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루한의 배움밝힘 ⑤ 살맛나는 배움]

대한민국 나라임자들이 ‘교육’을 버려야 할 까닭

뜻밖의 해무리(코로나)19 사태를 겪고 있는 대한민국 학교는?

2020년 우리가 맞은 봄날은 아우성이다. 온누리에 널리 퍼진 해무리(코로나)19 탓이다. 나라마다 봉쇄령을 내린 가운데 ‘확진 검사’도 받지 못한 채 죽는 이들도 늘고 있다. 다행히 대한민국은 안정된 ‘검사’의 틀과 봉쇄 없는 시민 참여로 여러 나라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마스크 쓰기’나 ‘손씻기’, ‘잠시 멈춤’이나 ‘사회적 거리두기’를 누구 할 것 없이 실천하면서 돌림앓이(전염병) 문제를 풀어나가고 있는 가운데 총선까지 치러냈다. 4월 9일에는 온라인으로나마 학교 문도 열었다. 고3, 중3에 이어 초등 1,2학년에 이르기까지.

학교의 4월 개학은 58년만이란다. 30여 년 학교 현장을 지킨 교사로서도 처음 맞이했다. 대신 겉치레처럼 보조 방식으로 여긴 가상공간의 온라인 수업으로 진행하게 되었다. ‘온라인 개학’의 학교는 가보지 못한 길을 걸으며 ‘참배움’에 대한 생각을 나눌 기회가 되었다. 학원은 수익 때문에 문을 닫지 않고 더러 게임방엔 학생들이 붐비기도 한단다. 하지만 5월 중순엔 고교 3학년부터 차례로 등교하게 될 전망이다. 교사로서 맞이한 올해 봄날은 새삼 21세기 학교로 돌아온 듯한 분위기를 느낀다. 19세기 근대학교가 사라지는 느낌이 든다.

내가 받은 ‘교육’을 떠올려 보니

새삼 학생, 교사, 부모, 학교 지원 당국과 함께 ‘교육’이란 가르침을 생각해 본다. 주어진 교과서에서 물음의 정답을 찾아내도록 시험을 치르는 동안 나름의 생각을 제대로 해 본 일이 있었던가? 오히려 방해를 받은 적이 없었던가? 대한민국 근대 학교교육은 대체로 식민 통치와 반민주 독재 정부의 교육이라 할 만하다. 누군가를 위해 그들을 관리해야 한다는 권리와 의무를 느낀 사람들의 행위가 교육이었다. 중요한 문제에 대해 비슷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기르고 주어진 생각만으로 살게끔 강요했다.

과연 이런 교육이 옳을까? 교육은 학습과 함께 끊임없이 되풀이하면서 ‘낯익음’(숙달)을 강조한다. 본디 사람들은 주어진 상황에 낯익게 되면 그만큼 새로 적응하기 어렵다고 한다. 심리학에서 다루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5초만 지나도 판단의 잣대는 ‘낯익음’에 있단다. 이런 까닭에 제대로 스스로 따져보지 않고 ‘전문가’를 찾아서 그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맡기게 되니 그만큼 슬기로운 판단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나라사람들의 생각인 머릿속그림을 그들 뜻대로 굳히며 ‘거짓’과 ‘따라하기’를 억지로 다그치는 일이었다.

'교육'과 함께 ‘언론’은 어떨까요?

새뜸터(언론사)의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빨리알림(속보)을 내세워 대놓고 제대로 밝히지 못한 것을 마구 써 버린다. 요즘 ‘기레기’란 말이 나오고 ‘가짜뉴스’ 시비를 하느라 ‘사실은 (팩트체크)’을 따로 만들어야 하는 처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정부에서조차 공무원이란 사람들부터 2005년 만든 ‘국어기본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있다. “국어의 사용을 촉진하고 국어의 발전과 보전의 기반을 마련한다”고 해놓고 나라말을 저버리고 있어요. 과연 나라사람들의 ‘창조적 사고력’을 어떻게 ‘증진’하고 ‘도모’하고 있습니까?"

