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초인(超人)의 기억 :  초순진 회상 세번째 이야기

<진실, 혹은 거짓을 찾아>

순진이 자신의 비밀을 알게 된 다음 날, 받아들일 수도 없는 사실에 멍하게 아버지가 해준 말만 반복해서 생각했다. ‘79대 한강왕이 될 것이다. 내가 왕이 된다니. 아니, 여왕인가 그럼.’

수업이 시작됐지만 순진은 창밖을 바라보며 그 한 가지 생각만 잡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가을 운동회를 준비하기 위해 나온 초등학생들이 보였다. 아이들은 운동장을 가득 메우고 어떤 율동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맨 앞줄에는 회장으로 보이는 듯한 아이가 뭐라고 소리 지르며 계속 한 동작만 반복하고 있었다. 그 동작은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았는데 아이들은 하기 싫은 건지 집중을 못 하는 건지 영 진도를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아이들 중에서 정확히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무언가 튀어 보이는 한 아이가 크게 지시하는 말이 어렴풋이 들리더니 아이들이 다시 그 동작을 반복하며 노력하는데 점점 볼만한 율동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순진의 아버지는 순진이 어렸을 적부터  아치울마을에 있는 작은 집으로 데려가 고전 무용을 배우도록 했다. 순진은 그 집을 홍와대라고 불렀다. 어린 마음에 작은 집 빨간 지붕이 대통령이 사는 청와대처럼 멋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특이하게도 그 작은 집에 무용을 배우러 오는 아이들은 전부 아버지와 같이 왔던 것 같다. 여자아이들과 남자아이들이 배우는 무용은 서로 달랐지만, 악기가 연주되기 시작하면 따로 진행되던 몸동작이 아귀가 맞는 듯 하나가 되어 움직이기도 했다.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면서 둘인 춤.

연습을 하다보면 동작을 이어가다 기억이 나지 않고 지쳐버려 박자를 놓치는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언제나 앞줄 가장 가운에 서 있던 키 큰 남자아이가 모두에게 힘을 전달하듯 강하게 몸짓을 이어나갔고 순진도 갑자기 진지해져서 그 동작을 완벽하게 해냈다. 그때 순진은 집단무의 강력한 힘을 처음 느꼈고, 보이지 않는 힘의 끈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초순진? 그래서 너는 어떻게 생각한다고?”

갑자기 순진의 이름과 함께 질문이 들렸다. 뇌가 어디선가 날아다니는 말을 자유로이 편집해 공중분해해 버리다가 익숙한 이름이 입력됨과 동시에 시공간을 이동해 교실로 로그인한 것 같았다.

어떤 질문이었는지 칠판을 보고 주위 아이들의 눈빛을 봐도 단서를 찾기 어려운 질문이다. 비겁한 질문이다. ‘무엇에 대해’가 없는 비겁한 질문. 순진은 무의식적으로 백상훈을 보았다. 백상훈도 순진을 보고 있었다. 백상훈은 책을 가리키고 있었다. 책에는 진한 콧수염을 하고 오른손으로 턱을 괴고 있는 한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어제 서재에서 아버지가 건넨 그 책 첫 장에 나온 사람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초인이 될 겁니다.”

아이들은 어이없다는 듯이 비웃었다. 그렇지만 선생님의 표정을 살피니 아주 말이 안 되는 답을 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선생님은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고 말을 이어갔다.

“초인이라. 니체는 위버맨슈라고 했지. 너희들이 다 아는 슈퍼맨 말이다. 니체는 인간이 원숭이를 극복해서 인간이 됐듯이, 인간은 인간 자신을 극복해 초인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니체는 초인이 동물도 인간도 아닌 제3의 어떠한 존재라고 했다. 너희는 지금 너희가 뭐라도 된 듯 친구들을 놀리고 무시하지만, 사실은 원숭이랑 비슷한 고만고만한 존재들이야. 그러면 어떻게 하면 초인이 될 수 있을까. 니체는 자신을 극복해 인간 너머의 인간을 지향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 마지막으로 니체의 책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구절을 읽어주고 오늘 수업 마치겠다.

‘형제들이여, 너희들이 지니고 있는 덕의 힘을 기울여 이 대지에 충실하라. 너희들이 베푸는 사랑과 너희들이 터득한 앎이 이 대지의 뜻에 기여하도록 하라! 그리고 모든 사물의 가치를 새롭게 정립하도록 하라! 그러기 위해서 너희들은 전사가 되어야 한다! 창조자가 되어야 한다!’

수업 끝. 아, 그리고 오늘부터 야간 자율학습 부모님 사인 없이 빠질 수 없는 거 알지? 오늘 아침에 사유서 낸 초순진 오늘 야자 빠지는 이유가 자세히 뭐라고 했지?”

“제사요.”

“그래. 그리고 또 부모님 사인 받고 사유서 가지고 온 사람 있어?”

“저요.”

“백상훈. 넌 또 왜 빠져?”

“제사요.”

