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출처 : 2016년 5월 2일 한겨레21

아, 오빠도…

“잠깐만요. 뭐든지 쉽게 잘라집니다. 아주 잘 드는 칼인데요, 여성분들도 쉽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물만 안 묻힌다면 오 년, 십 년도 끄떡없어요. 4천5백 원짜리가 천 원 한 장입니다.”

왼손에는 천 원짜리 몇 장과 장바구니 카트가, 오른손에는 커터 칼이 서너 자루 들려 있다. 하필이면 칼일까? 순간 섬찟하다는 생각이 든다. 조용한 차 안을 어지럽힌 것도 마뜩하진 않다. 유난히 목소리가 굵은 50대 중후반의 남자다. 승객들 모두 나와 같은 생각들일까? 거들떠보는 이가 거의 없다.

“사모님, 사장님, 이런 기회 따로 없습니다. 공장 창고 정리로 이렇게 드리는 겁니다. 칼날이 무뎌지면 바꿔주세요. 모두 5번을 갈아 쓸 수 있어요. 자, 지나갑니다. 4천5백 원짜리를 천 원 한 장에 모십니다.”

남자는 불쑥 칼을 드밀며 내 앞을 지나간다. 옆 칸으로 멀어져 가는 그를 바라본다. 한동안 머뭇거리다가 나도 모르게 일어섰다. 문을 열자 그 남자가 날 본다. 이내 내 손에 쥔 천 원짜리를 발견한다. 낚아채듯이 거머쥐더니 말없이 칼 한 자루를 건네준다. 어찌나 잽싼지 나는 멈춰 설 필요가 없다. 칼을 든 채 빈 자리 찾아가는데 누군가가 “아저씨, 칼!” 하며 천 원을 내민다. 절로 웃음이 나온다. 씩 웃었더니 객쩍은 듯 “아니구나.” 하면서 고개를 돌린다.

 

일종의 기시감인가?

1974년 겨울, 교대를 다닐 때 신민당 기관지 민주전선을 판 적이 있다. 같은 교회 다니던 형이 한 부당 4원 50전에 갖고 온다고 했다. 버스 안에서 부당 10원을 받았다. 하루 저녁에 300부쯤을 팔았다. 버스가 오는 대로 갈아탔다. 어디로 가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몇 명이 타고 있느냐가 중요했다. 서 있는 사람이 10명 안팎인 도시형 버스가 딱 좋았다.

종로3가 양우당 앞에서였다. 지하철 공사가 한창이라 버스들이 대개 10여 분 넘게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기사도 승객도 짜증이 나겠지만 신문팔이에게는 제격이었다. 버스에 오르는데 차장이 신경질적으로 “내려, 내려!”하며 밀치는 바람에 뒤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신문을 추스르면서 모질게 쏘아붙였다.

“니 눈에는 모두 돈으로밖에 안 보이지? 저기 앉아 계신 분은 30원짜리, 서 있는 분은 20원 짜리로 말이야. 그래, 난 공짜로 타니까 1원짜리도 못된다고 치자. 그럼, 잘난 니 년은 얼마짜리냐?” (당시 도시형버스 차비는 좌석이 30, 입석이 20원이었음)

그 때 라디오 볼륨을 낮추면서 기사가 말한다.

“학생, 어서 팔고 내려가세요.”

한번은 공항버스를 탄 적이 있다. 여느 때처럼 신문을 팔았다. 내려야 하는데 정거장을 지나쳤다. 문 앞에 서 있는데 한 여고생이 말없이 껌을 내민다. 껌팔이 학생이었다. 망설이지 않고 10원짜리를 내밀었다. 껌은 받지 않았다. 같이 내리다 말고 옆구리에 든 신문다발을 본 그 학생은 ‘아, 오빠도…’ 하면서 10원을 돌려주려고 다가선다. 다음 버스에 오르면서 손을 흔들어 주었다.

사실 커터 칼에는 관심이 없다. 집에는 크고 작은 가위•송곳•드라이버•니퍼•테이프 커터•스테이플러•글루건 등 각종 공구들이 제법 많다. 17년째 어린이과학캠프를 주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커터 칼은 줄잡아 육칠십 자루나 된다. 그런데 왜? 특별한 이유는 없다. 전철 안에서 무언가를 사지 않고 망설이다가 두고두고 마음이 불편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솔직히 그냥 사고 싶었을 뿐이다.

집에 가자마자 너스레를 떠는 내게 아내는 볼멘소리다. 며칠 전에도

“웬 우비? 으이그, 또또”

하며 혀를 찼다.

