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이면 출신 윤창영 열사, 대전서 노점상 운영하며 생계 이어가
대전시 동구청의 노점상 탄압 및 장애인 혐오에 분노해 분신
전국에서 모인 사회단체 연대해 동구청에 항의, 사회단체 응집 계기

글 싣는 순서

1회: 옥천서 활동한 정차기 목사 인터뷰
2회: 민주화운동가 강구철 열사, 유병진 열사
3회: 옥천출신 민주화운동가 정형기 열사, 윤창영 열사
4회: 옥천출신 민주화운동가 송건호 선생 및 임창순 선생
5회: 옥천군 민주화에 앞장선 옥천군 농민회 및 지역노동단체
6회: 옥천 민주화운동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주민토론회)

▲ 윤창영 열사

윤창영 열사(1954~1999)는 대전시 동구청의 노점상 탄압 및 장애인 혐오발언에 분노해 분신했다. 우리 사회의 빈곤 문제와 장애인 혐오 및 노점상의 생존권 문제를 온몸으로 알린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대전 내에서 기리는 노동열사는 윤창영 열사가 유일하다. 충청지역노점상연합회(이하 충청노련)는 윤창영 열사의 뜻을 기리기 위해 20년 넘게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윤창영 열사는 동이면 출신이다. 어려운 가정 형편 탓에 1970년 17살의 어린 나이에 대전역 부근에서 노점상을 시작했다. 옛 대전역광장 앞 지하상가로 이어지는 계단이 윤창영 열사의 일터였다. 이곳에서 윤창영 열사는 허리띠, 라이터 등을 판매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비록 본인의 형편도 넉넉지 못했지만, 윤창영 열사는 주변의 노숙인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등 정이 많았던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었다. 충청노련 김성남 지역장은 "윤창영 열사는 장사를 한 돈으로 주변 노숙인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며 정답게 잘 챙겼다고 알고 있다"고 말했다.

김성남 지역장에 따르면 당시 대전시 동구청은 노점상으로부터 자릿세를 받거나 심하게 단속하는 등 노점상을 탄압했다. 윤창영 열사도 노점상 탄압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1999년 7월7일 대전시 동구청 직원들은 노점상을 탄압하며 2급 장애인인 윤창영 열사에게 장애인비하발언을 하는 등 비인간적인 모욕을 일삼았다. 윤창영 열사는 모욕과 탄압에 분노해 "장애인의 생계를 보장하라, 장애인도 노점상도 인간이다.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라는 말을 남기며 분신을 시도했다. 화상을 입은 윤창영 열사는 충남대학교 병원으로 이송됐으나 치료가 불가능해 서울 성심병원으로 옮겨졌고, 결국 7월10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윤창영 열사의 의거 소식이 알려지면서 노점상연합회, 민주노총, 대학생 단체 등 전국 각지의 단체가 연대해 대전역, 대전시청, 대전동구청 인근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윤창영 열사로부터 도움을 받았던 노숙인들과 동료 노점상 역시 함께 참석해 고인의 명복을 빌고 탄압에 항의했다. 당시 동구청장이었던 임영호 청장이 사과하면서 사건은 일단락됐다. 고인은 동이면 우산리 지매마을 인근 묘지에 안치됐다.

당시 윤창영열사의 장례식에서 투쟁 집행위원장을 맡았던 민주노점상전국연합 최인기 수석부위원장은 윤창영 열사가 IMF 이후 발생한 사회빈곤문제를 비롯해 장애인 비하, 노점상의 생존권문제 등 사회적인 문제로 인해 죽음에 이르렀다고 봤다. 최인기 수석부위원장은 "윤창영열사의 분신은 우발적인 사고가 아니다. 당시 물밑에 만연했던 사회 빈곤, 장애인혐오 등 여러 사회문제가 만들어낸 사회적 타살이었다"라며 "윤창영 열사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면서 전국 각지에서 여러 단체가 모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직접 행동했다는 점이 의미 있다고 보인다"고 말했다.

▲ 열사 1주기 추모제
▲ 추모제

■ 대전 유일 노동열사 윤창영, 매년 추모제 진행

대전 내에서 활동한 민주화 운동가 중 노동열사는 윤창영 열사가 유일하다. 매년 연말 대전에서 진행되는 민족민주열사 합동 추모제에서는 윤창영 열사의 뜻을 기리고 있다.

충청노련은 윤창영 열사의 사망 이후 매년 7월10일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묘지에 비석을 설치하고 직접 벌초를 하며 묘소를 가꾸고 있다.

김성남 지역장은 윤창영 열사 의거를 통해 노점상인들에 대한 행정 탄압이 줄어들었고, 노점상인들이 응집할 수 있었다고 봤다. 1990년대 후반 대전노점상연합회 회원들은 30~40여 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의거 이후 충청도를 아우르는 충청노점상연합회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고. 회원은 400여 명에 달한다. 충청지역 내 대규모 회원들이 소속된 민주운동단체는 민주노총과 충청노련 뿐이다.

김성남 지역장은 "윤창영 열사의 의거 이후 민주화운동 투쟁 방식이 체계적으로 바뀌었다. 유관 단체 간 연대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며 "앞으로도 윤창영 열사의 뜻을 이어가기 위해 추모활동을 진행할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대전 노동권익센터 홍춘기 센터장은 윤창영 열사 의거를 통해 사회적 약자들이 적극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한 행보를 보이게 됐다고 평가했다. 홍춘기 센터장은 "당시 민주단체가 행정을 상대로 투쟁해 승리한 사례는 흔치 않았다"라며 "윤창영 열사 의거는 충청노련의 출발점이자 지역사회단체의 연대가 실현된 계기였다. 사회적 약자들이 함께 권리를 찾기 위해 투쟁했다는 점이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 동이면 우산리에 위치한 윤창영 열사 묘소

 

* 이 기사는 옥천신문(http://www.okinews.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양수철 옥천신문기자  minho@o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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