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왕이로소이다 9. 초인(超人)의 기억(5)

쇼를 즐기자 안지애 편집위원l승인2020.07.07l수정2020.07.31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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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상훈이 나를 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확신과 미안함을 읽을 수 있었다. 무엇에 대한 확신이고 무엇에 대한 미안함일까. 먼저 얘기하지 못한 미안함이었을까.

언젠가부터 백상훈이 계속 눈에 들어왔다.

그 친구를 처음 본 날부터 그랬다. 어렸을 때부터 한자를 좋아해 고등학교에 들어와 중국어 한시 동아리를 들었다. 동아리 첫날 자기소개를 하는데 늦게 동아리방에 들어온 한 친구가 눈에 띄었다. 키가 컸고 눈썹이 진하고 눈매가 매서웠다. 들어오자마자 자기소개라며 시조를 한 수 크게 외웠다. 

“雨歇長堤草色多(우헐장제초색다) 비 갠 긴 둑엔 풀빛이 짙어 가는데
送君南浦動悲歌(송군남포동비가) 남포에서 임 보내며 슬픈 노래 부르네
大同江水何時盡(대동강수하시진) 대동강 물은 어느 때 마르려는지
別淚年年添綠波(별루년년첨록파) 해마다 이별 눈물 푸른 강물에 더해지네”

▲ 대동강

당시 3학년 선배가 비웃듯 물었다.

“뭐냐? 그 식상한 시조는? 실연이라도 당한 거야? 교과서에 나오는 다 아는 시조로 뭐 하자는 거야?”

그는 표정의 변화 없이 응수했다.

“기다릴 것입니다. 왕이 다시 당당하게 일어서 요동을 달리던 우리 민족이 다시 그곳을 되찾을 날을.”

선배는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말했다.

“됐어. 꼭 저렇게 헛소리하는 새끼가 한 명씩 들어온다니까. 그래도, 그 식상한 시조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조니 넌 통과. 이름이 뭐라고?”

“백상훈입니다. 서로 상(相), 공 훈(勳) 자를 씁니다. 조국과 왕을 위해 공을 세우라는 선대의 뜻이 담겨있는 이름입니다.”

“이거 완전 똘아이네. 좋아. 우리 동아리에 저런 똘기 어린 새끼가 좀 필요하긴 하지. 매일 시조나 외워대니 이거 원 지루해서.”

직접 말을 걸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내가 응시하는 그곳에 그가 있었다. 아니면 내가 그가 있는 곳을 응시했던 것인가. 2학년 때는 같은 반이 되었다. 반 아이들이 내 이름을 이용해 나를 놀릴 때 그는 나에게 오는 화살들을 가볍게 반사시키는 재주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비현실적인 공간에도 그가 있는 것이다.

그때 다시 랩을 읊조리던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요동 벌판을 내달리며 여기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지켜봐 주신 동명성왕의 정령이시어, 나타나주십시오. 모두가 모여 당신을 받듭니다.”

향로의 금빛 연기가 갑자기 회오리처럼 돌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작은 불 회오리가 되었다.

‘이건 도대체 어떤 장치를 이용한 것이지?’

“지난번 기다리라 하셨던 79대 왕을 결정하는 날이 바로 오늘이려나 봅니다. 드디어 그분이 오셨으니 모셔서 당신을 허락을 구하고자 합니다. 공주 초순진, 향로 앞에 나와 무릎을 꿇고 동명성왕의 부름에 응하시오.”

‘기대하지도 준비되지도 않은 상황이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백상훈을 보았다. 이 순간 내가 믿고 의지할 사람은 그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백상훈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눈으로 끄덕였다. 나는 나가서 향로 앞에 무릎을 꿇었다.

“공주의 호위무사 백상훈도 향로 앞에 나와 무릎을 꿇으시오.”

‘호위무사?’

향로 위에는 여전히 금빛 연기가 작은 불 회오리가 되어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이 모든 상황을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하고 정신을 바로잡으려 노력했다.

‘나도 모르는 호위무사가 있고, 그게 바로 백상훈이라고?’

▲ 고구려 무사

아무리 작은 회오리라고 해도 그 불 회오리에 들어가면 모든 것이 사라져버릴 것 같은 공포감이 엄습했다.

백상훈이 내 옆으로 와 무릎을 꿇고, 같이 춤을 추던 이들이 향로 주위를 돌기 시작했다. 이제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그 순간이다. 춤을 배울 때 선생님이 말해준, 때가 되면 언제 멈춰야 할지 알게 되는 그 순간.

