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당(87, 안남면 청정리)씨

이번에 만난 사람은 안남면 청정리에 사는 정찬당 씨(87)입니다. 인터뷰 초반 10분 동안 정 씨는 "특별히 할 말이 없다"며 좀처럼 말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인생의 어느 한 구비에 이르자 할 말이 없다던 그가 폭포수처럼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보잘 것 없는 우리 인생 이야기 들어서 뭐 하냐"며 멀찍이 떨어져 앉아 있던 아내 박유순 씨(85)까지 합세했습니다. 가슴속 깊이 묻어 두었던 이야기를 털어놓은 노부부가 불편한 몸을 이끌고 배웅을 나왔습니다. "비록 이문은 남기지 못했지만 인심은 얻었으니 그래도 잘 산 인생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못 산 인생, 보잘 것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결코 잊을 수 없는 곡진한 순간, 빛나는 순간이 있습니다. 앞으로도 은빛자서전은 민초들의 가슴에 묻혀 있던 그 순간을 기록으로 남길 것입니다. 장남 원기 씨(63)는 가족 카톡방에 인터뷰 소식을 올려서 감사편지를 써보도록 권유해 보겠다고 약속했고, 그 공약을 지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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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 중 공군 지원병 입대해 운전 배워

나는 1933년 옥천군 안남면 화학리에서 태어났다.

하동 정씨 세거지(世居地)인 안남면 도농리에서 화학리로 분가해 나온 아버지(정경채)와 어머니(김인환)는 슬하에 7남매를 두셨다. 나는 농사꾼 집안의 칠남매 중 넷째이자 삼남으로 태어났다. 내 위로 한 분의 누나와 두 분의 형이 있었다.

안남초등학교 5학년 재학 중에 해방을 맞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과정인 '성남학관'에 다니기 위하여 대전에서 하숙을 시작했다. 하지만 2년 만에 학교가 문을 닫는 바람에 고향으로 다시 돌아와야 했다.

열여덟 살이 되던 해에 6.25전쟁이 터졌다. 우리 동네까지 울려 퍼지는 요란한 대포 소리가 전쟁을 실감케 했다. 이듬해인가 그 다음해인가 8월 20일 공군에 지원병으로 입대했다. 입대 연도는 확실히 기억나지 않지만 날짜는 정확히 기억한다.

나는 대전 유성에 있는 항공병 학교에서 훈련을 받았고, 대구 칠성동 공군본부 운수학교로 배치되었다. 운수학교는 운전병을 양성하는 기관이지만 당시만 해도 여건이 열악했다. 운전을 배워야 하는 병사는 약 30명이나 되었지만 연습에 활용할 자동차는 단 한 대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한 사람이 직접 운전대를 잡고 훈련받을 수 있는 시간이 하루 5분에 불과했다.

그렇게 교육을 받고 나는 강릉에 위치한 공군 K18 전투기 비행장의 군용차 운전요원으로 배속되었다. 얼마 후에 내 계급은 일등하사가 되었다.

▲ 정찬당, 박유순씨 부부.

 

■ 첫날밤만 치르고 신부 남겨둔 채 귀대

이곳에서 근무하는 동안 매우 보람 있는 임무 하나를 수행한 것을 아직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지금부터 여러분은 항공유 드럼통을 주문진항에서 비행장까지 수송해야 한다."

지휘관이 긴장된 목소리로 명령했다. 송유관이 없었던 시절이었다. 항공유를 트럭으로 직접 나른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더욱이 당시는 전시 상황이었다. 나를 포함해 약 20명의 운전병이 군용 트럭을 몰고 수송 작전에 참여했다.

휴전협정이 진행되는 동안 강릉 비행장 정문 앞은 시위대에 점령당했다. 정전(停戰)에 반대하는 시위였는데, 당시 그들이 외쳤던 구호 중에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 "체코는 물러가라"였다. 휴전협정이 체결되면서 스위스, 스웨덴,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로 구성된 중립국감시위원단이 설치되었는데, 아마도 이것과 무관치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휴접협정이 체결되었다. 이번에는 공군 비행장이 강릉에서 수원으로 이전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시위대가 다시 비행장 정문 앞으로 몰려와 "수원으로의 부대이전을 반대한다"는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결국 공군 부대는 수원으로 이전되었다.