“백상훈, 사유서도 베끼냐? 상상력이 왜 이렇게 부족해?”

아이들이 웃었다.

“선생님, 저 진짜로 제사 있는데요. 아버지가 직접 전화드리도록 할까요?”

“됐어. 사인 받은 종이나 이따 교무실로 가지고 와.”

“네.”

순진은 백상훈을 힐끗 보고는 재빨리 책가방을 가지고 교실을 빠져나왔다. 아이들의 놀림을 효과적으로 피하는 길은 가장 먼저 학교를 벗어나든지 가장 늦게 벗어나는 거다. 백상훈은 부모님께 받은 사인과 사유서를 갖다 주러 교무실에 가는지 곧바로 교실을 따라 나왔다. 순진이 잰걸음으로 복도를 돌아서려는데 뒤에서 또 그 별명이 들려왔다.

“초인!”

순진이 멈췄다.

“초순진, 넌 오늘 초인답게 아예 수업도 초월했더라. 수업 내내 창밖만 바라보고 있는 거 같던데? 그래도 오늘 수업 좀 재밌지 않았냐? 특히 마지막에 선생님께서 말한 그 구절 말이야. 모든 사물의 가치를 새롭게 정립하도록 하라! 그러기 위해서 너희들은 전사가 되어라! 창조자가 되어라!”

이번에도 순진은 침묵을 택했다. 백상훈은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잘돼가?”

백상훈은 가끔 순진의 마음을 읽는 것처럼 질문을 하고 답을 이어가곤 했다. 순진도 오늘은 뭐라고 한마디라도 얘기하고 싶었지만 뭐라고 얘기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뭐든, 잘해봐. 고민하면 뭐하냐? 인디언 속담에 이런 게 있대. 고민해도 풀리지 않을 문제는 고민할 필요가 없고, 고민해서 풀릴 문제도 어차피 풀릴 테니 고민할 필요가 없다고. 간다. 또 보자. 곧 보게 될 거야.”

‘네가 내 고민이 뭔지 알면 달라질 텐데.’

순진은 누군가에게든 어제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다 말해버리고 싶었다. 미쳤다고 생각할 게 분명한데도 모조리 다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들은 얼마나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이 일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 보고 싶었다. 이런 생각들을 하며 집으로 돌아오니 아버지는 벌써 한복을 입고 거실에 앉아 순진을 기다리고 있다. 

아침에 아버지는 오늘 저녁 가야 할 제사가 있다고 하며 되도록 학교에서 일찍 돌아오라고 했다. 매년 이맘때쯤 아버지는 아주 큰 제례에 참석했고, 그 제례를 위해 한 달 전부터는 현관 옆에 향을 피웠다. 어렸을 때부터 순진도 아버지와 같이 가겠다고 떼쓰곤 했지만 어리다는 이유로 한 번도 따라가보지 못했던 제사였고, 언젠가부터는 따라간다는 말조차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갑자기 아버지는 제사 얘기를 꺼내며 옷을 준비해둘 테니 같이 가자고 하는 것이었다. 순진은 아버지가 미친 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아버지가 하는 모든 것을 믿는 척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준비해 둔 순진의 한복은 긴 가운 같지만 현대적인 관점에서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소매가 약간 길기는 했지만, 소매 바깥 팔꿈치 부근에 단추가 하나 달려있었고 소매 안쪽에 단추를 연결할 수 있는 단춧구멍을 두어 소매를 접어 단추를 채우면 실용적으로 입을 수 있도록 개량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는 역사 시간에 배웠던 고구려 벽화에 나온 사람들의 의복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이것이 거짓이라면 가장 그럴듯한 거짓이겠지. 순진은 한복으로 갈아입고 그 위에 얇은 코트를 걸친 다음 거실에 나왔다. 아버지는 커다란 향로를 보자기에 싸서 조심스럽게 들고 있었다.  

▲ 고구려 벽화 무용도

“아버지, 오늘 제사는 누구 제사예요?”

“천신과 유화부인, 그리고 주몽을 비롯해 역대 고구려 왕을 모시는 제사다. 지금까지 내가 너를 데리고 가지 않았던 건 너에게 아직 밝힐 때가 아니어서였지. 이제는 때가 되었다.”

순진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정말 미쳤는지 알 좋은 기회다. 

순진의 아버지는 집 앞에서 택시를 탔다.

“어디로 모실까유?”

“아차산으로 갑시다.”

“아차산이 손바닥만 한가유? 아차산 가자면 떡 허구 가게?”

택시 기사 아저씨는 충청도 사투리를 쓰고 있었다.

“모던기와커피를 조금 지나 유턴해서 우미내길 따라 우측으로 죽 올라가 주시면 제가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출발합니다.”

택시는 출발했다.

진실을 찾아.

혹은,

거짓을 찾아.

* (주) '나는 왕이로소이다'는 심창식 통신원과 안지애 통신원의 릴레이 글로 연재되고 있습니다.

 
편집 : 양성숙 객원편집위원
안지애 객원편집위원  phoenicy@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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