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릴 게 없다고 했다. 산 속의 장어란다. 아는 사람만 안다고 했다. 미국 동남아 아프리카 할 것 없이 공중감자(air potato)라고 해서 즐겨먹는 특용작물이란다. 갈아 먹고 쪄 먹고 부쳐 먹고 이파리까지 무쳐먹는다고 했다. 위장 간장 신장 심장 다 좋아지고 다이어트 혈액순환 원기회복 골다공증까지 한방에 해결된다고 했다.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물어물어 파주까지 내달렸다. 20주나 샀다. 주당 4천 원씩이라는데 구할 수 있어 다행이라 여기고 깎을 생각도 못했다. 농장주가 일러준 대로 퇴비 듬뿍 섞고 재식 간격 1미터씩 벌려 정성껏 심었다.

아니나 다를까?
꼴에 군밤 사 먹겠다고 덤빈 내가 잘못이지
오월에 심었는데 6월 7월 지나도록 여간 신통찮다.
농장주에게 못된 종자 탓이라고 삿대질하고
밤낮없이 쥔장 닮아 되게 더디다고 푸념했다.

그런데 웬걸
한여름 지나고 나니
어느 날 갑자기 넓적한 이파리 치렁치렁 덕대 가득 덩굴이 하늘을 휘감는다.
제법 그늘까지 진다.
콩알만 한 열매가 여기저기 조랑조랑 정말 많이 달렸다.

옳다구나, 기어이 저놈이 효자 노릇하는구나.
머잖아 콩알이 새알 되고 새알이 계란 되고 계란이 때까우알처럼 겁나게 커지겠지.
한 개만 따서 갈아도 마즙 두세 잔은 나오고 말고.
아들 며느리 딸 사위 덕대 아래 불러 모아 양손 가득 양껏 따오라 하는 거야.

취향대로 우유 두유 요구르트 섞게 하고 마즙을 갈아주면
세상 나와 처음 보는 맛이라
신기(新奇)하고 신기(神奇)하다
절로 감탄사 연발하며 허리 굽혀 감지덕지하겠지.

얼씨구절씨구 세상 참 좋아졌어.
이 나이에 부러울 게 하나 없으니
얘들아, 우린 사사로워도 공평한 거다.
지난여름 내내 태어나지도 않은 손주까지 그려가며 군침부터 흘렸다.

 

한 개라도 건졌으니 오지고 말고

▲ 열매마의 뇌두(蘆頭). 낙타 혹이요 타조 발톱이요 멍게껍질 모양이다. 자세히 보니 모두 17개나 솟아 있다.

그러던 어느 날, 10월 들어 첫서리가 내리더니 하룻밤 새에 한 포기 남지 않고 몽땅 얼어죽었다. 이제 겨우 메추리알만한 아이들이다. 쭈그렁밤탱이들을 거둬들일 때는 꼭 죽은 자식 불알 만지는 기분이었다. 서릿발 같은 매서움 가벼이 여기고, 비오는 날 장독 덮었다고 자랑질이나 하더니… 꼴좋다. 범을 그리려다 개도 그리지 못한 꼴 아니냐. 너 또한 누굴 닮아 헛되고도 보잘것없는 삶이었더냐. 아니지. 한 개는 건졌거든. 봄여름가을 요령 부리지 않고 물주고 퇴비 주고 김매고 덩굴덕대까지 만들어 자그마치 다섯 평에 스무 포기 심어서 딱 한 개 건졌다! 주먹만 하니 그래도 속이 좀 풀린다. 다시 보니 참말로 오지게 생겼다. 덩실덩실 널로 하여 한시름 다 잊으니 차라리 고맙기 그지없다.

▲ 자랑삼아 피아노 위에 올려둔 열매마. 물 한 모금 준 적 없는데 용케도 42cm까지 싹이 나왔다.

9 x 6 x 2.5 cm 크기의 대형 열매마!
언감생심 어찌 먹을 수 있을까.
차마 건드리지 못하고 자랑삼아 피아노 위에 올려놓았는데
오늘 보니 싹이 무려 42cm까지 올라왔다.
이 험한 세상 잘못 만난 쥔장을 한(恨)하는가?
연둣빛 입술 크게 벌리고 마치 코브라처럼 매섭게 쏘아본다.

사방팔방 경계하듯 두리번두리번
아무려면 나온 삶 쉬이 휘어질까마는
요령 없는 철부지가 두 번 다시 널 냅두지 않고 말고
입하(立夏) 지나 낼모레가 소만(小滿)인데
비온 뒤끝이라 그런지 아직도 제법 쌀쌀하다.
하느작거리다가 어느 놈 발길에 허리 부러질라
답답해도 나랑 같이 집안에서 며칠 더 지내다가 양지 바른 밭뙤기에 심어 주마.

▲ 겨울 내내 골방에서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도 살아 있었다니 경이롭다. 아가리 크게 벌리고 혓바닥 날름거리며 매섭게 노려보는 듯하다.
▲ 싹의 길이가 42cm. 어제보다 2cm가 더 자랐다. 오늘은 물도 뿌려주고 밤에는 불빛 없는 장농 밑에 밀어 넣었다.

 편집 : 박효삼 객원편집위원

 

 

박춘근 주주통신원  keun72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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