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민주화 운동의 악몽과 희망

전종실 주주통신원l승인2020.05.17l수정2020.05.18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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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 광주민주화운동 결의대회에 참가한 광주시민(캡처)

                      

▲ 5.18 광주민주화운동 광주시민횃불대행진(캡처)

5월 18일은 ⌜5·18민주화운동 기념일⌟이다. 해마다 이때가 되면 당시 필자 가족이 겪었던 피해로 놀란 가슴이 두근거려온다. 이러한 일이 벌써 40년째 된다. 아마도 눈을 감기 전에는 잊지 못할 것이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고 전국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10월 27일 지역 계엄령이 선포되었다(제주도 제외). 이어 12월 12일에는 전두환이 군 수뇌부를 장악하였다.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대규모 시위가 있었다. 각 지역 대학생들은 군부 독재정권을 저지하고 민주적인 정권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연일 이어지고 있었다.  5월 17일 전국 계엄령을 선포하고 각 대학교에 군을 투입하여 학생들의 활동을 저지하였다. 이로 인해 전국의 학생운동 세력이 무너진 상황 속에서 유일하게 광주의 학생과 시민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하였다.   
                 

▲ 시민의 참혹한 모습(1) (캡처)

 

▲ 시민의 참혹한 모습(2) (캡처)

             

▲ 시민의 참혹한 모습(3) (캡처)

     
필자는 직장이 광주시내 이기에 광주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막내 동생도 광주 조선대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동생이 매일 시위에 참가하는 것을 보고 설득하여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계신 부모님을 도와주기를 권유한바 이에 응하고 5월 19일 아침식사를 한 뒤 고향으로 간다고 집을 나섰다.

광주에서 일어난 일들이 입소문으로 시골에도 알려졌다. “공수부대가 광주의 학생과 시민을 다 죽인다.” 는 소문이다. 자식들이 광주에 살고 있는 부모의 마음은 청천벽력 같은 소문 이였다. 당시에는 전화사용이 매우 어려웠다. 시골 마을에 겨우 한대의 전화기로 주민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처지였다. 소문에 얼마나 놀랬는지 어머니께서 5월 21일에 전화가 왔다. “별일 없느냐”는 말씀이셨다. 별일 없으니 걱정 하지 마시라고 안심시킨 뒤, “막내 집에 왔지요” 하고 물었다. “안 왔다”  하시는 말씀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니 그제 집에 갔는데요!” 하니까 부모님도 놀라셨다.

필자의 근무지인 학교는 계엄령 선포로 휴교상태이고 언론과 방송은 계엄령 선포로 통제되어 사실을 확인 할 수 없기에, 민주화 운동의 중심지인 전남도청 앞 분수대 광장으로 가서 시위의 상황을 살펴보는 처지였다. 계엄군의 총탄에 맞은 광주시민의 시신을 상무관에 즐비하게 늘어놓은 장면이라든지, 학생과 시민군이 시신을 연거푸 나르는 장면을 똑똑히 보았기에, 머리에 스쳐가는 장면이 있어 행여나 하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집에서 상무관 까지 20여분의 거리인데 어떻게 달려갔는지 모른다. 상무관에 들려 시신을 확인했다. 초등학생 정도의 어린이도 보였다. 초등학생이 무슨 죄가 있다고 이런 짓을 했을까? 나와 같이 시신의 얼굴을 확인하는 분이 한 두 명이 아니고 수십 명이었다. 그때의 심정을 누가 알겠는가? 광주의 시민이 갈망하는 민주화의 희생이다. 광주인은 이런 희생을 당하면서도 굴복하지 않았다. 

▲ 진압군에 살해된 광주시민의 시신 일부(캡처0

막내 동생을 어디에서 찾는단 말인가?, 도청에서 가까운 전남대병원, 조선대병원, 기독교병원을 걸어 다니며 찾아보았으나  헛수고였다. 울분과 허탈한 마음에 지쳐 힘없는 걸음으로 집으로 왔다. 그런데 전화벨이 울렸다. “ 형님 접니다.” 힘없이 지친 목소리였지만 막내 동생의 목소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행방을 모른지 3일만이다. “너 지금 어디냐?” 묻자 송정리라는 것이다. 군부대에서 다행스럽게 풀려나 집에 가는 도중인데 힘이 없어 도저히 걸어 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 거기 있어 내가 가마”. 얼마를 달렸을까 동생을 보는 순간 그 모습이 너무나도 참담해 놀랬다. 머리는 흐트러지고 얼굴은 핏기가 없어 창백하고 눈동자는 빛을 잃어 검은 창이 없고 흰 창 뿐이다. 이렇게라도 살아오게 해 주신 “천지신명이시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를 연거푸 중얼거리며 부축하여 집에 데리고 왔다.