이 무렵 나는 휴가를 나갔다가 장가를 갔다. 청산면 하서리에서 시집온 신부 박유순은 5남매의 장녀로 나보다 두 살 어렸다. 신부 옆 동네서 살다가 우리 동네로 시집온 집안 언니가 "화학리에 괜찮은 남자가 있다"며 중매를 섰다고 한다. 첫날밤만 치르고 신부를 고향에 남겨둔 채 부대로 복귀했다. 당시만 해도 군인 월급이 너무 적어 부대 주변 마을로 신부를 데려와 신혼살림을 꾸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라 그랬는지 군인들은 휴가를 마음대로 나가지 못했다. 고작 1년에 한 번 정도 기회가 주어졌을 뿐이다. 그래서 아내는 2년 가까이 잉태하지 못하고 시댁에서 오로지 밥을 하고 밭을 매며 지내야만 했다.

어렵게 휴가를 받아 다시 고향에 갔을 때의 일이다. 이산가족 상봉하듯 아내와 꿈같은 시간을 보내고 귀대를 서두르던 나에게 한참 나이가 많은 누나가 다짜고짜 말했다.

"찬당아, 이번에는 네 아내 꼭 데리고 가거라."

펄쩍 뛰었지만 거스를 수 없을 만큼 누나의 의지는 강력했다. 이불 하나 달랑 둘러매고 아내와 함께 학촌 고개를 넘어 버스가 다니는 인포리까지 걸어갔다. 나는 거기서 아내를 친정으로 보내고 혼자 귀대할 생각이었다.

▲ 정찬당씨의 6.25 참전유공자회 모자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요

"처가에 가 있으면 꼭 데리러 올게."

"나는 절대 혼자 친정으로 가지 않겠어요."

"당장 묵을 방 하나 없는 처지인데, 나와 같이 가면 고생만 할 거야."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요. 우리는 부부잖아요."

도저히 아내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옥천역까지 버스를 타고 나가서 완행열차 표를 샀다. 수원역에서 내려 부대로 가는 길이 그렇게 막막할 수 없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평소 군대에서 알고 지내던 군무원을 찾아갔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어서 와요. 아주 잘 왔어요."

군무원의 부인이 내 뒤에서 고개를 푹 숙인 채 주눅이 들어 있던 아내의 손을 덥석 잡아주며 했던 말이다. 나보다 열다섯 정도 나이가 많은 군무원을 삼촌처럼 따랐는데, 그의 부인이 아팠을 때 내가 의무대에 가서 약을 챙겨다 준 적이 있었다. 정작 나는 잊고 있었건만 부부는 그 은혜를 갚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부터 군무원 부부는 우리 부부의 후견인이 되어주었다. 당장 동네를 수소문해 우리 부부가 살 방을 구해주었고, 내무반장이라 영내에서 머물러야 하는 나 대신에 아내를 돌봐주었다. 내 처지에선 언감생심이었던 군인가족 생활이 그렇게 예상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시작되었다.

부대 인근 마을에는 열다섯 쌍의 군인가족 부부가 살고 있었다. 당시 직업군인 월급은 쥐꼬리에 비유될 만큼 적었다. 우리끼리 모이면 "술 한 잔 마시고 빵 두어 개 사 먹으면 끝"이라는 자조 섞인 말을 자주 나눴을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무엇보다 먹고사는 것이 시급한 과제였다. 비행장 활주로 끝과 논 사이에 둠벙이 있었는데, 거기에 게가 많이 살았다. 그 게를 주워다 솥에 넣어 쪄 먹곤 했다.

우리 가족은 고향에서 어머니가 각종 양념과 나물 등을 가져다준 덕분에 조금이나마 배고픔을 견딜 수 있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도 삶의 기쁨과 보람은 있었다. 1957년 장남 원기가 태어난 것이다. 아내가 원기를 임신하고 있을 때 군부대 체육대회가 열렸다. 영내로 초대된 가족들에게 비행기를 태워주는 행사가 있었는데, 임신한 아내는 비행기 타는 것을 포기해야 했다.

