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만난 사람은 군서면 하동리에 사는 김선형 씨(79)입니다. 하동리에는 '삼일유지계'라는 이름의 계(契)가 있습니다. 1919년 3.1운동 당시 서화산에서 횃불을 들고 만세시위를 벌였던 김 씨의 할아버지 김순구 선생과 마을 주민 25명의 유족을 중심으로 구성된 계입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김순구 선생의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해 대통령 표창을 수여했고, 1991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습니다. 2002년 민관 협력으로 3억 원을 모금해 김순구 선생과 주민 25명의 초상화와 위패를 모신 사당을 건립했는데, 사당의 이름은 '충민사(忠民祠)'였습니다. 김순구 선생이 독립운동으로 충성한 대상은 다름 아닌 백성이었던 겁니다. 할아버지 묘지와 충민사 관리는 요즘도 김선형 씨의 몫입니다. 옥천 주민들이 횃불을 들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친 만세봉은 옥천의 자부심이라고 김선형 씨는 믿습니다.

▲ 김선형씨가 충민사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

1941년 옥천군 군서면 하동리에서 태어났다.

평생 농사를 지으며 이장을 무려 37년 동안 보셨던 아버지(김회준)는 어머니(곽운례)와의 사이에서 9남매를 낳으셨다. 여섯 번째로 태어난 나는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군서초등학교에 입학했지만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3학년을 마지막으로 중퇴해야만 했다.

매우 엄하셨던 아버지는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모든 자식을 공부시킬 수 없다고 판단하신 듯했다. 어릴 때부터 머리가 좋았던 장남 즉 형(김관형)은 계속 공부를 시키고 차남인 나는 일을 시키는 전략을 취했다. 그래서 초등학교를 중퇴한 열 살 때부터 학교에 다시 가지 못하고 아버지 농사를 도왔다. 옥천중학교와 대전상고를 졸업한 형은 충남도청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하며 야간대학을 졸업했다. 형은 나중에 중앙부처인 상공부로 자리를 옮기며 서울 사람이 됐다.

▲ 김선형씨의 아버지 김회준 옹

농사꾼으로 잔뼈가 굵어가던 스물여섯 살의 나에게 징집영장이 나왔다. 현역이 아니라 방위였는데, 나는 방위 1기였다. 그 무렵 결혼해 가정도 일구었다. 그렇게 고향을 지키면서 할아버지(김순구)의 묘지가 있는 선산(先山)을 돌봤다. 하동리에는 '삼일유지계'라는 독특한 이름의 계(契)가 있다. 1919년 3.1운동 당시 서화산(현재는 '만세봉'으로 불림)에서 횃불을 들고 만세시위를 벌였던 할아버지와 주민 25명의 유족을 중심으로 구성된 계였다.

"네 할아버지는 3.1만세운동을 주도하셨던 훌륭한 독립투사였단다."

어렸을 때부터 자주 들었던 말이다. 삼일유지계 계원들은 매년 만세봉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주로 젊은 내가 지게에 멍석이나 음식을 지고 올라갔다. 제대로 배우지 못한 채 일만 했던 나를 두고 사람들은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고 말하곤 했다.

 

▲ 충민사 내부. 김순구 선생의 영정이 보인다

 

일제의 대못 고문도 꺾지 못한 독립 의지

1867년 군서면 하동리에서 태어난 할아버지는 1919년 옥천, 문의, 청주 등 충청 일원에서 연이어 일어난 3.1만세운동의 주동자 중 한 명이었다. 일제의 검거를 피해 거처를 옮겨 다니던 할아버지는 4월 8일 고향 마을의 만세봉에서 뜻을 같이 하는 주민 25명과 횃불을 밝히고 만세 시위를 벌였다.

"대한독립 만세!!!"

"대한독립 만세!!!"

전국의 3.1운동 현황을 보도한 매일신보에는 실제로 '옥천, 산에 불 피우고'라는 활자가 인쇄돼 있었다.

시위 장소를 착각한 주재소 순사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할아버지는 무사히 피신할 수 있었다. 오늘날의 파출소와 같은 역할이던 주재소는 지금 한전전력소 자리에 있었다. 산에서 횃불시위를 한다는 첩보를 받은 순사들은 하동리가 아니라 사양리 쪽으로 달려갔다. 그들이 헛걸음치는 사이에 할아버지는 장녀가 살고 있던 문의로 피신했다.

하지만 주민 4명이 옥천경찰서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한다는 소식을 들은 할아버지는 "내가 주동자이니 주민 4명을 석방하라"고 요구하며 경찰서에 자진 출두하였다. 이후 공주지방법원에서 정치범으로 징역형 언도를 받고 공주감옥에 투옥됐다.

