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들이 서울신북초등학교에 입학한 뒤로 새로 만난 성산동 8가족은 짬나는 대로 아이들과 함께 어울렸다.

어린이날, 꽃마차 타러 가다

1991년 3월,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왼손잡이인 아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안잊히는 아이였다. 섣달 열사흘에 태어났으니 보름 만에 애먼 두 살이 됐다. 다른 아이들보다 1년 가까이 일찍 입학한 셈이다. 어설픈 상식은 무식을 낳고 여기엔 필연코 무지한 상술이 파고든다. 서울대병원도 예외는 아니다. 그 바람에 아들은 쓰잘데없이 발음 교정을 한답시고 설소대 제거술까지 받았다.

입학식장에서 6학년 형이 환영사를 하면 1학년 대표가 답사를 한다. 학교에서는 우리 아들이 어떤 상태인지 전혀 알지 못한 채 적임자라고 했다. 불행하게도(?) 아들이 다니던 관인유치원에서는 한글을 가르치지 않았다. 2년이나 다녔는데 기역니은도 몰랐다. 으레 그러는 줄 알고 지내던 아내였다. 그제서야 선생인 나를 얼마나 닦달했는지 지금도 식은땀이 난다. 아무튼 아들은 답사를 읽을 수가 없었다. 이를 안타까워하던 교장선생님은 1학년 대표로 교과서를 받도록 했다. 천방지축 아들은 교장선생님께서 자기만 책을 주셨다고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녔다.

아내는 처음부터 어머니교실에 적극적이었다. 학교의 교육적 환경조성은 차치하고 순전히 아들이 남에게 뒤질세라 이를 염려한 탓이다. 자연스럽게 첫애가 모두 같은 또래인 엄마들끼리 만나서 교감을 한다. 그렇게 만난 엄마들이 8명이다. 아들이 3학년에 이르렀을 때 아내들은 비로소 8명의 남편들을 위해 한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중소 자영업자가 5명, 경찰관, 만화영화촬영기사, 그리고 초등학교 교사인 나 이렇게 8명이다. 우리는 방학 때마다 차에 깃발을 꽂고 들로 산으로 나다녔다. 캠핑, 래프팅, 썰매타기, 연날리기, 쥐불놀이… 그 중에서도 연중 가장 큰 명절은 어린이날이었다.

 

집집마다 아이들이 2명씩인데 모두 2년 터울이다.

우리는 해마다 서울교대를 찾았다. 접근성 좋고 프로그램 다양하고 무료입장이었다. 무엇보다도 우리 아이들을 들뜨게 한 것은 꽃마차타기였다. 이는 일정한 개수의 프로그램을 체험한 학생들만 즐길 수 있는 기획 행사였다. 말이 좋아 꽃마차지 성능도 그닥 좋지 못한, 낡은 손수레에 종이꽃 몇 송이를 꽂아 놓은 것이 전부였다. 게다가 이를 아빠들이 끌어야했다. 주최 측에서 준비한 손수레가 고작 두세 대로 기억한다. 그러니 어쩌다 한 번 손수레를 차지하려면 종일 땡볕에서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더 재밌었으리라. 아들은 머리에 오색리본 월계관을 쓰고 친구들 다 불러 모아 손수레에 태우고 헉헉대는 나를 향해 “이랴, 이럇!” 신나게 외쳤다. 때로는 풍선으로 엉덩이를 치면서 꽃마차들끼리 경주를 시켰다. 그 때마다 ‘아빠말’들은 흙먼지 날리는 운동장을 뛰면서 ‘주인님’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차가 없던 우리는 일 있을 때마다 예나네 차를 이용했다. 기아자동차에서 나온 세피아였다. 예나와 형진이, 창일이와 정혜, 한성이와 진이, 엄마 셋, 그리고 예나 아버지가 운전을 했다. 그러니까 이 차에 총 10명이 타고 간 것이다. 숨쉬기조차 힘들었을 테지만 마냥 좋아했다. 얼마나 떠들썩했을까? 어쩌면 아이들보다 엄마들이 더 설레었을지도 모른다.

아, 이제는 위트 넘치던 예나 아버지의 정담도, 구성진 창일 어머니의 노랫가락도 들을 수가 없다. 무엇이 그리 급했을까. 1999년에 불귀객이 된 예나 아버지나 작년에 갑자기 가신 창일이 어머니는 우리 8가족 모두에게 엄청난 슬픔이었다. 다시 한 번 비명(非命)에 간 두 사람의 생죽음을 추억한다. 둘이서 어깨 겯고 희망가를 부르며 성산동 골목을 누비던 상수 형과, 모임 때마다 바리바리 싸들고 와서 이것저것 챙겨주던 미자 님의 환한 얼굴! 그립다. 삼삼하다. 흐린 하늘 탓인가. 오늘 따라 유난히 찌푸둥하다.

 

▲ 손주, 하니가 맞이한 생애 첫 어린이날 기념사진(2020.5.5.)

 

최고의 효도 선물, 손주

그 아들이 자라 서른여섯이다.

왼손잡이는 양손잡이로 성장하고, ‘애먼 두 살’은 결과적으로 남보다 1년 먼저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염려하던 설소대는 발음 장애나 부정교합 없이 깔끔하게 자랐다. 언젠가 조카가 말했다.

“한성이랑 진이는 유전공학이 아니라 식품공학의 성공 사례야.”

키 작은 아비어미의 한을 불식시키기라도 하듯 아들은 180cm, 딸은 167cm로 둘 다 훤칠하다. 며느리 뱃속에는 15주째 떵이(☜복덩이)가 자라고, 딸이 먼저 결혼해서 태어난 지 130일 된 하니(☜한이)도 있다.

아들딸이 주는 최고의 효도는 누가 뭐래도 ‘손주’다. 아닌 말로 아내는 깨방정이 너무 심하다. 눈 한 번 마주치기 위해 말도 못하는 손주 앞에서 갖은 아양을 떠는 걸 보면 말이다. 어쩌다가 녀석이 한 번 웃어주면 이 세상 다 차지한 표정이다. 깊은 잠을 자지 못한 탓이기도 하지만 하니가 뒤척이는 소리에도 벌떡 일어난다. 아무리 뻗치고 노골노골해도 아내는 천상 친정엄마요 하니 하미(☜할머니)다.오늘이 어린이날이다.

한동안 잊고 지내던 어린이날을 손주들이 되찾아 준 셈이다. 옛날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나저나 저 놈들이 언제 커서 꽃마차를 태워줄 수 있으려나. 지 아비어미 태워주던 아빠말이 기꺼이 하삐말(☜할아버지)이 되고 싶은데…….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박춘근 주주통신원  keun72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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