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당(國師堂) 터
팔각정 옆에 ‘국사당 터(國師堂址)’ 표지석이 있다. 국사당의 옛 이름은 목멱신사(木覓神祠)다. 조선 태조 4년(1395) 12월 남산 산신령을 목멱대왕으로 봉작하고, 목멱신사를 세워 국사당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목멱대왕이라는 산신령에게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신사였다. 1925년 일제가 남산에 조선 신궁을 세우면서 국사당을 인왕산 선바위 근처로 옮겨 현재에 이르고 있다. 완전히 없애지 않은 것이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까?

▲ 국사당 터 표지석

남산 봉수대
조선 시대 경봉수(京烽燧)라고 했던 남산의 봉수대는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3호다. 처음 남산 봉수대를 설치한 연대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태종 6년(1406)이 정설이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1895년(고종 32년) 갑오경장 때까지 489년간 존속한 게 된다. 1993년에 새롭게 복원된 봉수대는 남산 정상에 있다. 남산에 모두 5개의 봉수대가 있었는데, 복원된 봉수대 자리는 평안도 방면의 봉수를 받았던 제3봉수대에 해당한다. 제1봉수대는 함경도 경흥에서 아차산(봉화산)으로, 제2봉수대는 경상도 동래에서 광주 천림산으로, 제3봉수대는 평안도 강계에서 무악동 동봉으로, 제4봉수대는 평안도 의주에서 무악동 서봉으로, 제5봉수대는 전라남도 여수에서 개화산(양천)으로 전달하는 봉수를 받았다. 이와 같이 남산 봉수대는 전국 8도에서 올리는 봉수(烽燧)의 종착점이었다. 전국 다섯 방향의 봉수를 남산에 집결하도록 한 이유는 최종 종착점인 병조, 즉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자리에서 남산이 내사산 중 가장 잘 보였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남산이 한양 남쪽 중앙에 있으므로 각 봉수대의 봉수 전달 횟수를 최소화할 수 있는 효율적인 장소였다.

그렇다면 조선 시대 남산의 봉수대 5자리는 어디일까? 「세종실록」의 기사에 근거해 짚어보면, 제1봉수대는 남산에서 두 번째로 높은 봉우리인 현재 미군 통신부대 자리에, 제2봉수대는 남산 2등 삼각점 일대에, 제3봉수대는 현재 복원된 봉수대 자리에, 제4봉수대는 케이블카정류장 아래 평탄지에, 그리고 제5봉수대는 옛 남산식물원 일대에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봉수는 변방의 긴급한 사정을 중앙에 알리거나 중앙의 긴급한 사항을 지방에 알리어 위기에 신속히 대처하도록 하는 통신수단이다. 모두 5가지의 신호를 썼는데, 낮에는 연기를 피워 올리고, 밤에는 불을 피워 올렸다. 평상시에는 연기가 하나, 적이 나타나면 둘, 경계에 접근하면 셋, 경계를 침범하면 넷, 적과 접전 중이면 다섯을 피워 올렸다. 그러므로 남산봉수대 5개에서 올라가는 한 줄기 흰 연기는 태평성대를 의미했고, 평화로운 연기를 보며 백성들은 마음 놓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다.  
 
봉수는 전국 어느 곳에서든지 12시간 안에 서울에 도착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봉수군의 근무태만으로 봉수가 늦게 전달되는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였다. 당시 인조가 신속히 피신하지 못했던 이유는 봉수가 도중에 끊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결국 유명무실해진 봉수제를 대신해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보다 신속한 중국의 파발제(擺撥制)를 도입하게 됐다.

▲ 봉수대 모형
▲ 목멱산 봉수대 터 표지석

이태원의 어제와 오늘
이태원은 예로부터 이국적인 정서를 나타내는 지명이다. 그보다 더 솔직한 표현으로는 외세침략의 관문이었다고 하는 편이 맞는 말일 것이다. 오늘날은 다양한 외국 문화를 피부로 접할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맛볼 수 있는 곳이다. 왜 그럴까? 이곳이 조선 시대부터 한강과 가까운 교통의 요지였고, 외지인들이 한양도성으로 들어오는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는 왜군이 이곳에 진을 쳤다. 그때 이 지역 황학골에 운종사(雲鍾寺)라는 절이 있었다. 왜장 가토 기요마사는 부하들을 이끌고 이 절에 들어가서 비구니들을 겁탈했다. 그들이 떠날 때는 절을 불태워버렸다. 오갈 데 없게 된 비구니들은 지금의 부군당(府君堂: 마을을 보호해주는 신령을 모시는 신당) 밑에 토막을 짓고 살다가 왜군의 아이를 낳았다. 후일 조정에서는 왜군의 아이를 낳은 비구니와 부녀자들을 문제 삼지 않고 그곳에 보육원을 지어 아이들을 기르게 했다. 그때부터 이국인들의 애를 배고, 낳고, 기른 곳이라고 하여 이태원(異胎院)이라고 불렀다. 한편 임진왜란 때 항복해 조선에 귀화한 왜군들이 여기에 모여 살았는데, 그들을 이타인(異他人)이라고 했다. 한 가지 더 알아둘 것이 있다. 옆 동네 이촌동은 일제강점기를 전후해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했던 곳으로 이촌(二村)이라는 일본식 동 이름이 붙었다.

