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자서전 - 인생은 아름다워(31)] 인생은 아름다워

서른 한번째 주인공 연기섭(86, 옥천읍 장야리)씨 정지환 옥천신문l승인2020.05.21l수정2020.05.21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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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한번째 주인공 연기섭(86, 옥천읍 장야리)씨
공부 잘 하는 자녀를 원한다면…"공부하는 습관을 물려주세요"

손바닥 하나에 몇 개의 영어 단어를 적을 수 있을까요? 이번에 만난 은빛자서전 주인공 연기섭 씨(86)는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 걸어서 등·하교하며 영어 교과서를 소리 내어 읽었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당에서 1년 동안 한문을 배우다 입학한 중학교는 5~6km 거리에 떨어져 있었지요. 교과서를 읽지 않을 때는 손바닥에 깨알같이 적은 영어 단어를 외웠습니다. 손가락에는 짧은 단어 10개씩, 손바닥에는 긴 단어 30개를 적었습니다. 영어 공부할 책은 교과서가 유일했고 종이가 귀하던 시절. 손바닥을 80개의 단어를 적는 암기장으로 활용했지요. 그는 지금도 하루 2시간씩 독서 한다고 합니다. 공부를 좋아하는 그의 유전자 덕분이었을까요. 5남매 자식은 가난했지만 공부하기를 좋아해 모두 대학을 다녔고, 나중에 대학교 교수, 초등학교 교사, 신문사 기자가 되었습니다. 공부 잘 하는 자녀를 만드는 비결, 부모의 공부하는 습관을 물려주는 것이 아닐까요? 은빛자서전에 연기섭 씨를 추천해주신 옥천군산림조합 권영건 조합장에게 감사드립니다.

▲ 연기섭님.

 

■ 등·하교하며 영어 단어 80개 암기한 비결

나는 1934년 충청북도 괴산군 도안면에서 태어났다.(현재 도안면은 2003년 괴산군에서 분리된 증평군 소속이다.)

아버지(연성희)의 고향은 원래 증평이었다. 가난한 농사꾼 집안의 3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는데, 아들이 없던 도안면 집안 어른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나중에 커서 만난 증평의 큰아버지는 "보리 일곱 말에 동생을 팔아먹었다"며 자책하곤 하셨다.

괴산군 문광면 출신의 어머니(장용금)는 아버지와 결혼해 딸만 내리 여섯을 낳았다. 양자까지 들여서 대(代)를 이어가려던 할머니의 심한 구박을 받았다. 그 와중에 어린 딸이 셋이나 죽었다. 그러다가 막내 아들인 내가 태어났고, 할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열두 살이 되던 해인 1945년 해방을 맞았다. 하지만 나는 해방의 기쁨보다 조실부모(早失父母)의 아픔으로 그해를 기억한다. 부모님은 염병(장질부사)에 걸리는 바람에 목숨을 잃었다. 당시 이 전염병은 마을 사람 10명의 목숨을 앗아갔다고 한다.

도안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다. 당시 나이 예순이었던 10촌 형님(연채진)이 서당 훈장이었다. 1년 후인 1947년 증평중학교에 입학했다. 나는 뒤늦게 시작한 공부에 푹 빠져들었다. 학교는 집에서 5~6km 거리에 떨어져 있었다. 걸어서 등·하교하며 영어 교과서를 소리 내어 읽었다.

교과서를 읽지 않을 때는 손바닥에 깨알같이 적은 영어 단어를 외웠다. 손가락에는 짧은 단어 10개씩, 손바닥에는 긴 단어 30개를 적을 수 있었다. 영어 공부를 할 책은 교과서가 유일했고, 종이가 귀하던 시절이었다. 나는 손바닥을 80개의 단어를 적는 암기장으로 활용했다.

그때 습관이 참으로 무섭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앞에서 말한 대로 나는 바닥이 울퉁불퉁한 신작로를 걸어서 등·하교했다. 그런데 늘 오른손에는 무거운 가방을, 왼손에는 가벼운 책을 들었다. 영어 단어도 항상 왼손에만 적었다. 당연히 오른쪽 어깨가 기우뚱 처질 수밖에 없었다.

"기섭아, 그러다간 나중에 후회한다. 가방과 책을 교대로 들도록 하거라."

증평중 영어 교사였던 집안 형님(연규집)이 자전거를 타고 오다가 내 뒤에서 늘 던졌던 말이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했다. 가방을 왼손에, 책을 오른손에 들자 공부가 잘 되지 않았다. 나는 다시 가방을 오른손에, 책을 왼손에 들었다. 3년 동안 같은 자세로 다니자 결국 오른쪽 어깨가 고장 나고 말았다. 하지만 당시 나에게는 공부가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 변화가 필요했던 나에게 들려온 복음

열일곱 살이 되던 해인 1950년 6.25전쟁이 터졌다. 괴산에 인민군이 들어오자 '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끌려가는 것을 막으려고 할머니가 나를 수수밭에 숨겼다. 그리고 끼니마다 밭으로 밥을 이고 나르셨다. 나중에 전쟁이 끝난 뒤에 중학교 동창회에 나가보니, 실제로 동창 중 절반 가까이가 사망하거나 실종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손자를 숨긴 할머니의 선택은 현명한 것이었다.

