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19'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충실히 따르기 위해 사람 없는 산을 찾아다닌다. 경기 북부 양주, 연천 등지에는 유명하지 않은 작은 산들이 꽤 있다. 얼마 전 양주에 있는 천보산을 다녀왔다. 해발 423m이니 오후 느지막이 산행을 시작해도 2시간이면 가뿐하게 올라갔다 내려올 수 있는 산이다.
그런데 이 산이 참 특이하다. 아래 지도에서처럼 높지는 않은데 길어, 양주 동쪽을 병풍같이 둘러싸고 있는 산이다. 남쪽으로는 의정부, 동쪽으로는 포천, 북쪽으로는 동두천까지 접경을 이루고 있으니 얼마나 긴 산인가? 능선 종주 코스가 19km를 넘다보니 10시간 이상 걸린다. 며칠을 두고 조금씩 타보는 것이 번거로울 수도 있지만 대신 여러 곳에서 산을 향해 올랐다가 능선을 탄 후 다른 지점으로 내려올 수 있다. 다양한 코스라 재미있다.
양주에는 고려 때 3대 사찰이었고, 조선 전기 왕실사찰인 '회암사'라는 큰 절이 있었다. 태조 이성계의 또 다른 왕궁이라 불릴 정도로 규모와 위상 면에서 최고의 절이었다. 조선 건국에 공이 큰 무학대사도 머물렀기에 왕실 후원도 많이 받았다. 16세기 중반까지 전국 제일 사찰로 성장하지만 16세기 말 돌연히 사라지고 말았다. 불교를 억압한 유생들의 방화로 폐허가 되었다는 것이 가장 타당성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설이다.
사라지고 없는 회암사를 찾기 위해 1997년부터 2015년까지 12차에 걸쳐 조사가 이루어졌다. 귀해서 왕궁에 올리기도 어려웠다는 청동기와, 조선 왕실에서나 사용하던 용문기와 봉황문기, 왕실가마(관요)에서 제작된 도자기 등 귀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고, 사찰 터가 발굴되었다. 그 유물들은 회암사지박물관에 전시되어 있고 터는 '회암사지'로 보호받고 있다.
회암사지 위에는 작은 절이 하나 있다. 불탄 회암사가 아쉬웠는지 1828년 조정에서 회암사 옛터 위에 작은 절을 짓고 회암사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회암사에는 꽃 모양이 부처님 머리모양을 닮았다 하여 이름 지어진 불두화가 풍성하게 피어있다. 열매가 딸기처럼 생겨서 산의 딸기나무라 부르는 산딸나무 꽃도 소담스럽게 피었다.
회암사를 거쳐 800m 올라가면 천보산(회암동 423m) 정상이 나온다. 산이 길다보니 천보산 정상은 3곳이나 된다. 마전동 정상은 337m, 율전동 정상은 348m다.
경기 북부에는 능선이 바위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는 산들이 많다. 불곡산도 그렇고 감악산도 그렇다. 그러다 보니 위와 같이 '108바위'도 만날 수 있다. 왜 '108바위'라 이름 붙었을까? 저 봉우리 위에서부터 바위 108개가 굴러 떨어졌을까? 아니면 '108바위'에서 시원스럽게 보이는 회암사를 향해 밤이면 바위들이 일어나 108배를 했다 해서 이름 붙었을까?
정상에서 바라보는 동남쪽을 향해 뻗은 능선이 참으로 길다. 천보산맥이라 부를 만하다. 그 긴 코스 중간 능선 아래 자이아파트가 1단지에서 5단지까지 있다. 이사 가고 싶은 생각이 드는 아파트다.
5월 말이 되면 산은 땅비싸리 계절이다. 5월 중순 경 팥배나무, 노린재나무, 들꿩나무, 떼죽나무 쪽동백나무 등 흰꽃 잔치가 끝나면, 땅비싸리는 땅을 향해 살포시 고개를 숙이면서 서서히 연분홍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친구 같은 조록싸리도 6월이면 꽃을 피운다. 비록 키 차이로 서로 만날 순 없다 해도... 위아래서 반가워하고 있을 거다.
산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해가 넘어갔다. 멀리 도봉산 능선에 구름이 걸려 아련하게 보인다.
차창 옆으로 보이는 구름이 심상치 않다. 막 넘어간 해님이 아쉬운지 긴 날개를 펴고, 가는 해를 좇아 잡아올 것만 같은 기세다.
점점 하늘은 빛을 거두고 어둠과의 동거를 위해 화려한 쇼를 준비한다.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하고 다채로운 색으로 밤 잔치가 시작된다. 이 시간 이 장소 아니면 어디서 만날 수 있으랴? 숨이 멎는 오늘의 하이라이트다.
편집 : 박효삼 객원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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