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을 선택한 어떤 하루

이경애 주주통신원l승인2020.05.28l수정2020.05.28 11:19

크게

작게

메일

인쇄

신고

사월의 어느 주말, 함께 활동하는 지인들과 북한산 숨은벽 능선을 올랐다. 왼쪽으로 인수봉, 오른편 위쪽으로 백운대 정상을 바라보며 오르는 암릉은 꽤나 스릴 있는, 제법 난도 높은 코스다.

전날 밤 시답잖은 문제에 심사가 꽂혀 고상고상 잠을 설친 데다 몸살 기운까지 겹쳐 두통에 삭신도 쑤시고... 등산은 아무래도 무리한 행보였다.

그러나 화산과 마그마의 활동이 있었던 태초의 시간, 형언할 수 없는 엄청난 폭발력에 의해 분출된 마그마가 서서히 식고 굳으며 풍화를 거쳐 빚어낸 기암괴석을 대할 때 느끼는 아득한 시공간에 대한 경외감, 거기에 더해 장식으로 펼쳐질 꽃과 풀과 나무들의 향연을 상상하자면 산행은, 뿌리치기 힘든 아니 뿌리치기 싫은 유혹이었다.

당일 아침, 등산을 강행할 것인지 집에서 쉴 것인지 선택의 딜레마에 맞닥뜨렸다. 몸은 휴식이 필요하다는 신호를 곳곳의 통증으로 보내왔으며 머릿속으로는 산행 후 겪게 될 갖가지 후유증이 실감 나게 그려지기도 했다.

이쯤 되면 선택은 자명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갈팡질팡.

“그래 결심했어!”

오래전에 재미있게 보았던 ‘인생극장’이라는 TV프로가 있었다. 인생에서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놓인 주인공이 고심 끝에 향방을 결정하고 주먹을 불끈 쥐며 읊조리던 장면을 얼핏 떠올리며 서둘러 배낭을 챙겼다.

절정의 봄 산을 향한 기대가 몸 상태에 대한 우려에 앞섰다.

곧 체험하게 될 세상 –계곡의 오름길을 따라 길섶에 나지막이 핀 다채로운 꽃들과의 눈 맞춤, 생생한 에너지를 뿜어내는 나무들과 낱낱의 이파리들, 살아있는 음표인 양 하늘을 날아다니며 경쾌하게 지저귀는 새들...-

산의 품에서 산의 속살과 내밀히 교감하며 누릴 오감의 호사(豪奢)에 지레 도취된 결정이었다.

어떤 날, 잠에서 깨자마자 흥얼거리게 되는 곡조가 있다. 노래는 종일 머릿속에서 맴돌다가 의식이 방심한 틈을 타 불쑥 입 밖으로 새어 나오기도 해서 난감한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이와 비슷하게, 아침 잠기운이 채 걷히기도 전 문득 의문부호를 달고 떠올라 생각할 거리를 던져 주는 말들이 있다. 그 말들은 가령, ‘행복’처럼 한 단어의 추상명사 이거나 ‘행복은 무엇인가’처럼 제법 철학적 사유가 요구되는 개념일 때도 있다.

등산을 감행하기로 마음먹은 날 아침의 화두는 ‘선택’이었다.

가느냐 마느냐 망설이느라 빠듯해진 약속 시간, 서둘러 배낭을 챙겨 집을 나섰다. 광역버스로 합정역까지 가서 지하철로 환승, 약속장소인 구파발역으로 가야 했다.

버스에서 내려 총총걸음으로 지하도 계단을 내리닫다가 아차, 마스크를 챙기지 않았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온 나라가 점령군 ‘코로나 19’와 교전중인데 갑옷을 챙기지 않았던 것이다.

지하보도에는, 마치 태어날 때부터 써온 것처럼 자연스럽게 마스크로 얼굴을 반나마 가린 사람들로 가득했고 무리 지어 이동하는 마스크 쓴 사람들의 물결은 공상과학 영화의 한 장면처럼 기이해 보였다.

어쨌든 나도 곧장 마스크 쓴 행인의 배역에 뛰어들어야 했으므로 마스크를 사기 위해 지하철 역사에 있는 편의점을 찾았다. 편의점에는 의외로 다양한 종류의 마스크가 진열되어 있었다. 그중 하나를 고르기 위해서는 색상과 재질, 가격, 품질 거기에 가성비 등등 따지고 비교해야 할 사항이 너무나 많다.

나의 뇌에 과부하가 걸리는 순간이다. 여러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면 어김없이 도지는 결정 장애. 진열된 상품을 하나씩 요모조모 뜯어보고 살펴보고 심지어는 정물 감상하듯 가까이서 보고 물러서서 보고... 그러고도 선뜻 골라잡지 못하는 나.

약속시간이 임박했다. 구파발까지 가려면 또 몇십 분 걸리는데.
아! 몰라... 결국, 쫓기듯 아무렇게나 하나 집어 들고 계산을 치렀다.

그러고 보니 나의 선택상황에서 언제나 작동하는 메커니즘은 ‘떠밀려서’이거나 ‘쫓기듯’이었던 듯. 삶의 수많은 선택상황들이 순간적인 결정을 요구하지만, 결정을 내려야 하는 시간은 무한정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마스크의 포장지를 급히 뜯어서 착용하고 지하철을 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두통과 메스꺼움이 몰려왔다. 마스크에서 나는 역한 냄새 때문이었다.

낭패스럽게도 하필 내가 선택한 검은색 마스크는 방역용으로 인증된 제품도 아닌데다 면제품도 아닌, 화학약품 처리된 합성섬유였었나 보다.