현재 사용하는 이태원(梨泰院)이라는 동 이름은, 효종 때 이곳에 배나무를 많이 심어 지금으로 말하자면 배나무 동네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된 것에서 연유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태원의 원위치는 지금의 용산중‧고교자리였고, 마을은 이태원2동 중앙경리단 주변이었다.

이곳 용산 강변에는 조선 시대 군량미를 보관하는 군자감(軍資監) 창고가 있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때는 일본군 주력부대의 주둔지가 됐고, 일제강점기에는 용산과 남영동 일대에 일본군 사령부가 들어섰다. 해방 후 한국전쟁 때는 미군 주둔기지로서 군사 지역의 면모가 더 뚜렷해졌다. 그때부터 미군을 위한 가게, 술집 등이 들어서면서 위락지대로 변했다.

한편 인근 남산 밑에는 한국동란 후 월남민들이 집단 거주하는 해방촌이 생겼다. 이범선의 단편소설 ‘오발탄’의 무대다. 월남 가족 송철호네 판잣집이 있던 곳. 모친은 고향을 그리다 미쳤고, 여동생은 양공주가 됐다. 성악을 전공했던 아내는 아이를 낳다 죽었다. 남동생 영호는 강도질을 하다 붙잡혔다. 송철호는 이런 상황에서 빗나간 오발탄처럼 한없이 방황한다. 그것이 1950년대 후반, 한국 사회의 알면서도 모른척했던 모습의 일단이었다.

1960년대 이후에는 이태원과 한남동 일대에 외국공관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1963년에는 군인아파트가 건설되고, 외국인집단거주지가 형성됐다. 1970년대 초반에는 121후송병원이 부평에서 미8군 영내로 이전함에 따라 1만여 명의 미군과 병원 종사자들, 기지촌 상인들이 이주해 오늘날의 이태원을 만들었다. 1970년대 후반에는 섬유산업의 호황과 더불어 그곳은 저렴하고 특색 있는 보세 물품을 파는 쇼핑가로 등장했다. 아울러 값싼 노동력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인력공급지 역할을 하게 된다. 80년대는 86아시안 게임과 88올림픽 게임이 개최돼 한국이 본격적으로 세계에 알려지면서 외국 관광객들의 쇼핑과 유흥 위락을 위한 거리가 됐다.

세계 각국의 이색적인 요리를 맛볼 수 있는 식당도 많다. 구멍이 숭숭 뚫린 독일식 빵, 탈레팟봉가리며 팟타이라는 태국 요리, 팔라펠피타, 기로스 세트, 기로스플레이트라는 그리스 요리, 갈락핑거피자라지, 밋자피자라지라는 캐나다 피자 요리, 돈 차를리초리께소, 띵가데뽀요라는 멕시코 요리, 규동과 야키소바, 찬코나베라는 일본 요리, 베트남의 소고기쌀국수과 월남쌈 등을 즐길 수 있다.

이태원에는 특이한 종교시설이 있다. 이슬람 성전 서울중앙성원이 그것이다. 1960년대 말 중동 붐에 이어 석유파동이 발생했을 때, 한국 정부는 중동 산유국과 관계개선이 급선무였다. 그 정책의 일환으로 중동사람들이 한국을 방문할 때 이용할 수 있는 이슬람 사원을 세우기로 했다. 1969년 정부는 외국 문화에 친근한 이태원에 사원 부지를 내놓았다. 건립비용은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이슬람 국가들이 전액 지원하여 1976년 5월 이슬람 중앙성원은 건립됐다. 아울러 이슬람 거리도 조성됐다. 무슬림들을 위한 음식점도 있다. 케밥, 양고기 꼬치, 터키식 요구르트, 달착지근한 디저트와 빵 등 이슬람 사람들이 즐기는 요리를 그곳에서 먹을 수 있다. 

이태원 엔틱가구거리를 가보지 않으면 서운할 것이다. 1960년대 미군 부대 군인들이 본국으로 귀환하면서 사용하던 가구들을 팔려고 내놓았던 고가구거리였다. 그 이후 세계 각지의 고가구상인들이 모여들었다. 골동품 가구부터 시계, 찻잔, 장신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품목이 있는 상가는 안으로 들어갈수록 흥미를 자아낸다.

1997년 이태원은 관광특구로 지정됐다. 그 이후 세계인의 관광특구로서 전통과 현대, 한국적인 것과 이국적인 것이 공존하는 매력을 발산하는 거리가 됐다. 이태원은 과거의 고통과 현재의 쾌락을 공유하는 거리이기도 하다. 

 

글 허창무 주주통신원/ 사진 이동구 에디터

허창무 주주통신원  sdm34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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