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왕이로소이다 8. 초인(超人)의 기억(4)

모든 것은 쇼인가 안지애 편집위원l승인2020.06.29l수정2020.07.03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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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친척 집 가시나유? 한복 빼입고 가시는 거 보니께 그런거 같은디”

“......”

나와 아버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택시 기사님 혼자 질문과 답으로 택시를 채워나갔다.

“강변북로는 왜 이렇게 막히는겨. 한 나라의 수도가 이렇게 중요한 길은 한 10차선으로 빵빵하게 뚫어놔야 하는 거 아니여? 김종필이 대통령이 됐으면 왕복 6차로가 뭐여, 12차로도 가능헐 것인디. 서울 사람들은 다 꿀을 많이 먹어서 근가. 사람 말을 개 방귀로 아는 게 분명한겨. 우린 핫바지가 아닌디.”

이미 택시는 모던기와커피를 지나 유턴을 해 우미내길 우측을 따라 올라가고 있었다.

“다 온 겨 아닌 겨, 우미내 동사무소 지났는디. 이 길은 맞아유?”

“여기서 직진해서 조금만 더 올라가 주시면 됩니다.”

아버지가 처음으로 한마디 했다.

아버지가 다 도착했다고 말한 곳은 특이할 것 없는 가정집이었다.

한 가지 특별하다면 서울 아파트촌에서는 보기 드문 넓은 주택이라는 점이었다.

여기서 큰 제례가 열린다니. 아직까지 믿기 힘든 사실이다. 왕을 믿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리고 그들이 고구려와 백제의 후예라면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버지와 비슷한 한복을 입은 아저씨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오셨습니까. 다들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 드디어 따님이 오셨군요. 축하드립니다. 저는 안연수입니다. 오늘 제의를 책임지고 있지요. 초순진님 맞지요?”

내 이름 뒤 붙은 ‘님’이라는 의존명사는 어색한 기분을 들게 하며 동시에 책임감이 더해지는 묘한 호칭이었다.

“일단 들어가며 얘기하시죠.”

넓은 정원의 가정집 현관을 들어서자 엘리베이터가 있다. 가정집에 엘리베이터라니. 엘리베이터를 타고 안연수는 지하 5층 버튼을 눌렀다. 역시 생각지 못한 층이다. 재미있는 것은 여닫이 버튼을 제외하고는 지하 5층 버튼 하나라는 것. 안연수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초순진님 제례는 처음이지요? 잘 오셨습니다. 저희 글로벌제왕협회 고구려지부 가장 큰 행사인데 이렇게 오신 걸 환영합니다. 저희 부족의 왕이 되실 수 있는 분이기도 한데 이렇게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안타까운 듯한 여운이 맘에 걸린다. 왕이 되는 게 아니고 왕이 될 수도 있다. 왕을 믿는 사람인 건 분명하군.

“오늘 행사는 고구려 최대 행사 <동맹>입니다. 동맹에 대해서는 초순진님도 알고 계시죠? 부여는 영고, 고구려는 동맹, 동예의 무천, 모두 제천의식이지요. 예전에는 11월 15일에 하기도 하고, 음력으로 지내기도 했는데, 지금은 그냥 쉽게 양력 10월 15일에 진행합니다. 사실 고려 시대 있었던 서경(평양)의 팔관회 날짜를 양력으로 따른 것이지요. 이제 세대는 변하니 젊은이들이 쉽게 기억하도록 이리 하는게 맞겠지요.

고려시대에는 불교의식과 우리 고유의 제천의식이 합쳐진 형태로 개경에서는 11월 15일, 서경에서는 10월 15일, 이렇게 두 차례 팔관회를 열었습니다. 그냥 추석이 두 번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네요. 그중 서경에서 열린 팔관회는 사실상 고구려의 동맹을 계승한 것인데 동명성왕과 유화부인을 기리는 제례랍니다. 지금은 동명성왕과 유화부인을 비롯해 역대 고구려 왕 모두를 기리는 제의로 보면 되고요.