 

전철 속의 레이싱 카

그 남자가 가방을 끌고 옆 칸으로 건너간다. 잠시 뒤에 다른 남자가 그 문으로 들어온다. 여행용 대형 가방을 밀고 온다. 다짜고짜로 오만 원짜리가 이만 원인데 오늘은 딱 만 원만 받는단다. 말이 어찌나 빠른지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를 못했다. 게다가 말끝이 흐리멍덩하다. 하지만 역설적이다. 발음이 불명확하니 나는 더 귀기울여 듣고 있다! 그가 던진 장난감 자동차 두 대가 바닥에서 빛을 뿜으면서 날렵하게, 하지만 아주 절도 있게 움직인다.

“앞으로 갓! 옆으로 돌앗! 멈춰, 스톱! 뒤로 뒤로! 레츠 고우, 일보 앞으로. 고우 고우~”

여전히 혀 짧은 소리다. 앞으로 휙휙 달리다가 옆으로 빙빙 돌아간다. 양쪽 차문은 물론 차량 덮개까지 활짝 열고 뱅그르르 돌더니 뒤로 슝슝 미끄러진다. 그 때마다 한껏 멋을 내고 소리까지 번쩍번쩍 제법 요란하다. 외양은 영락없는 레이싱 카다. 눈여겨볼수록 방정맞고 잔망스럽다. 어지럽다. 혼을 쏙 빼놓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때로는 어눌한 말이 오히려 진실해 보일 때가 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여자가 묻는다.

“아저씨, 세 개에 이만오천 안 돼요?”

그는 쳐다보지도 않고

“아메리칸 슈퍼카 오만 원짜리 단돈 만 원, 세 개면 삼만 원”

하면서 왔다 갔다 한다. 대부분이 관심을 보이지만 사는 이는 거의 없다.

“고급 무선 RC카. 오만 원짜리가 이만 원. 오늘만 딱 만 원. 어린이날 선물 안성맞춤!”

을 잇따라 외친다.

자동차는 주로 교통약자석 근처를 맴돌다가 중간까지 왕복하며 내달린다. 무선 원격 조종기가 따로 있을 리 없다. 그런데 그가 명령하는 대로 전진, 후진은 물론 좌우로 이동한다. 손가락 끝에 조향장치가 달린 것처럼 신기하다. 손끝이 가리키는 대로 움직인다. 두리번거리는 눈이 날카롭다. 사람들은 자동차를 응시하고 그 남자는 사람들의 눈길을 좇는다. 뒤쪽으로 갈 듯 말 듯하던 그는 이윽고 맞은편 여자에게로 다가선다.

“아줌마, 여기 세 대. 이만오천 원! 빨리요”

긴가민가하던 여자는 일행들끼리 눈짓하더니 셋이 한 개씩 받아 검정비닐봉지에 담는다. 바가지째 횡재(橫財)를 얻은 것처럼 웃음이 그치지 않는 세 여자. 그 너머로 해맑은 아이들이 떠오른다. 엄마 품에 안겨 까르락거리는 웃음소리들, 그리고 형 동생 얼싸안고 너울거리는 춤사위를 그려본다.

그 남자는 내가 왔던 옆 칸으로 간다. 여전히 무시근한 소리가 멀리서 들려온다.

“오만 원짜리가 이만 원. 오늘은 딱 만 원. 어린이날 선물!”

그 때였다. 기계음이 들린다.

“열차 안에서 물건을 팔면 불법입니다. 민원이 지속적으로 접수될 경우 지하철경찰대에 정식으로 신고하겠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한창인데 주변 분들이 많이 불편해하십니다. 이번 역에서 하차하시기 바랍니다.”

누군가가 신고한 모양이다. 차가 멈춘 곳은 능곡역이다. 그 남자들은 어디로 갔을까? 여전히 다른 열차를 타고, 열차 안을 두리번거리다가 또 기계음 소리에 놀라 쫓기듯 가방을 끌고 어디론가 떠나겠지. 내일도 그럴까? 모레도 그럴까? 어쩌면 기약 없이…. 늦은 밤, 찾아갈 집은 있을까? 기다리는 누군가와 함께 따뜻한 밥 먹고 다리 뻗고 잠들기를 빌어본다.

▲ 어린이날 맞이 한겨레21이 추천하는 동화책(사진출처 : 2020-05-01 한겨레 21)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박춘근 주주통신원  keun72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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