'3대 독자'에 대한 할머니의 집착은 유별났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인민군을 대신해 미군이 들어왔다. 어느 날 흑인 병사가 지프차에서 내리더니 몰려드는 아이들에게 껌과 초콜릿을 나눠주었다.

그런 다음 지도 한 장을 꺼내더니 어느 한 지점을 가리켰다. 방향과 거리를 묻는 것 같았다.

대답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흑인 병사가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할 수 없이 내가 나서 중학교 때 외웠던 영어 단어 몇 개와 손짓 발짓까지 다 동원해 설명해주었다.

흑인 병사의 얼굴 표정이 밝아졌다. 그러더니 나에게 직접 안내해 달라며 군용차에 태웠다.

"미군이 기섭이를 지프차에 태우고 사라졌어요."

동네 친구들의 설명을 들은 할머니는 3대 독자를 잃었다며 대성통곡을 하셨다고 한다.

스무 살이 되던 해인 1953년 휴전협정이 맺어졌다. 그제야 할머니는 3대 독자가 죽을 지도 모른다는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해 집안 어른들의 중매로 나보다 한 살 어린 증평 처녀 황춘원과 결혼했다. 하지만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무료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끔찍하게 여겨지기 시작했다.

스물여덟 살이 되던 해인 1961년 체신부에서 전화국을 신설하는 것을 계기로 전국을 순회하며 기술공무원을 선발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무엇인가 변화의 계기가 필요했던 나에겐 복음(福音)과도 같았다.

인민군과 미군에게 끌려가면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던 시절에 대한 악몽 때문이었을까. 사람들은 겁을 내며 쉽사리 공무원 선발에 지원하지 않았다. 할머니도 나에게 절대 지원하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하지만 나는 무료한 시골 생활에서 하루빨리 탈출하고 싶었다.

할머니 몰래 뒤뜰 울타리를 넘었다. 그리고 1차 선발 장소인 도안초등학교까지 달려갔다. 학교 담장을 타고 넘어 들어가며 나는 시험관들을 향해 소리쳤다.

"저를 뽑아주세요!"

1차 선발에 지원한 30명 중에서 7명이 첫 관문을 통과했다. 나도 그 중의 한 명이었다. 2차 선발은 청주시 사직동의 한 공장 마당에서 실시되었다. 할머니 몰래 검정고무신을 신고 청주에 갔다.

이번에는 필기시험을 봤다. 전기와 전화에 대한 상식을 묻는 시험이었는데, 다행히 관심을 갖고 읽었던 책에서 출제되었다. 충청도에 배정된 최종 합격자 2명의 명단에 내 이름이 들어갔다.

 

■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과 도전 의식

나는 천성적으로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강했던 것 같다. 합격자에 대한 교육이 실시될 때도 나는 적극성을 발휘했다.

"중학교 졸업한 사람 있나?"

나는 손을 번쩍 들었다.

"반장 하고 싶은 사람 있나?"

이번에도 손을 번쩍 들었다.

"일본에 견학가고 싶은 사람 있나?"

당연히 이번에도 손을 번쩍 들었다.

하지만 일본 견학은 가고 싶다고 해서 그냥 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정보기관에서 신원 조회를 하는 데만 한 달 이상이 걸렸다. 실제로 신청자의 70%가 탈락되었는데, 가족이나 친척 중에 4.3사건, 여순사건 관련자만 있어도 제외되었다. 운이 좋게도 최종 선발된 7명 명단에 내 이름이 들어갔다.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일본 견학 과정에서 일본과 한국의 전화 기술 수준이 하늘과 땅의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더 배워야 할 것이 많다는 생각이 들어서 1개월 체류 연장을 신청했다. 당연히 불허 조치가 떨어졌지만 오사카영사관 사람들을 설득해 1년 동안 일본에 체류할 수 있었다.

"영어 잘 하는 사람 있나?"

귀국하자 미8군 통신부대 파견근무 지원자를 찾고 있었다. 너무나 당연히 이번에도 나는 손을 번쩍 들었다.

미군들과 함께 전봇대를 세우러 다니다 민원이 발생하면 통역하는 것이 임무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당시 어떻게 그런 무모한 용기를 냈는가 싶기도 하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의 영어 실력은 중학교 3년 동안 암기한 영어 단어가 전부였다.

당시에는 공무원을 선발할 때 영어를 매우 중시했다. 국어와 역사의 비중이 40%였다면 영어의 비중은 60%나 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나마 중학교 시절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둔 것이 큰 도움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미8군 통신부대는 충주의 남한 최대 목화 공장이 있던 자리에 주둔하고 있었기에 생활 터전을 그곳으로 옮겨야 했다. 하지만 타지에서 아내와 아이들은 물론이고 할머니까지 모시고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3년 만에 나는 사표를 냈다.