아이고. 젊은이를 데리고 지루하고 쓸데한 얘기가 길었군요. 아버님이 다 해줄 이야기니 간단히 이 정도면 될 것 같고, 사실 보통 제사랑 다른 일종의 ‘쇼’라고 보면 됩니다. 저희는 정신을 계승하는데 큰 의의를 두니까요. 이름은 형식일 뿐입니다. 우리 늙은이들도 지루한 형식만 따지면 뒷처진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요. 우리라고 머리 물들이고 나팔바지와 핫팬츠 입던 젊은 시절이 없었던 게 아니니 무시하지 마요. 하하하”

지하에 도착해 낡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생각지 못한 광경이 펼쳐졌다. 300평 정도 되는 지하공간이었는데 지하 5층에 개인이 저 정도 지하공간을 뚫을 수 있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곳은 저희 그룹 건물입니다. 상부로 다섯 채의 개인 주택을 소유했고, 하부 지하공간을 전부 이어 이 공간을 마련할 수 있었지요.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마저 들으시죠.”

우리를 본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며 손뼉 치듯 우산을 바닥에 쳤다. 오늘 날이 흐리기는 했지만 비가 올 것 같은 날씨는 아니었는데 모두 우산을 준비해 왔다.

“향로는 이리 주시고 저기 앉으시면 됩니다. 이제 곧 시작할 것입니다.”

일종의 쇼라니. 오히려 그렇게 말하니 받아들이기 쉬웠다. 그냥 쇼라고 생각하고, 다 같이 이 가상 세계를 가정하며 살아간다면 거짓이고 진실일 것도 없지 않은가. 왕이 선유도역 20평짜리 작은 복도식 아파트에 산다면 누가 믿을 것인가. 그냥 모든 것을 가정하고 가장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면 내가 언제나 살아왔던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말 잘 듣는 조용한 학생, 착한 친구, 예의 바른 이웃, 협조적인 동료. 원래 다 그런 척 살아가는 거니까.

아버지와 내가 앉자 어두웠던 불조차 모조리 꺼졌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시간이 지나고 눈이 익숙해지자 점점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둡지만 그들의 움직임과 표정이 조금씩 보였다. 그런데 불이 꺼지고 난 후 공간이 몇 배는 더 늘어난 듯한 느낌이 들며 파르테논 신전의 공연장같이 층층이 높아진 좌석 위에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분명 계단식 높은 좌석이 없었는데 새로운 좌석에 더 많은 사람들이 생긴 것이다. 좀 더 자세히 보니 사방의 벽은 언뜻 보면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그럴듯한 화면이었다. 그리고 그 화면 속 사람들은 아무리 어둠 속이라도 분명히 아시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쇼는 전 세계 생방송이구나.

지하 무대 한가운데로 진하게 거북이 머리 무늬가 새겨진 틀에 달려있는 북과 피리를 든 사내가 보였다. 그 앞에는 누군가가 검은 망토를 쓰고 무릎을 꿇고 있었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종묘제례악을 생방송으로 보여준 적이 있다. 계속해서 반복되는 듯한 연주를 듣다 스르르 잠이 들었다. 오늘은 불까지 꺼주었으니 마음대로 자라는 배려인가 피식 웃음이 나왔다. 게다가 피리 부는 사나이에 망토 쓴 마법사라니. 쇼라면 코미디일 수도. 아니면 우리 모두를 어디론가 끌고 가 없애벌릴 수도 있는 비극일까?

북의 울림과 함께 어둠 속에서 무릎 꿇은 사내의 굵직하고 낮은 목소리가 시작되었다.

“조선의 피를 이은 너른 벌판을 내달리던 요동의 후손이, 동쪽으로 땅을 넓히고 지금 여기 남경에 모여 하늘님을 모십니다."

'조선이 요동에 있었던 적이 있었던가?'

'지금 저 사람이 말하는 조선은 내가 아는 그 조선이 아니다.'

"인류를 널리 이롭게 해주시는 하늘님, 우리 모두를 낳아주신 유화부인님. 그 자손 동명성왕과 지금 여기 서울로 이어진 우리 부족의 운명을 지켜주시고 계시는 고구려 역대 왕들이시어, 이 술을 바치옵니다.”

