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을 눈앞에 두고

28일에는 단둥으로 가서 한국전쟁으로 끊긴 조중우의교를 거닐었고 북한과 중국을 오가는 트럭과 버스를 보면서 같은 민족끼리는 이렇게 차단당하고 있는데 중국과는 많은 교류를 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였다. 고구려성인 박작산성에 가서 중국이 이곳을 만리장성의 종점이라고 주장하는 허황된 역사왜곡을 실감하고 동북공정의 의도와 목적을 이해하게 되었다.

▲ 박작성에서 만주평야를 배경으로 점프샷하는 필자

29일에는 5시간 30분 정도의 길을 달려 지안(집안)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휴게소가 없어서 남학생과 여학생을 분리하여 용변을 보게 하였다. 그래도 남학생들과 남교사들은 산수를 보면서 용변을 보는데 여교사와 여학생은 담요를 준비해서 서로 가려주는 공동체의식을 발휘하였다. 가는 길에 개인적으로 정말 힘들었던 것은 3대의 차량에 분승하여 이동하였는데 역사교사가 나 한 명이라서 쉴 때마다 차량을 바꿔 타면서 고구려 유적에 대한 사전설명을 해야 만 했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중국이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광개토대왕릉비 앞에서 설명도 못하게 하기 때문이었다. 심지어는 드론으로 촬영한 교사는 칩을 빼앗기기도 할 정도였다. 나는 혼자서 이 많은 일을 감당해야 한다는 생각에 처음에 선발을 담당한 사람들에 대한 불만이 끓어올랐다. 하지만 어쩌랴. 이미 엎질러진 물인 것을...

30일에 환도산성 등 고구려 유적을 갈 때는 버스 안에서 계속 잠을 자면서 탈진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힘든 여정이 될 줄 알고 나름 체력관리를 해 왔기 때문에 버텼다고 생각한다.

31일에는 백두산에 올랐다. 서파를 통해 1,440계단을 올라가느라 학생들이 힘겨워 했지만 막상 천지를 보면서 모든 수고로움이 다 잊히는 희열을 느꼈다. 나는 4번째 올랐지만 모두 천지를 보는 행운을 누렸다. 봐도 봐도 좋은 곳이 대자연의 웅대한 경관이 아니던가! 못 본 사람이 천지라서 천지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우스게 소리도 있고, 중국의 지도자 장쩌민이 세 번이나 왔는데 못 봐서 욕하고 갔다는 말도 전해지지만...

▲ 백두산 천지를 배경으로

마침 내가 담당하는 학급 학생이 이날 생일이어서 그 학생을 가운데 세우고 우리 반 7명의 학생들이 스크럼을 짜고 빙빙 돌면서 축하노래를 불러주어 풋풋하고 싱그러운 청춘들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8월 1일에는 용정으로 가서 일송정에서 시내를 조망하면서 선구자 노래의 작사 작곡자의 친일 행각에 대해서도 이야기 하였고, 윤동주 생가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윤동주의 생가를 갔으니 그의 대표작인 서시 등을 낭송하면서 시흥에 깊이 젖어 들었다.

2일에는 북한·중국·러시아의 경계로 갈라져 있지만,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쉼 없이 달려와 동해와 만나는 지점인 방천을 기행하였다. 동북아 경제 협력에 관해 이야기하고 녹둔도를 보면서 이순신 장군이 여진족에 대비하기 위해서 진을 쳤던 역사와도 만날 수 있었다.

3일에는 중국 훈춘에서 러시아 연해주로 넘어갔다. 국경을 넘는 것이 이토록 지난한 일인 줄 처음 알았다. 넘어가는 절차가 엄격하고 시간도 많이 걸려 한 나절을 보내야만 했다. 특히 우리를 안내한 관광사의 무전기를 빼앗긴 것은 정말 아까웠다.

오후에는 안중근 의사의 단지 동맹비에 가서 미리 준비해간 퍼포먼스를 하였다. 그곳에 돌이 13개가 놓여있는데 이것은 안중근이 이토의 죄목을 13개로 정리해서 말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학생들도 가슴에 뭉클한 감동을 안고 ‘신 독립군가’를 부르고 율동을 하였다. 그리고 라즈돌리노예역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연해주에 이주하여 사는 고려인(카레이스키)들이 1937년 스탈린의 명령으로 강제로 중앙아시아로 끌려갔던 역이었고, 그 아픈 역사를 연극으로 재현하였다.

▲ '안중근 단지동맹비 앞에서 기념식하는 장면

다음으로 발해성터에 갔는데 비가 많이 와서 진흙탕이 된 산성길을 올라갔다. 갈까 말까 논란이 있었는데 막상 올라가서 보니 날이 개면서 드넓은 솔빈부 옛터를 보면서 감격해했다. 원래 이곳은 발해의 중요한 지방도시인 15부가 있던 곳으로 솔빈부가 있었고 좋은 말이 많이 생산되던 곳이었다.

