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운산봉오동의 기억> 출간기념회가 열리다

권용동 주주통신원l승인2020.07.06l수정2020.07.31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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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4일 오후 3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광복회관 3층 대강당에서 최성주(항일투쟁의 숨은 주역 최운산 장군의 손녀)가 주최하는 <최운산 봉오동의 기억> 출간기념회가 열렸다. 항일 투쟁의 숨은 주역 최운산 장군의 손녀인 최성주는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이사로서 봉오동 독립전쟁 학술세미나 및 현장답사를 여러 차례 진행했다. 그는 역사 전문가들과의 학술연구를 통해 국내 최초로 봉오동 독립전쟁 현장의 정확한 위치를 밝히는 등 봉오동 독립전쟁 승리의 역사를 복원하고 있다. 또한 언론개혁시민연대 공동대표도 맡고 있으며, 언론분야 사회운동가로도 열정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 최운산 봉오동 전투 를 기억하면서 토크를 하고 있다.

<봉오동 독립전쟁 100주년, 우리는 제대로 알아야 한다>

독립군! 일제 강점기 독립군이라고 하면 여전히 많은 사람이 황량한 만주벌판에서 무기도 식량도 없이 헐벗고 굶주린 구한말 의병 같은 모습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저 조국 독립에 대한 열망과 애국심만으로 모든 어려움을 극복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우리 독립군이 기관총과 대포 등 신형 무기로 무장한 대규모의 일제 정규군을 격파해 승리를 거두었다고, 게릴라 수준의 독립군이 변변한 무기도 없이 이뤄낸 눈물겨운 기적이라고 믿었다. 오랫동안 우리 역사가 만주 독립운동에 대해 그렇게 설명했기 때문이다.

▲ 많은 사람들이 참여 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기적이 정말 가능한 일이었을까? 화승총을 가진 산포수 출신의 의병 무리가 일제 정규군과 맞붙어 있었을까? 단지 홍범도 장군이 총을 잘 쐈기 때문일까? 물론 명사수라 한두 명을 먼저 쓰러뜨릴 수 있었겠지만 상대는 대규모 정규군이었다. 자기편이 공격 당해 쓰러지면 그 부대는 어떻게 반격했을까? 러일전쟁과 청일전쟁에서 승리했고 실전 경험이 풍부한 일본군의 대응을 상상해보자. 실제로 1894년 우금치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은 일제에 전멸당했다. 신형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을 재래식 무기의 동학군이 당해낼 수 없었던 것이다.

▲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다.

일반적으로 봉오동 독립전쟁의 승리는 독립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매복 작전을 펼친 것이 주효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우리 독립군에게 제대로 된 무기가 없었다면 매복이 무슨 소용이었을까? 기관총과 대포로 완전무장한 일본군이 그저 포위당했다는 이유만으로 무너졌을까? 현대전의 핵심은 무기이다. 봉오동 독립전쟁은 정규군과 정규군이 격돌한 현대전이었다. 상대에 필적할 무기와 병력도 없이 전쟁에서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 비망록에 기록하고 있다. 

우리 독립군이 일본군에 승리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당시 우리 독립군대가 제대로 무장된 정예군이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그런데도 어째서 우리는 지금까지 봉오동 청산리의 승리를 마치 신화처럼 이해했을까? 어떻게 그런 역사해석이 가능했을까? 살아남은 소수 독립군 출신의 인사가 역사적 진실을 외면했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 왜곡에 학문적 권위가 더해졌다. 거기에 암기 위주의 일방적 역사교육이 만주 지역 독립전쟁의 승리를 역사가 아닌 신화로 이해하도록 만들어 버렸다. 우리 독립군이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는지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저 일본군 전사자가 많았다니 자랑스러운 승리라고 스스로 설득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피상적 이해만으로는 그날의 승리가 세대를 뛰어넘는 민족적 자부심이 될 수 없다. 숫자나 기억하는 역사 공부는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할뿐 선조들의 삶에 화답하는 용기 있는 후손으로 자리매김할 수 없기 때문이다.