▲ 정찬당씨가 집 마루에 앉아 잠시 포즈를 취했다.

 

■ 적당히 상대 속일 줄 알아야 했던 시절

1950년대 후반 직업군인 생활은 정말이지 열악했다. 한때 "소령 중령 대령은 짚차 도둑놈/ 소위 중위 대위는 권총 도둑놈/ 하사 중사 상사는 부식 도둑놈/ 불쌍하다 김 일병은 건빵 도둑놈"이라는 노래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군 내부의 부패와 비리가 심각했음을 짐작케 하는 이 노래는 사실 군인의 열악한 처우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내 주변에도 담요나 연료를 빼돌려 술값을 마련하는 관행이 전혀 없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었지만 개인적으로 원칙을 지키려 노력했다. 예컨대 군용 담요를 구해 달라는 사람이 있으면 직접 사서 주는 것이 내가 원칙을 지키기 위하여 선택한 방식이었다. 사람들은 그런 나를 두고 "너무 고지식하다"고 수군거렸다. 군대에서 적응하며 살기가 어렵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던 것이 이 무렵부터였다.

결국 나는 김포 부대를 마지막으로 군대를 떠났다. 당시 계급이 일등중사였다. 미군부대 군무원이 되면 먹고 살만 하다는 말만 듣고 아내와 함께 인천으로 갔다. 다음날부터 매일 아침 미군부대 정문 앞으로 출근했다. 부대 안에 일이 생기면 즉석에서 사람을 구하기 때문에 무작정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기다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나에게까지 기회가 오지 않았다. 지쳐갈 무렵 아버지가 오셔서 설득하는 바람에 못이기는 척하고 귀향했다.

고향으로 돌아와 처음 시작한 것은 운수업이었다. 운전면허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안남면에 몇 명 없던 시절에 개인 용달차를 가지고 농산물 등 각종 물건을 날랐다. 하지만 장사는 내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았다. 물건을 받을 때는 비용을 낮게 주고, 물건을 넘길 때는 높게 받아야 했다. 그렇게 이문을 남기려면 적당히 상대를 속일 줄도 알아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할 줄 몰랐다. 먼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보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무료로 태워주곤 했다. 덕분에 '이문'은 남기지 못했지만 '인심'은 얻었다.

뒤늦게 농사꾼이 되었기에 모든 것이 서툴렀다. 비탈길에 세워둔 트랙터가 나를 덮치는 바람에 죽다가 살아나기도 했다. 그때의 후유증으로 지금도 왼쪽다리를 쓰지 못한다. 결국 장남이 하던 일을 정리하고 나를 도와 농사를 짓고 있다. 가난한 부모를 만나서 고등학교도 다니지 못한 장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학교에 다닐 때 자식들에게 벤또(도시락)도 제대로 싸주지 못했던 기억을 떠올리면 지금도 눈물이 쏟아진다.

 

팔자가 드세어 가난을 지고 다녔지만

"우리 부부의 인생을 되돌아보면 팔자가 드세어 가난을 지고 다녔다. 하지만 대근했어도 재미는 있었던 것 같다. 모든 것이 부족했고, 하는 일마다 서툴렀다. 하지만 오히려 걱정이나 근심은 없었던 것 같다. 그래도 이만하면 잘 살아온 것 아닌가."

아내가 가끔 하는 말이다('대근하다'는 힘들다는 뜻의 충청도 사투리다). 남은 소원이 있다면 손주며느리를 보는 것이다. 손녀사위는 넷이나 봤는데, 아직 손주며느리가 없어서 그렇다.

장남 원기(1남1녀), 차남 윤기(1남1녀), 삼남 훈기(3녀), 사남 정기(2남1녀), 오남 헌기(2남), 장녀 재임(1남)이 모두 13명(7남6녀)의 손주를 낳아주었다. 자식들이 형제간에, 부부간에 우애를 지키고 살기를 바란다. 손주들도 과욕을 부리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해코지하지 않고, 무엇보다 인사성이 밝은 사람으로 살았으면 좋겠다.