배고파하기에 밥부터 차려주었다. 밥을 씹지를 못한다. 신체구속의 고문으로 이빨이 솟구쳐 아파서 못 씹겠다는 것이다. 빨리 죽을 쑤어 주었다. 시골의 부모에게 전화를 하고 몸조리를 해주었다. 그동안 부모님은 얼마나 놀랬을까?

▲ 5.18 민주화운동 희생자 묘역 (캡처)

막내 동생의 사연은 이러했다. 막내는 시골집에 가기위해 터미널에서 승차권을 구입하고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느닷없이 공수부대원이 다가오더니 진압봉으로 머리를 후려치고 끌고 가서 군용트럭에 태우고 양손을 뒤로 묶은 뒤 무릎을 꿀려 이마를 바닥에 데고 있으라고 했다한다. 무고한 자를 이렇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그 뒤부터는 어디로 끌려가는지를 전혀 몰랐다한다. 한참을 간 뒤 내리라고해서 주위를 둘러보니 군부대로 보였다. 알고 보니 광주 상무대였다. 당시 공수부대는 젊은 사람만보면 무조건 납치 구금하였다.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다행스럽게도 상무대 군인들은 부드럽게 대해주어 놀랜 마음이 조금은 안심됐다고 한다. 그러나 3일간이나 같은 자세를 유지하고 움직이지 못하게 했으니 아무리 젊은이지만 견디어 내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여러분이 상상해 보아도 그 고통을 짐작할 것이다.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압 공수부대의 참혹한 행위에 다시 분개한다. 군인은 명령에 산다고 한다. 이런 행위를 하도록 명령한 자 색출이 40년이 되어도 밝혀지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우리나라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했거늘 이를 위반하는 자는 범법자다. 법을 위반하는 자는 마땅히 처벌을 받아야한다.

후일 안 이야기이지만 총살된 자, 실종된 자, 부상을 당한 자, 구금된 자를 합쳐 7,200여 명이라는(2001년 12월 18일자 확인) 피해자수를 보았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해야 하는지? 누구를 위한 희생인지? 발포 명령자는 누구인지? 발포명령자를 색출해 내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지? 그들의 처벌은 어디까지 해야 하는지? 지금도 이 엄청난 사실을 폄훼하는 자의 심보는 무엇을 노리는지? 불의의 권세를 누리고 국민을 탄압하는 자들과 언제까지 싸워야 할런지? 온 국민이 평화로운 민주화로 가는 길이 이렇게도 험난한지? 진통과 고통 끝에 얻은 산모의 기쁨처럼 “우리나라의 화창한 민주의 봄은 머지않아 오겠지!” 라고 믿어본다.

5·18광주민주화 운동 희생자와 실종자, 그리고 부상자와 억울한 옥살이를 하신 분들에 비하면 우리가족의 억울함이나 분노를 말하기가 하찮은 정도의 일이지만, 정권의 야욕에서 범죄 사실이 없는 무고한 젊은이들을 이토록 난폭한 진압으로 정권 유지의 수단으로 삼았다는 사실을 용서할 수가 없다. 후일 막내 동생은 5·18 광주 민주화운동 희생자로 기록되어있어 위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다.

5·18희생자 모두의 원한을 하루속히 풀어주고 민주 열사로 추앙 받는 그날이 오기를 바란다.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불의와 싸우다 억울하게 목숨을 잃거나 고통을 받은 자 모두가 조국의 민주화가 만개한 꽃을 피울 때, 그들은 자기의 희생이 억울하다는 생각을 지우고 자랑스러워 미소를 지을 것이다.

이들이 추구하는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은 이어지고 있다. 2016년 10월 29일 부터 연일 촛불 집회가 열려 박근혜 대통령 퇴진 요구가 이어졌다. 2016년 12월 4일에는 언론 집계로 보면 전국 232만 명이 촛불을 켜고 민주화 대열에 참가하였다한다. 국민의 뜻과 헌법에 따라 박근혜대통령은 파면되지 않았는가? 그러나 아직도 민주화의 종착지에 도달하지 못했다 본다.

그러기에 “산자들이여! 완벽한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화려한 꽃을 피워 보자.”라고 제언한다. 우리나라가 부강(富强)하고 민주적 정치로 평화로운 동방의 예의지국이 되어 세계가 우러러보는 선진국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 5.18 민주화운동희생자가족을 위로하는 문재인대통령(캡처)

                             임을 위한 행진곡
                                  가사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 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 5.18 민주화운동정신조각상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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