사내는 바닥에 술을 부었다. 자세히 보니 바닥에는 구멍이 뚫려있고 그곳에 술을 따르고 있는 것이었다. 신기하게도 술이 투명 형광색처럼 빛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그 술이 흘러가는 모든 방향이 다 보였다. 술은 먼저 오른쪽 벽으로 흘러가더니 어떤 형태를 만들어내고 있었고, 술이 지나간 자리의 특정 부분이 점점이 더 빛나기 시작했다.

그때 오른쪽 벽 화면에 나타난 점들이 강하게 빛나며 무릎 꿇고 술을 붓는 사내의 랩 같은 읊조림이 시작되었다.

“각, 항, 저, 방, 심, 미, 기”

그런 다음 형광 술은 다시 앞쪽 벽으로 이동하며 앞 면이 반짝거렸다.

“두, 우, 여, 허, 위, 실, 벽”

그리고, 술은 왼쪽으로 흘러들었다.

“규, 누, 위, 묘, 필, 자, 삼”

그 다음은 뒷면이었다.

“정, 귀, 유, 성, 장, 익, 진”

별이다. 저 반짝거리는 불빛은 별이구나.

▲ 덕화리 고분 고구려 벽화 별자리

코미디다. 별과 함께 랩이라니. 나는 이 게임을 잘 알고 있다. 어렸을 때 아버지와 함께했던 게임 중 하나로 아버지가 직접 나무로 깎아 만든 퍼즐이기도 했다. 이 퍼즐의 특징은 동서남북 별자리를 모두 맞추면 별자리 모양으로 환하게 불이 이어지며 동시에 다섯 동물 모양이 빛난다. 나라 경계 퍼즐도, 이 별자리 퍼즐도 전부 의도적 놀이였구나.

그때 네벽의 별자리가 사라지며 동물들 모양이 나타났다.

별자리와는 다르게 동물들은 홀로그램으로 나타났는데 고구려 벽화, 그리고, 별자리 퍼즐에서 본 바로 그 동물들이었다.

주작, 현무, 청룡, 백호.

사신도.

▲ 국립중앙박물관 강서대묘 사신도 현무

홀로그램은 정확하게 방의 사면에 나타나며 지하공간을 고구려 고분의 모습으로 변화시켰다.

형광으로 빛나던 술은 이제 천장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저건 말도 안 된다. 중력을 거슬러 천장으로 올라가다니. 이제 술이 지나간 천장에는 또 다른 모양의 별자리가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해와 달과 함께 빛나고 있는 북두칠성과 남두육성. 그리고 매우 실제적인 홀로그램으로 다섯 번째 동물, 황룡이 날아올랐다. 그 황룡은 아버지의 가슴으로 공격하듯 날아들더니 금빛 가루로 사방에 흩어져버렸다. 홀로그램 치고는 너무나 실제적이어서 난 금빛 가루를 만지려고 손을 뻗었다.

그때 천장 가운데까지 올라간 술이 향로에 한 방울 떨어졌다.

'똑.'

사나이의 피리 소리가 시작되고 술방울이 떨어진 향로에 불빛이 튀더니 연기가 피어오른다. 마치 물에 떨어뜨린 검은 잉크가 퍼지듯 어두운 공간에 금빛 연기가 퍼져나갔다. 향의 연기 쪽으로 금빛 조명을 비추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망토를 쓰고 술을 부으며 랩을 읊조리던 사내가 망토를 벗어던졌다.

금빛 연기의 흩어짐과 함께 사방에서 나온 스무 명 정도 되는 젊은 무용수들의 춤이 시작됐다.

피리 소리는 강력했다. 어둠 속에서 들리는 무용수들의 숨소리는 바람이 춤을 추는 듯 분명한 박자로 허공을 갈랐다.

저 춤.

내가 아는 춤이다.

