢)의 나이는 열네 살에 불과하였다. 또한 그 해 진성왕은 영면에 드는데 그녀의 나이 서른 남짓이었다.

王聞疆埸日削甚患然力不能禦,命諸城主愼勿出戰堅壁固守

'왕이 국경이 날로 줄어든다 듣고 심히 근심하였으나 지켜낼 힘이 없으므로 모든 성주에게 명하길 출전에 신중하며 성벽을 굳게 지키라 하였다.'

이 때 궁예가 철원으로 도읍하고 국호를 마진이라고 칭했다. 한때 신라의 영토였지만 지금은 견훤의 세력권에 든 나주에서 궁예와 견훤이 치열한 전투를 치른 기록이 삼국사기의 곳곳에 보인다. 눈앞의 고단한 현실, 홀로 감당할 수 없는 짐 앞에 선 인간에게는 환락이 손짓하는 법이다. 승자의 기록은 그 약점을 파고 들어 더 매섭게 붓을 휘두른다.

신하 중에 은영(殷影)이라는 이가 있어 왕에게 충간하였지만 듣지 않자 칼을 휘둘러 애첩을 죽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은영에 대한 이야기는 더 이어지지 않았고 ‘은나라의 그림자’라는 묘한 이름에서 생겨나는 궁금증이 있으나 이어지지 않는다. 그 해 궁예는 국호를 태봉으로 고쳤고, 다음 해 왕은 붕어하여 사자산 북쪽에 묻혔다.

▲ 뼈는 화장하여 사자산에 뿌렸다고도 한다.

新家孟城口 古木餘衰柳 來子復爲誰 空悲昔人有

'새로 맹성 어귀에 집을 마련하니, 고목 사이 쇠한 버드나무가 남았도다. 이후에 다시 올 사람은 누가 될는지, 오래전 여기 있었던 사람들을 부질없이 슬퍼하네.'

천여 년 뒤, 사내 하나가 그의 무덤이라 믿어지는 봉분에 우연히 들렀다. 자연석으로나마 치장했던 둘레돌(護石) 몇 개 남지 않고, 단정하지 못한 한글로 쓰인 안내 비문에 사내는 눈을 떼지 못하고 사진 몇 장을 찍었다. 왕은 서른 몇 해를 힘껏 살았고, 천여 년을 아무도 모르게 묻혀 지냈다. 사내는 쉰 몇 해를 힘껏 살았으며, 앞으로도 조금의 시간은 더 살아 움직일 것이고, 그러고 나면 영원히 아무도 모르게 될 것이다.

▲ 둘레석은 12지신상에서 정점을 찍었다.

아마도 이 공간을 떠도는 글, 사진 몇 장만이 천 년전의 왕과 절뚝거리는 사내의 만남을 잠시나마 기억하게 해 줄 것이다.

原文出典(순서대로)

三國史記第十二卷新羅本紀第十一眞聖王篇
三國史記第十二卷新羅本紀第十一眞聖王篇
三國史記第十二卷新羅本紀第十二孝恭王篇
王維, ‘孟城坳’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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