할아버지는 옥중에서도 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투옥 23일 만인 6월 28일 53세를 일기로 순국하셨다. 그런데 일제가 가한 고문 방법이 너무나 잔혹했다. 그들은 가혹한 고문으로 할아버지가 혼절하자 산 채로 관 속에 넣은 다음 대장간에서 특별 제작한 대못을 여러 개 박아 넣어 절명시켰다. 대못 하나의 길이는 한 자나 되었다고 한다.

친지와 주민들은 관 속에 못 박힌 채 들어 있는 할아버지의 시신을 넘겨받아 상여에 싣고 공주에서 옥천까지 통곡하며 걸어왔는데 일주일이 걸렸다고 한다. 날씨가 더워 시신은 완전히 부패했고, 사람들은 오열하며 할아버지를 마을 뒷산에 모셨다고 한다.

하지만 1970년대 중반까지 할아버지와 하동리 주민 25명의 만세운동은 공식적인 독립운동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판결문을 비롯한 증거 서류가 6.25전쟁 당시 모두 불에 타버렸던 것이다. 바로 이때 상공부에 근무하던 형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역사학자와 국회의원 등 지인의 도움을 받아 판결문과 당시 신문 기사 등을 찾아내 독립운동 유공자 인정을 받아낸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할아버지에게 대통령 표창을 수여했고, 1991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1985년 보훈처에서 할아버지 묘지의 봉분을 확장하는 작업을 추진하던 중에 66년 전 매장 당시 묘지 주변에 묻어둔 것으로 보이는 대못이 실제로 발견됐다. 대못 몇 개는 이미 녹이 슬어 없어졌고. 나머지도 삭을 대로 삭아서 짧아진 상태였다. 대못 옆에는 할아버지가 쓰던 큰 수저도 구멍이 뚫린 채로 있었는데, 투옥 당시 만세운동를 할 때 창살을 두드렸던 시위 도구였다고 한다. 현재 대못과 수저는 독립기념관 3.1운동관에 전시돼 있다.

2002년 민관 협력으로 할아버지와 주민 25명의 초상화와 위패를 모시기 위한 사당이 건립되었다. 사당의 이름은 '충민사(忠民祠)'였다.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으로 충성한 대상은 다름 아닌 백성이었던 것이다. 요즘도 할아버지 묘지와 충민사 관리는 전적으로 나의 몫이다.

▲ 김선형씨가 충민사 앞에 섰다.

 

■ 서울 건설 현장 돌며 일해 목돈 만져

나는 1970년대 중반에 처음으로 고향을 떠나서 객지 생활을 시작했다. 결혼하고 10여 년이 흐른 뒤인 당시 나는 30대 중반이었다. 팔촌동생(김달형)이 대기업 건설사의 하청을 받아 서울에서 각종 건설 현장을 다니며 일하던 책임자였다.

나는 동생의 제안을 받고 상경해서 목수로 일했다. 콘크리트를 타설하기 전에 나무로 거푸집을 만드는 일을 담당했다. 당시에는 이 모든 공정을 사람의 손으로 해결했다. 실제로 도곡동 아파트, 성산대교 등 수많은 서울의 건축물에는 나의 땀이 배어 있다.

그때부터 한 해의 절반은 고향에서 보내고 나머지 절반은 타향에서 보냈다. 모내기를 끝내고 상경하면 추수할 때까지 서울에 머물렀다. 객지 생활은 힘들고 외로웠다. 현장 숙소에서 잠을 자고 이른바 '함바'에서 식사를 해결해야만 했다.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한 달에 한 번 정도 가족들 얼굴을 보려고 고향에 내려왔다. 서울역에서 출발한 비둘기호가 옥천역에 도착할 무렵이면 왠지 가슴이 설레고 기분이 좋았다. 가끔은 고속버스를 이용해 고향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렇게 서울에 가서 목수로 일한 것이 20여 년이었다. 덕분에 목돈을 만질 수 있었고, 고향에 땅도 사고 집도 지을 수 있었다. 되돌아보면 어릴 때부터 손재주는 타고 난 것 같다. 무엇인가를 고치는 것이 좋았고 나무를 가지고 일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새마을운동 바람이 불면서 마을 지붕 개량을 할 때도 초가의 짚을 걷어낸 지붕에 슬레이트를 얹을 수 있도록 각목을 설치하는 일은 내 몫이었다. 그래서 서울과 고향을 오가는 처지였음에도 마을의 새마을지도자를 맡았다.

도시와 농촌 생활을 두루 경험해서인지 나는 새로운 변화에 민감한 편이었다. 경운기, 트랙터, 콤바인, 이앙기 등 농기계가 나오면 마을에서 거의 제일 먼저 구입해 사용했다. 양옥집도 가장 먼저 지었고, 정화조도 가장 먼저 설치했다. 1995년 양옥집을 지을 때는 다행히 아내(김정희)가 설계를 하고, 내가 직접 자재를 사오고 일하는 바람에 약 2천만원의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다.