▲ 솔빈부의 넓은 평원과 수이푼강이 보이는 발해성터에서

그곳에서 10분 남짓 걸려 이상설 유허비에 도착하였다. 이상설은 헤이그 특사 중 대표인데 사람들에게 알려져있지 않은 얘기를 들려주었다. 예를 들어 을사늑약이 맺어지자 고종에게 순직상소(죽음으로써 종묘사직에 속죄하라는 상소)를 올렸다는 사실과 이런 사람을 고종이 아끼고 국제적 감각을 갖고 있어서 헤이그 특사로 임명했다는 점을 설명했다. 그리고 유언으로 자신을 화장하여 뼛가루를 이곳 수이푼(솔빈이라는 뜻)강에 뿌려달라고 했는데 이것은 죽어서라도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뜻으로 읽힌다는 점을 설명하였다. 왜냐하면 수이푼강이 흘러 오호츠크해를 거쳐 동해로 흐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의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유언은 과거보다 미래를 향해 매진하라는 의미로 읽힌다고 설명하였다. 어두워져 가는 수이푼 강에서 이상설을 기리는 기념식과 숙연한 분위기는 지금도 가슴에 아련하다.

4일에는 우수리스크로 가서 고려인 마을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오후에는 연해주에 사는 고려인들이 우리의 전통을 지키는 모습을 공연을 통해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우리 사회가 갈수록 전통문화를 홀대하는 모습에 깊은 반성이 일어났다. 다음으로는 새로 신축한 독립운동기념관에 가서 최재형이 연해주에 독립운동에 기여했던 부분을 배우고 연해주 지방의 독립운동사에 대해서 답사를 통해 실감하였다. 특히 최재형은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이자 안중근이 의거를 할 수 있도록 총을 사 준 인물로 알려져 있다. 안중근은 연해주 독립운동가의 도움을 많이 받았던 셈이다. 최재형이 권총을 사 주었고, 이상설은 동양평화론을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

5일에는 블라디보스톡에 가서 러시아 정교회 사원도 보고 신한촌에 들러 우리 연해주 독립운동의 역사를 배웠다. 새로운 한국을 세우겠다는 뜻으로 만들어진 신한촌에서 3·1운동 이후에 또 하나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였던 대한국민의회를 만들었던 것이다. 저녁에는 대륙횡단열차를 타고 하바로프스크로 갔다. 더운 여름에 샤워를 할 수 없다는 점이 많이 불편하게 느껴졌지만 수건을 빨아서 닦으니 그런대로 버틸만 하였다.

6일에는 하바로프스크에서 향토박물관을 가고 아무르강을 배로 유람하면서 이번 대장정 기간동안 가장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착하고 발랄한 학생들이 10명 정도가 모여서 손바닥을 치면서 노는 모습에 절로 미소가 머금어졌다. 이 장면이 뇌리에 깊이 남아서 이들과 다시 평화와 통일을 공부해보리라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7일에는 하바로프스크의 역사 유적을 탐방하였다. 주로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과정에서 투쟁한 역사를 답사한 것이다. 조명희, 김유천, 김알렉산드리아등...... 밤에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다시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하였다.

8일에는 아침 일찍 대륙횡단열차에서 내려 잠수함 박물관 하나만 보고 공항으로 가서 곧바도 인천으로 귀국하였다. 인천에 있는 호텔에서 투숙하였다.

9일에는 인천에서 무안에 있는 전라남도 교육청을 향해 출발하였다. 도교육청 광장에 모여 귀국을 기념한 퍼포먼스를 보여주었고, 대강당에 들어가 귀국보고회를 하였다.

이러한 과정이 끝이 아니었다. 그 성과를 갈무리 하기 위해 학생들이 작은 책으로 펴내는 작업을 해야만 했다. 교사들은 이 과정을 지도하느라 또 한 번 머리를 싸매야만 했고, 학생들은 글쓰는 작업의 고단함을 절감해야만 하였다. 이를 위해 대장정을 갔다 온 후로도 두 차례의 1박 2일 캠프를 했고, 마침내 10월 25일 졸업식을 하고 모든 과정을 마쳤다.

이 학교를 준비하는 직무연수부터 따지면 9개월이 넘는 기간을 전남통일희망열차학교의 성공을 위해 달려왔다. 많이 지치고 힘들었지만 견뎌냈다는 점에 스스로 긍지를 느끼기도 했지만, 지나놓고 보니 아쉬운 점도 많았다. 특히 이름에 걸맞지 않게 통일과 평화에 대해서 제대로 공부하지 않았다는 나 나름대로 반성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80명의 학생 중에서 더 활동을 이어나가고 싶은 학생들을 모아서 전남통일희망 써포터즈를 운영하려고 기획안을 냈고, 뜻을 같이하는 교사 4명과 장학사 1명으로 팀을 짰다. 하지만 준비 모임을 1월에 한차례 한 후에 코로나19 감염병으로 멈춰서 있다. 언제 재개될지 알 수 없지만, 우리 학생들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의 역군으로 성장하는데 기여해보고 싶다.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위원

정경호 주주통신원  jkh353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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