‘코로나19 바이러스’나 ‘사회적 거리두기’, '드라이브 스루'를 꼭 써야 할까? 새뜸터(언론)에서도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고 빌린말(들온말)을 마구 쓰고 있다. ‘해무리19 좀알’이나 ‘만날 때 떨어지기’, '차 탄 채'는 ‘문화적 삶’의 질을 향상하고 민족문화의 발전에 이바지하고자 만든 법률을 어기는 것 일까? 교육과 언론에서 쓰고 있는 말글살이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면 바로 그것이 새뜸터(언론)와 배움터(학교)에서 배움판갈이(혁명)가 필요한 까닭일 것이다. ‘교육’과 ‘언론’은 본디 ‘낯익음’을 다루는 것이 아니다. 늘 새로움이란 것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빌린 일본말이나 서양말의 교육/학습을 버리자

말글살이에서도 나라임자라면 새로움이란 낯섦을 두려워해선 안 될 것이다. '배움'으로 낯섦을 즐겨야 한다. ‘교육’과 ‘언론’의 말글살이에서 대한민국은 혁명이란 판갈이가 필요하다. 더 좋은 나라, 나라다운 나라, 내 삶을 바꿔 살맛나는 누리로 바꾸고 싶다면 말이다. "일본은 오역이지만 모든 서구어를 번역해서 동양 문화와 결집시키면서 새로운 이론을 창출했다"는 말이 있다. 차이나도 ‘코카콜라’를 “크어코우크어러(可口可乐)”라 옮겨 놓듯이 참다운 말글살이는 배움터(학교)와 새뜸터(신문방송사)에서 한말글을 사랑해야 한다.

저마다 나라임자로서 '지식교육'보다 '슬기(로운)배움'이 되도록 한말글(한국어)를 펼치는 데 나서자는 생각을 할 때다. 물론 한때 독재자인 박정희의 ‘국어순화’ 방식은 곤란하다. ‘국어’에서 정작 바꾸어야 할 바탕말은 바꾸지 않고 우동을 가락국수로 바꾸는 수준은 아니다. 식민과 독재로 이어지며 고르기 시험의 수능이나 학교 정기고사를 없애 지식을 전달하고 줄 세우는 틀도 바꾸어야 한다. ‘대학수학능력고사’란 이름으로 가짜 수능 시험에 매달리게 하니 참다운 ‘대학수학능력’이란 배움의 힘은 놓치고 있다. 더욱이 일본말글에다 요즘은 서양말글로 된 교과서나 교재로 공부하고 있지 않은가?

한 가지를 알아도 열 가지로 부려 쓸 수 있도록 생각하는 배움을 누려야

학생들은 ‘헬조선’을 말하고 부모들은 ‘학교’를 못 믿으며 교사들은 부끄러운 현실을 바꿀 때다. 왜 학교에는 경쟁이란 ‘교육’ 껍데기만 있고 ‘배움’은 없을까? “학교에서 배운 게 사회생활에서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아요!”란 학생들 말처럼. 그때그때 떠오른 물음이 소중한지를 모르고 흘러 보내고 ‘지식전달’의 주고받음에 그치는 ‘교육/학습’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이젠 한말글로 배움에 힘써야 한다. 배움은 스스로 묻고 찾는 것이다. 예/아니오로 답할 수 없고 까닭이나 다른 보기를 찾아보게 해야 한다.

무엇이든 스스로 해 보지 않으면 답하기 어렵다. 들은 것, 이미 책에 있는 것을 옮겨서는 참다운 힘을 기를 수 없다. ‘교육/학습’을 버려야 할 것이다. 새로 물음을 떠올리며 늘 앞서가게 되려면 한 가지를 알아도 열 가지로 부려 쓸 수 있는 생각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삶을 슬기롭고 아름답게 가꾸는 힘은 스스로 깨침이나 깨달음의 배움에서 나온다. 넓이와 깊이, 새로움을 펼치려면 똑같음의 교육/학습에서 다 다름의 배움으로 나아가면 노벨상도 절로 받을 것이다. 이젠 대한민국도 ‘교육’을 버리고 한말글로 배움에 힘써야 할 때다. (4353.4.30)

편집 : 심창식 편집위원

김두루한 주주통신원  duruh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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