아내도 새로운 것을 배우기 좋아했다. 콤바인 다루는 법을 열심히 배우더니 청주에서 열린 충북대회에 출전하기도 했다. 그런 적극성을 가지고 있다 보니 다양한 지역단체 대표도 맡게 됐다. 우리 아이들이 다니던 옥천상고의 자모회장, 옥천의 유일한 여성 라이온스클럽인 목련라이온스클럽의 회장도 맡았다. 군서면농악회 초대 회장을 맡아 12년 동안 봉사했으며 옥천군국악회 회장으로 7년 동안 활동하기도 했다.

▲ 충민사에서 내려와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김선형씨

 

후손들은 인생을 즐기면서 살아가길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는 법. 내 인생에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우선 소 키우는 일은 성공하지 못했다. 목돈을 만져보려고 투자했는데 소 파동이 일어나면서 낭패를 보고 말았다. 소를 팔려는 시점이 되면 소 값이 떨어졌고, 송아지를 살 무렵이 되면 소 값이 올라갔다. 사람을 잘 믿는 편이다 보니 지인들의 보증을 섰다가 문제가 되어 빚을 갚느라 애를 먹은 적도 있었다.

"앞으로 길어야 8~9개월밖에 살지 못할 겁니다."

죽을 고비도 넘겼다. 4년 전에 악성 폐암이 발견되면서 의사로부터 시한부 인생의 선고를 받기도 했다. 당시 결핵까지 겹치는 바람에 수술을 할 수 없었지만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 나중에 결핵이 나은 다음 항암 치료만 받았다. 현재 완치된 것은 아니지만 암 세포가 더 이상 발견되지 않고 전이도 되지 않고 있다.

80년 가까이 살아 보니 문득 너무 허망하게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무엇보다 중요하고 시급한 것은 가족을 먹여 살리는 일이었다. 그래서 좌우를 돌아볼 틈도 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것 같다. 사랑이니 행복이니 하는 것들을 느껴볼 틈도 없었다. 흥겹게 놀아본 적도 없다. 아니 놀 줄을 몰랐다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해외여행 바람이 불 때도 굳이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가지 않았다.

장녀 희월(2녀1남), 차녀 희숙(1남1녀), 삼녀 희도(2남), 장남 희광(1녀), 차남 희승(1남1녀)이 모두 10명(5남5녀)의 손주를 낳아주었다. 부디 건강하고 행복하게, 무엇보다 인생을 즐기면서 살아가길 바란다.

▲ 김선형씨와 김정희씨 부부가 자택 앞에서 다정한 모습으로 사진을 찍었다.

 

아버지라 부를 수 있어 감사합니다

차남 김희승 씨가 보내온 5가지 감사

① 아버지는 가장이라는 이름으로 가족의 생계를 위하여 열심히 일하셨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우시장에 소를 팔러 가셨고, 귀가 후에도 쉬지 않고 농사에 전념하셨습니다. 그때는 어린 마음에 놀아주지 않는 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제가 한 가정의 가장이 되어 보니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신보다 가족을 위하여 희생하고 헌신하신 아버지 감사합니다.

② 어린 시절 친구들과 놀다 사고가 나거나 실수를 하면 아버지는 언제나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다 그럴 수 있다." 그런데 당시는 몰랐으나 내가 일으킨 문제를 해결하려고 아버지가 동분서주하셨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항상 자식을 믿어주시고 좋은 방향으로 인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③ 지금도 자식과 손주들을 위해 직접 추수한 양질의 쌀과 달콤한 배, 철마다 각종 채소를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④ 항상 후손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큰 고비 없이 건강하게 우리 곁에 있어주신 그 자체만으로도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건강하시길 기도합니다.

⑤ 우리 5남매의 아버지여서, 그리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 김선형씨가 충민사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 김선형씨 자택 마당에서 바라본 충민사

 

글 정지환 객원기자·사진 박누리 기자

[편집자주] 정지환 기자는 1993년부터 월간 말, 오마이뉴스 등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안티조선 전문기자’라는 애칭을 얻는 등 우리 사회에 숱한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논쟁적 기사를 남겼다. 2004년에는 입법전문지 '여의도통신' 창간을 주도하기도 했다. 2010년 사회적 좌절을 맛보고 ‘감사’를 만나면서 기업, 학교, 군대, 지자체 등에서 1000회 넘게 '감사' 강연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1인기업 감사경영연구소 소장과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로 일하고 있다. ‘내 인생을 바꾸는 감사 레시피’, ‘30초 감사’, ‘감사 365’ 등 10여 권의 저서가 있다.

* 이 글은 옥천신문(http://www.okinews.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정지환 옥천신문  lowsaeja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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