장고(長考)에 악수(惡手).

모든 선택에는 결과에 대한 책임과 후유증이 따른다. 내게 있어 최상의 선택이란, 후회 없는 선택이 아닌 후회를 최소화하는 선택이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창궐에 대처하여 자가 격리되어 지낸 시간은 길고도 지루했으며 꽃피는 봄 사월은 너무나 밝고 따뜻해서 산길은 사람들로 붐볐다.

두 번 거른 월례 산행인데다 날씨조차 좋아서 우리 일행은 한껏 들뜬 기분으로 산을 누비며 봄을 누렸다.

위용으로 압도하는 화강암 벽과 코발트블루 하늘과 휘파람 소리 섞인 바람을 배경으로 인증 샷을 찍고 아늑한 장소를 찾아 도시락을 펼쳤다. 먹을거리를 준비하지 못해 미안해하는 내게 “일 없시요! 이게 싹 다 김밥입네다. 강남 갑에 사는 강남인민이 만든 김밥이야요!” 일행 중 한 명이 자신의 불룩한 배낭을 가리키며 너스레를 떨었다.

강남구 신사동에서 초밥집을 운영하는 친지의 일을 도와주고 일당대신 챙겨 왔다는, 꽤나 많은 양의 김밥과 초밥 주먹밥은 배낭 속에서 서로의 무게에 짓눌려 찌부러지고 우그러졌음에도 본디 모양과 속 재료의 범상치 않음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단무지 시금치 당근 등 고정불변의 김밥재료 삼총사가 안 들어가고도 컬러풀 형형색색의 김밥과 초밥.

찬란한 그것들은 우리의 시각과 미각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그리하여 꽤 긴 시간 우리는 입안의 행복을 만끽하는데 몰두했다.

“에이, 밥맛 떨어져...” 입안에 밥을 잔뜩 욱여넣은 채 누군가 중얼거렸다. 산상의 성찬을 마련한 당사자였다. 이건 웬 말? 기껏 잘 먹고서?

이유인즉, 우리의 미각을 황홀하게 사로잡은 김초밥들을 직접 만들었으며 강남구 신사동에 살고 있고 그의 친척이기도 한 그 사람이 이번 총선에서 태영호에게 투표했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자 새삼 밥맛이 떨어진다는 거였다. 내가 보기엔 먹을 만큼 충분히 먹어서 밥맛이 떨어진 것 같았지만.

강남 갑 김밥에 대한 식후감(喰後感)에 이어 그즈음에 치러진 총선이 화제에 올랐다. 북한 외교관 출신의, 망명동기도 석연치 않은 태영호라는 인물을 공천한 후안무치하고 위선적인 정당과 그를 국회의원으로 뽑은 강남구민들의 비지성(非知性)적 비이성(非理性)적 선택에 대해 입에 든 밥알을 튀겨가며 성토했다.

보통의 탈북민도 중국을 통해 북한의 친인척들과 소식을 주고받음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런데 30여 년 가까이 북한의 고위공무원이었으며 형제와 친척들이 여전히 북한 최고위층에 있고 마음먹으면 언제 어떤 식으로든 그들과 소통할 수 있는 태영호에게 국가기밀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국회의원 자격이 주어졌다는 사실은 충격이다.

국가의 안보에 절대 민감한(!) 국정원과 미래통합당은 어떤 근거로 탈북 5년 차 태영호를 그토록 신뢰하는가? 지극히 상식적 수준의 안보관을 지닌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 불가이다.

산행은 성공적이었고 예상외로 몸 상태도 괜찮았다.

하산 후 치를 뒤풀이의 다양한 코스를 두고 갑론을박 끝에 치맥(치킨+맥주)이라는 정통코스(?)를 선택했다. 선택의 여지가 많으면 선택할 때 스트레스를 받지만 선택의 여지가 많을수록 자유를 느끼는 측면도 있다.

애초에 무리한 선택으로 시작했지만 충분히 좋은 하루였다.

우리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시공간에 내던져지면서 삶을 시작한다.

인생은, 태어나고 죽는 것을 빼고는 끊임없는 선택의 여정이다.

그 여정 속에서 반드시 한 가지만 선택해야 하는 인간의 실존에 대해 사르트르는 “삶은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라고 정의했다.

삶과 죽음 가운데 길목에서 한 번쯤은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기’를 선택하는 일탈도 경험해 볼 일이다.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이경애 주주통신원  iemma1941@naver.com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경애 주주통신원의 다른기사 보기

인기기사

기사 댓글 1
전체보기
  • 김두루한 2020-05-28 12:22:35

    '나'도 비슷했던 적이 있어 재밌게 읽었습니다~

    "삶은 태어남과 죽음 사이의 가림"
    ~“삶은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라고 정의했다.

    삶은 가림인 듯 합니다 떠밀리거나 쫓기지 않으려면 미리 가려둠도 좋겠고요~신고 | 삭제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 마포구 효창목길 6 (공덕동 116-25) 한겨레신문사 주주커뮤니케이션팀  |  전화 : 02)710-0124  |  등록일 : 2015년 1월 15일  |  발행일자 : 2015년 1월 1일
    등록번호 : 서울 아03523  |  발행인 : 김현대  |  편집인 : 이상준  |  에디터 : 이동구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상준
    편집위원 : 김경애, 김국화, 김동호, 김미경,김태평, 서기철, 심창식, 정혁준, 허익배   |  객원편집위원 : 김혜성, 박춘근, 박효삼, 안지애, 양성숙, 최성주, 하성환
    Copyright © 2020 한겨레:온.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