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 첫 발령을 받았던 80년대 초반이 가끔 생각납니다. 당시에 나이 지긋한 40대 중견교사들은 방과 후 술자리에서 자신의 교직경험을 들려주곤 했습니다. 그 당시엔 자가용이 널리 보급되던 시절이 아니라 방과후 술자리가 종종 있었지요.

선배교사들이 들려준 이야기 가운데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게 있습니다. “학년 초 3월 한 달 동안에 학급 아이들을 확실하게 잡아 두어야 1년 농사가 편하다.” 그런가 하면 선배교사들 가운데 새해 첫날 학교장에게 세배 하러 가자고 저에게 다가왔던 교사들도 떠오릅니다.

‘세배는 무엇이고 아이들을 잡다니...’ 그 뜨악한 표현이 심히 거슬렸지요. 식민지 잔재인 교단에 서서 아이들을 내려다보게 했던 시절이니까 그런가 보다 했습니다. 그 당시엔 체벌이 일상적인 풍경이었고 심했던 시절이었으니까요.

더구나 남자학교여서 그런지 90명 가까이 되는 교사들마다 몽둥이를 하나씩 들고 다녔던 시절이었습니다. 말 안 듣는 아이들을 교무실에서 줄줄이 불러 세워 놓고 뺨을 때리거나 엎드려뻗쳐 시켜서 몽둥이로 내리치던 광경도 적잖이 목격했으니까요.

한 마디로 ‘교육’의 이름으로 야만이 횡행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아직도 폭력이 난무하던 그때가 그립고 호랑이 선생님 운운하는 걸 보노라면 한국 사회는 여전히 ‘폭력에 중독된 사회’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 2004년 개봉된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의 한 장면.

부패와 비리로 얼룩진 사학재단 서초구 상문고를 다녔던 감독과 제작진들이 만든 영화로 국가주의 교육이 어떻게 학교현장에 미세혈관처럼 스며들어가는가를 세밀하게 보여준 작품이다. (출처 : 씨네 21)

소지품 검사를 당연하게 생각하던 시절! 교실이나 복도에 무릎 꿇리고 손들고 있게 하던 학교 풍경은 바로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를 생각나게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래도 36년이 지난 오늘날 학교사회 풍경은 많이 변했습니다. 군대와 학교, 교도소 가운데 가장 변화가 더딘 공간이라고 인권운동가들은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렇지만 학교사회 역시 적어도 형식적으론 수평적인 관계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 유장하고도 도도한 변화의 흐름을 누구도 막을 순 없겠지요. 아주 느린 속도이지만 학교장과 교사, 교사와 학생의 관계가 인격적이고 수평적인 관계로 조금씩 아주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아직 갈 길은 멀지만 학교사회를 그렇게 변모시키는 데에 교육의 본질이 숨겨져 있음을 발견합니다. 교육기본법 제2조에 “자주적인 생활능력을 갖춘 민주시민을 길러내는 것”에 교육의 목적이 있음을 천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80년대 제가 있던 구로고등학교에선 아침마다 웃픈 풍경이 연출되었습니다. 유독 그 주임(오늘날 부장) 교사 2명이 아침마다 중앙현관에 도열해 서 있었지요. 당시엔 학교장에게 전속기사와 관용차를 주었습니다.

학교장이 관용차를 타고 출근하면 유별나게 두 학년부장들은 서로 경쟁하듯이 문을 열어 주고 깍듯이 90도로 인사를 했습니다. 그 풍경이 얼마나 우습던지 그래도 그들은 학교장을 숭배하는 듯 정말이지 깍듯했습니다. 학교장을 양 옆에서 수행하며 1, 2, 3학년 교실 전체를 순시하던 풍경이 아직도 또렷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80년대 당시 절대 다수 학교들이 일제 식민지 건축 양식에 따라 학교 건물이 일자식으로 되어 있어서 한 학년이 생활하는 긴 복도는 100m 달리기를 하고도 남을 정도였습니다. 초저녁 어둑어둑할 때 학교풍경은 고즈넉한 맛도 있으나 야간강제 타율학습이 끝나는 컴컴한 밤이 되면 기다란 복도 저쪽 끝엔 영화 『여고괴담』에나 나올 법한 으스스한 기운이 느껴지곤 했지요.

교무실 칠판엔 학급부반장들이 1교시 마치고 곧장 내려와 출결상황을 적는 난이 있었습니다. 매일 교무일지를 작성해 교육청에 보고하던 시절 풍경입니다. 지금은 모두 사라졌지만 교사들은 학습지도안을 두툼하게 썼고 매학기 결재를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연구수업 아닌 연극수업을 매년 신참내기 교사들에게 떠넘겼고 되지도 않은 평가회로 예산을 낭비하던 시절이었지요.

학교 시험을 치고 나면 1등부터 100등까지 대자보 형식으로 방이 붙었던 시절! 그걸 당연하고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시절이었습니다. 등록금을 못낸 아이들 출석부 이름자 옆에 ‘등교정지’라는 빨간 도장을 찍게 했던 무지막지한 시절! 아이들이 길거리 불온 전단지를 주워 오면 볼펜을 주고 파출소에 신고하던 시절!

70년대 난무하던 표어와 구호들! ‘때려잡자 김일성, 무찌르자 공산군’, ‘의심나면 다시 보고 수상하면 신고하자’ 던 박정희 유신 시절 교육의 연장이었습니다. 전두환은 박정희 양아들로 청와대에서 점심을 같이 먹던 존재였으니 5공 정권 학교교육은 박정희 유신체제의 연장이었습니다.

3학년 교실에서 동백림 사건(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이 기술된 ‘국민윤리’ 교과서를 가르치면서 ‘이 부분은 교과서를 찢어버리라’고 얘기했던 적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뜨악한 얼굴로 저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래서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의 실체를 이야기 식으로 들려주었습니다.

당시 대학입시는 70년대 예비고사-본고사가 폐지되고 학력고사 시절이어서 모든 시험 문제가 교과서 안에서 출제되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교과서를 사도신경 외듯이 달달달 외우느라 정신이 없던 시절이었지요. 94년 수능시험체제로 바뀌기 전까지 학력고사 시대는 그런 풍경을 연출했습니다.

▲ 2019년 5월 25일 <전교조 결성 30주년 기념 전국교사대회> 당시 종로구 조계사에서 청와대로 행진 도중 충청남도에서 올라온 젊은 남녀 교사들이 재미있는 퍼포먼스를 하면서 거리 행진을 하는 장면.(출처 ; 하성환)

지난해는 전국교직원 노동조합(약칭 전교조) 결성 30주년 되는 해였습니다. 지난해 5월 전국교사대회 거리 행진 도중 갑자기 40대 후반(?) 제자이자 시골학교 교사를 반갑게 만났습니다. 그 제자가 들려준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선생님! 기억나세요? 그 때 교과서 찢어버리라고 했는데 기억나세요?”. “선생님이 교과서 찢어버리라고 했을 때 정말 놀랬어요.”

​경기도 양평에서 아이들과 모내기를 하고 지역 주민들과 카페를 운영하며 마을공동체 혁신학교를 열정적으로 담당하고 있는 그 제자를 보노라면 분명 청출어람이 맞는 것 같습니다. 진정 스승이 되어 참교육 실현에 매진하는 그 제자를 생각하면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일구는 것 같아 새롭게 힘이 솟아나곤 합니다.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hsh70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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