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산우회 산행 날이다.

태풍이 한바탕 소란을 피우고 간 뒤라 그런지 하늘이 높고 푸르다. 산행하기 딱 좋은 날이다. 말이 산행이지 겨우 둘레길 걷고 점심 먹고 돌아오는 게 고작이다. 몇 년 전만 해도 2,30명 나오던 친구들이 80살이 넘으니 작년부터 확 줄어들어 많이 나와야 고작 15명 안팎이다.

▲ 안산에서

오늘도 서대문 옛 형무소 뒤 안산자락 둘레길을 돌고 대성집에서 도가니탕으로 점심을 하기로 했다.

오전 9시, 한옥마을 앞에서 81-1번 버스를 타고 걸포공원 후문에서 내려 다시 일산행 33번 버스로 갈아탔다. 걸포공원에서 버스를 타고 다릴 건너면 바로 일산 킨텍스다. 킨택스를 지나 대화역에서 내렸다. 불과 15분밖에 안 걸렸다. 일산대교가 놓이기 전엔 김포에서 일산을 가려면 행주대교를 이용하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렸는데...

대화역에서 3호선 전철로 다시 갈아탔다. 대화역은 종점이어서 타고도 바로 가는 게 아니라 출발 시간이 돼야 간다. 오전 9시30분. 출발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차가 움직였다. 죽엽 - 장발산 - 백석. 차가 백석역에 멈췄을 때, 한 중년 노인이 올라탔다. 지팡이를 짚고 다리를 절면서... 어디 앉을 곳이 없나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했다.

그때 경노석에 앉아 있던 한 부인이 자리를 양보하면서 "이리로 앉으세요!" 했다. 지팡이를 쥔 중년 노인은 "괜찮습니다. 몇 정거장 가면 내리니까요."하며 사양했다. 허나 부인의 끈질긴 권유에 "고맙습니다"하며 마지못해 앉았다.

'권유'하고 '사양'하는 모습이 옆에서 보기에 좋았다. 몇 정거장 안가서 중년 노인이 "난 다음 역에서 내릴 터니 여기 앉으세요."하며 자리를 그녀에게 다시 되돌려줬다.

그리고 그 노인은 "내 다리를 자동차가 가져갔어요."하면서 부인을 향해 "즐거운 하루되세요! 고마웠어요!" 하는 게 아니겠는가!?

요즘 지하철을 타고 다니다 보면 별에 별 광경을 다 본다. 나이 많으면 으레 앉는 것으로 알고 젊은 임산부가 경로석에 앉아 있어도 "젊은 것들이..."하면서 임산부를 일으켜 세우고 앉는가 하면 또 좀 나이 적은 사람이 양보하면 으레 앉는 것인 양 "고맙습니다." 하는 인사도 한마디 없이 앉는 무례한 늙은이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노인은 목적지 한 정거장 전에 일어나 자리를 되돌려주면서 "즐거운 하루되세요."하고 인사까지 하니... 자리를 양보한 부인의 마음씨도 곱지만 중년 노인의 마음씨 또한 아름답다.

"자동차가 내 다리 가져갔어요."하는 것으로 보아 그 노인은 교통사고로 다리를 잃고 의족을 한 게 분명하다.

요즘 TV에 '소확행'이란 말이 자주 나온다. '작지만 확고한 행복'이란 뜻이다. 원래 이 '소확행'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집 <랑겔한스섬의 오후>(1986)에 나오는 말로서, 흥미롭게도 그것은 빤쓰(팬티)에 대한 이야기다.

작가는 빤쓰를 수집하는 취미가 있어서 서랍장에는 상당한 양의 팬티가 있는데, 서랍에 돌돌 잘 말은 깨끗한 팬티가 쌓여 있는 것을 보고 있자면 '작지만 확고한 행복'을 느낀다고 했다.

그렇다. 행복은 아주 높고 먼 곳에 있는 게 아니다. 무라카미처럼 팬티 수집에서도 느낄 수 있다. 바로 오늘 전철 안에서 있었던 부인과 장애자 노인의 행동 속에서 행복을 볼 수 있었다. 바로 이게 '소확행'이 아니겠는가!?

목적지 독립문역에서 내릴 때 까지 자꾸 부인과 장애인 노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내 다리를 차가 가졌어요","행복한 하루 되세요"

정말 행복한 하루였다.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정우열 주주통신원  jwy-hans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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