▲ 화환 진열해 있다.

승리의 역사 100년이 지난 오늘이다. 이제는 그 역사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고 바르게 전해야 한다. 전쟁 준비는 하루아침에 완성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병력을 모으고, 매일 정신과 체력을 단련하고, 무기를 갖춰서 총포사용 훈련을 반복해야 한다. 지금도 모든 군대는 언제일지 모르는 불의의 사태에 대비해 실전훈련을 거듭하고 있다. 그래야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승리했던 우리 독립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급조된 게릴라가 아니라 대한군무도독부를 중심으로 통합을 이룬 대한민국 군인이었다. 대한북로도독군부는 수천의 독립군이 세 개 연대 예하 각 대대와 중대 그리고 후방부대와 보급부대를 편성하고, 의무대까지 갖춘 정식 군대였다.

▲ 이상직 문화공간 이사장과 최성주 최운산 사업회 이사 와 함께 포즈를취하고 있다.

북간도 봉오동은 장기간에 걸쳐 독립군을 양성한 본격적인 항일 무장독립군 기지였다. 봉오동을 신한촌으로 건설한 간도 제일의 억만장자 최운산 장군은 1912년, 비적으로부터 동포들을 보호하기 위해 봉오동에 창설했던 사병부대를 모체로, 전국에서 모인 애국청년들을 정예 독립군으로 양성했다. 1915년 독립군 병력이 늘어나자 봉오동 산 중턱을 개간해 연병장을 만들고 벌목한 나무로 대형 막사 3동을 지은 다음 본부 둘레에 토성을 쌓아 독립군 군사기지 봉오동을 완성했다. 훈련을 지속하던 최운산 장군은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창설되자 사병부대였던 도독부를 대한민국의 첫 번째 군대 대한군무도독부로 재창설했다.

▲ 봉오동 전투 지도 동영상 보며 설명하고 있다.

만주라는 중요한 역사적 공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우리는, 그날의 승리를 민족적 자부심과 일상의 독립정신으로 승화시키지 못했다. 그저 전쟁에서 이겼다니 기뻐했고 쉽게 잊어버렸다. 당시 막강한 전력을 갖춘 일본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기까지 만주의 우리독립군이 어떻게 전쟁을 준비하고, 조국 독립이라는 이상을 향해 나아갔는지, 수천 명의 독립군이 하나가 되어 목숨을 걸었던 그 날의 언어가 무엇이었는지, 간절했던 그들의 꿈과 희망이 무엇이었는지 알지 못했다. 수천의 정규 독립군이 참전한 대규모 독립전쟁을 소규모 게릴라전으로 축소 왜곡한 지난 역사 때문에 우리는 대한민국 독립전쟁의 장대한 서사를 배우지 못하고 있었다. 자랑스러운 승전의 역사는 그저 단순한 사망자 수로만 남아 기억의 창고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 화환이 진열해 있다.

이제 역사의 이름으로 그날의 전투 현장을 불러내서 오늘 우리 앞에 복원해야 한다. 역사 속으로 들어가 봉오동 산 위 참호에 매복한 채 일본군에게 총구를 겨냥하고 숨죽었던 그 순간의 긴장을, 우리 모두 함께 느끼고 나눌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그래야 그 시간이, 그날의 역사가, 그 시대가 당신들에게 요구했던 뜨거운 열정이, 후세인 우리들에게 말을 걸어오고, 비로소 당신들의 삶을 전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가슴 벅찬 그날의 역사가 속히 복원되어 후손들에게 자부심과 자긍심을 심어주기 바란다.  

<최운산 봉오동의 기억 프롤로그 에서>

▲ 사진모음 -1
▲ 사진모음-2

<봉오동 독립전쟁 전승 100주년 기념> 전시회가 2020년 7월 2일부터 7월 7일까지 여의도 광복회관 1층 전시홀에서 열렸다.

편집 : 김태평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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