이후 한국전력에 입사한 나는 화천수력발전소, 괴산수력발전소 등에서 근무했다. 특히 고향에 위치한 괴산수력발전소에 근무하며 비교적 안정적으로 아이들 교육에 신경을 쓰면서 살 수 있었다. 발전소 부근의 초등학교에 다니던 장남 호택은 청주중학교에 5등으로 합격했다.

청주중에 입학한 장남의 교육을 위해 근무지를 한전 청주지사로 바꿨다. 여기에서 4~5년 근무하며 아들의 공부를 뒷바라지했다. 하지만 월급만 가지고는 아들의 대학 진학은 꿈꿀 수도 없었다. 결국 사표를 제출하고 퇴직금을 목돈으로 받았다. 그리고 그것을 고스란히 아내와 5남매에게 전달하고 출가(出家)를 결심했다.

 

■ 조상묘 지키는 산지기가 내 마지막 임무

내가 출가를 결심하게 된 계기는 조상의 단명(短命)이었다. 무엇보다 먼저 부모님이 전염병에 희생되는 바람에 조실부모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 족보를 구해서 뒤져보니 2대조, 3대조, 4대조, 5대조가 하나같이 50세를 넘기지 못하고 타계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한전 청주지사에 근무할 때 지리산에서 활동하는 유명한 풍수가(風水家)를 모셔다가 조상의 산소에 대한 감정을 요청했다. 하지만 그는 단명의 원인에 대한 뚜렷한 설명이나 명쾌한 해법을 내놓지 못했다. 이런 일이 몇 차례 반복되자 내가 스스로 풍수를 연구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직장을 그만두면 곧바로 출가와 입산(入山)을 실행에 옮기겠다고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정식 승려가 된 것은 아니지만 출가 생활 3년이 되던 해인 1984년 본격적인 동양철학 공부를 하기 위해 일본으로 떠났다. 거기서 강제징용자 등 재일교포를 위하여 변론활동을 펼쳐온 모리다 세이치(森田晴一) 변호사를 만났다. 나보다 세 살 연상인 그는 내가 출가한 이유를 듣더니 이렇게 말해주었다.

"당신은 애국자입니다. 자신의 뿌리를 찾겠다는 것은 한국의 뿌리를 찾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세이치 변호사는 그러면서 정식으로 승려가 되어볼 것을 권유했다. 그래서 일본의 불교대학에 입학해 신(信), 행(行), 원(願), 교(敎)를 공부했다. 조상의 단명의 원인과 해법을 찾기 위한 동양철학과 풍수지리 공부도 병행했다.

그렇게 공부를 지속하다가 풍수(風水)의 핵심이 수(水) 즉 물에 있다는 원리를 깨달았다.

그리고 마침내 내가 깨달은 원리에 따라 길지(吉地)를 찾다가 1991년 5대 조의 모든 산소를 옥천군 군서면 오동리로 이장하였다. 옥천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지금까지는 주로 일본에서 생활하며 2개월에 한 번씩 옥천을 찾았다. 그러다가 2018년 영구 귀국해 옥천에 생활 터전까지 마련했다.

장남 호택(3녀), 장녀 호순(2남), 차녀 은순(2남), 삼녀 현순(1녀), 차남 광택(1남)이 모두 9명(5남4녀)의 손주를 낳아주었다. 새로 만난 아내(조예심)와의 사이에서 얻은 삼남 정호는 올해 10월에 결혼한다. 나에게 마지막 임무가 있다면, 후손의 재앙은 막아주고 앞길은 열어주는 조상묘를 지키는 산지기가 되는 것이다.

 

 

글 정지환 객원기자·사진 황민호 기자

[편집자주] 정지환 기자는 1993년부터 월간 말, 오마이뉴스 등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안티조선 전문기자’라는 애칭을 얻는 등 우리 사회에 숱한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논쟁적 기사를 남겼다. 2004년에는 입법전문지 '여의도통신' 창간을 주도하기도 했다. 2010년 사회적 좌절을 맛보고 ‘감사’를 만나면서 기업, 학교, 군대, 지자체 등에서 1000회 넘게 '감사' 강연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1인기업 감사경영연구소 소장과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로 일하고 있다. ‘내 인생을 바꾸는 감사 레시피’, ‘30초 감사’, ‘감사 365’ 등 10여 권의 저서가 있다.

* 이 글은 옥천신문(http://www.okinews.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정지환 옥천신문  lowsaeja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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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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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순계 2020-06-01 10:44:38

    수수밭에 숨기는 할머니 그리고 미군의 안내잡이가 된 것들은 훗날 역사가 정리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냥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옮기면서 기자로서의 고민하는 민족애가 묻어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정지환 선생님의 옥고에 공연히?!신고 |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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