 

영원히 기억하고 사랑하겠습니다

큰아들 가족이 보내온 감사편지

[큰아들] 저를 낳아 주시고, 길러 주시고, 가르쳐 주심으로써 인생의 넓은 길을 열어주신 부모님 감사합니다. 시대의 풍파가 거세고 세상의 산맥이 험준할 때에도 6남매와 손주들을 꼭 끌어안고 넘어질라 쓰러질라 버티면서도 끝끝내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지요. 감사하고 존경합니다. 지나온 세월 돌아보면 잘못한 것들만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며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남은 인생 부디 건강하고 명랑하게 보내시길 기원합니다. 더 오래 사셔서 자식과 손주들이 와서 쉴 수 있는 거목이 되어주세요. 우리 모두 아버지와 어머니를 영원히 기억하고 사랑하겠습니다.

[큰며느리] 제가 결혼하며 어머님, 아버님과 인연을 맺은 것이 벌써 36년이 되었네요. 시부모님은 저랑 인연이 깊었지요. 시아버님과 친정아버님이 같은 학교 동창이었고, 시어머님과 친정엄마도 같은 학교 동창이었지요. 그래서 어머님과 아버님이 저에겐 꼭 친정부모님 같았어요. 지금까지 며느리를 딸 같이 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세월이 흘러 젊었던 부모님이 늙어가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프네요. 서로 사랑하고 아끼면서 살아가시는 어머님과 아버님에게 힘찬 응원의 박수를 보냅니다. 건강하세요. 사랑합니다.

[큰손자]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저에겐 특별한 존재입니다. 초등학교라 불리기 전인 국민학교 1학년 때부터 3학년이 될 때까지 부모님과 떨어져 두 분과 함께 지냈기 때문입니다. 학교 마치고 돌아와 할아버지가 만들어주신 팽이를 가지고 놀고, 딸기밭에 가서 딸기를 따먹던 기억들이 납니다. 좋은 것, 맛있는 것 있으면 손주부터 먼저 챙겨주셨지요. 시간이 많이 흘러 자주 찾아뵙지도, 전화도 드리지 못하지만 통화할 때면 할머니는 늘 손주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하셨지요. 오래오래 행복하고 건강하시길 기도합니다.

[큰손녀] 할아버지는 큰손녀를 유난히 예뻐해 주셨지요. 증조모의 큰손자 사랑이 있었다면 할아버지의 큰손녀 사랑도 결코 뒤지지 않으셨어요. 부모님과 떨어져 할머니, 할아버지와 살았던 때가 그립습니다. 복숭아, 딸기, 자두 등 먹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거 다 받아주셨던 시간들이 생각납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부모님과 같이 살게 되면서 시골집을 떠나던 날 저는 엉엉 울었지요. 주말마다 시골에 가자고 했고, 돌아오는 차에서 또 울곤 했지요. 그랬던 손녀가 이제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아서 살고 있네요.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찾아뵈면 항상 반겨주시고, 여전히 따뜻한 마음 가득 담고 돌아올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오래오래 우리 곁에, 제 마음속에 항상 계셔주시길 기도합니다. 건강하세요. 사랑합니다. 할아버지♡

 

▲ 자녀들이 보낸 카네이션 꽃다발이 방 한편을 장식하고 있다

 

글 정지환 객원기자·사진 박누리 기자

[편집자주] 정지환 기자는 1993년부터 월간 말, 오마이뉴스 등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안티조선 전문기자’라는 애칭을 얻는 등 우리 사회에 숱한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논쟁적 기사를 남겼다. 2004년에는 입법전문지 '여의도통신' 창간을 주도하기도 했다. 2010년 사회적 좌절을 맛보고 ‘감사’를 만나면서 기업, 학교, 군대, 지자체 등에서 1000회 넘게 '감사' 강연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1인기업 감사경영연구소 소장과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로 일하고 있다. ‘내 인생을 바꾸는 감사 레시피’, ‘30초 감사’, ‘감사 365’ 등 10여 권의 저서가 있다.

* 이 글은 옥천신문(http://www.okinews.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정지환 옥천신문 객원기자  lowsaeja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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