홍와대라 부르던 그 빨간 지붕집에서 아이들과 모여 추던 그 춤이다. 다 외워 이제 다른 춤을 배우면 안 되냐고 떼를 쓰고 투정을 부렸지만 우리는 1년 내내 한 춤만 배웠다. 그 수업을 통과하는 방법은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린 채 바닥에 표시된 한 점에서 시작해 몇 개의 점을 지나 다시 원점에서 춤을 마무리하는 것이었다. 불가능해 보였지만 1년이 지난 아이들은 모두 눈 감고도 자신의 위치뿐 아니라 다른 아이들의 위치를 다 기억할 정도로 우리의 춤은 완벽해졌다. 그리고 어느 날 우리는 더 이상 무용을 배우러 가지 않게 되었다. 가끔 아버지께 무용을 같이 배우던 친구들에 대해 물었지만 별다른 대답을 해주지 않았고 우리는 점점 서로에게 잊혔다.

‘우리의 춤은 어둠 속에서 추는 춤이었구나.’

이제 여자와 남자의 춤이 어우러지는 클라이막스 부분이다. 한 가지 우리가 배웠던 춤과 다른 부분이 있다. 가장 앞에 서있는 남자 무용수의 여자 파트너가 없다는 것이었다. 남자 무용수의 춤에서 나오는 그 카리스마는 어렸을 때 맨 앞줄에서 보이지 않던 힘의 끈으로 우리 모두를 이끌어 나가던 그 친구라는 것을 짐작게 했다. 그 무용수가 내 쪽으로 가까이 와 눈을 마주쳤다.

어두운 중에도 그 눈은

분명히,

빤하게,

나의 눈을 보고 있었다.

익숙한 눈빛.

백상훈이다.

보이지 않는 힘의 끈으로 전체를 이끌어 나가던 그 친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니.

그렇다면, 

 

그는, 나를, 이미 알아봤던 것인가.       
 

*28개 별자리(28수) : 이십팔수(二十八宿)는 고대로부터 동아시아에서 사용되어 온 황도와 천구의 적도 주변에 있는 28개의 별자리이다. 28수와 3원으로부터 하늘이 3개의 담과 나머지 28개의 영역으로 구분된다. 동·북·서·남의 방위에 따라 사신이 7개씩의 별자리를 주관한다. 각 별자리(宿)의 해당 영역에는 또한 여러 별자리들이 속해 있다. 예를 들어 우수에는 직녀, 하고, 천부, 좌기, 우기 등이 속한다. 이러한 체계의 차이로, '3원 28수'의 별자리와 서양 88개 별자리는 1:1 대응이 되지 않는다. 
동방의 청룡 별자리 : 각, 항, 저, 방, 심, 미, 기
북방의 현무 별자리 : 두, 우, 여, 허, 위, 실, 벽
서방의 백호 별자리 : 규, 루, 위, 묘, 필, 자, 삼
남방의 주작 별자리 : 정, 귀, 류, 성, 장, 익, 진


<위키백과>

* (주) '나는 왕이로소이다'는 심창식 통신원과 안지애 통신원의 릴레이 글로 연재되고 있습니다.

편집 : 양성숙 객원편집위원

안지애 편집위원  phoenicy@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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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2
전체보기
  • 김미경 2020-07-02 12:16:31

    이번 글은 딱딱한 누룽지 고소하게 씹어먹듯 천천히 읽었습니다. 빨리 읽기 아까워서요. ㅎㅎㅎ 5편 기다립니다.신고 | 삭제

    • 최호진 2020-07-01 18:35:47

      아무리 이해력을 동원 하여도 무슨 듯으로 무슨 목적으로 전개하는지 조차 모르는것은 일찍이 공돌이라는 닉네임이 적격인데 무얼 더 잘난체 하려고 덤벼드는지 나는 도통 용납이 안되는구료 소설 나브렝이 몇줄 읽었다고 박식해 지는것도 아니고, 그나마 박목월(시), 박영준(소설) 두 국어과목 교수님 덕으로 잘난체 하며 살아 온길이 사회에 나와서 콱 멕혀서 문예창작과(평생교육원)에 들어가서 일주일에 한개씩 발제해서 공부한 덕으로 겨우겨우 발길질 하며 턱거리했는데 갈길이 멀고 먼 가시밭길이라 숨이 턱턱 막히는 어려운 왕이로소이다...신고 |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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