‘왕을 믿지도 않는데, 이 쇼에서 나는 지금 뭐 하는 거지?’

무릎을 꿇고 향로 앞에 앉으니 수만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백상훈이 호위무사. 이 불 회오리가 동명성왕의 뜻을 전해주는 건가? 그래. 나를 데리고 쇼를 하고 싶다면 이왕이면 쇼를 즐겨주지.’

랩 하던 사나이가 잔 하나를 들고 나에게 와서 건넸다.

‘알코올 냄새 같기도 하고. 술인가? 미성년자에게 술을 주면 형사처분일 텐데. 법도 무시하는 쇼인가?’

나는 잔을 들이켰다. 쓰다. 몽롱해지기보다 모든 것이 더 분명하지는 느낌이다. 머리가 차가워지고 어떤 문제든 풀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그래도 눈앞의 불 회오리 원리는 여전히 알아낼 수 없다.

“동명성왕이시어, 이 대지의 어머니 유화부인이여, 위대한 고구려의 아버지들이여. 오늘은 미뤄왔던 결정을 꼭 내려주십시오. 고주몽의 직계손 초순진 공주가 여왕이 되고자 청하오니 왕의 재질인지 알려주십시오.”

말이 떨어지자 회오리의 굵기가 굵어지며 천장까지 이어졌다. 회오리는 원탁 의자에 앉아 있는 왕들이 열띤 토론을 하는 것처럼 거칠게 돌며 천장으로 올라가고 가운데로 말려들어가 소멸되는 듯했다가 다시 천장으로 솟구치기를 반복했다. 회오리가 돌고 춤을 추던 무용수들도 회오리의 흐름대로 향로 주위를 무섭게 돌았다. 그렇게 한참을 돌다 불의 회오리는 갑자기 멈추더니 욕조의 물이 사라져버리듯 향로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무용수들도 멈추고 다들 향로를 중심으로 동그랗게 무릎을 꿇었다. 랩 사나이가 다시 말을 시작했다.

“불의 원탁의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초순진 공주에 대한 결정은 무기한 유보. 다음왕은 남성이다.”

‘도대체 뭘 보고 해석을 해대는 거야!’

왕을 믿는 이 집단이 믿음이 가진 않았지만 내가 왕이 될 수 없는 것 또한 기분 좋은 것은 아니었다. 무릎을 꿇은 채로 향로를 자세히 보니 재가 만들어낸 규칙적인 모양이 있었다. 나는 말도 안 되는 의식과 받아들일 수 없는 결과에 그 모양을 머릿속에 각인시켰다.

▲ 천산둔(遯) 괘

나중에서야 재의 모양이 주역에 나오는 ‘천산둔’괘였다는 것과, 물러나 은둔하고 있으면 형통할 것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백상훈은 후에 어떻게 내 옆에서 나를 지키게 되었는지 설명해 주었다. 백상훈은 백제의 8성귀족 출신으로 나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제왕협회를 알게 되었다고 했다. 고구려와 백제 후손을 중심으로 어떠한 파벌이 형성되기는 했지만 나중에는 출신국이 아닌 사상의 차이로 파벌이 갈리게 되었고 자신은 향로를 통해 전해 받는 동명성왕의 결정에 반대하는 파라고 했다. 그리고 그 파의 대부분은 백제인들의 후손이었지만 졸본 출신 소서노의 자손이 많았으므로 소서노 친정 세력이 많았던 고구려 5부 중 계루부의 이름을 따서 계루파라고 부른다고 했다.

계루파의 대부분은 잠실주변에 살며 백제와 고구려의 전통을 모두 지켜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동명성왕의 직계손인 나를 지지하고 계루파 후계자 백상훈이 나의 호위무사를 자처하게 된 것은 소서노를 모시는 제례에서 결정된 바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 제의에서도 역시 주역괘를 받아 앞날을 결정하는데 재미있게도 소서노를 모시는 제의에서 나온 괘는 ‘뇌천대장’괘로 ‘천산둔’괘의 상하 전도된 괘였다고 한다.

▲ 뇌천대장(大壯) 괘

뇌천대장 괘는 ‘개혁을 일으키려는 세력의 뜻이 바르면 이롭다’라고 했다. 예에 어긋나지 않게 바르게 나아가면 이롭지만 사실 대장괘가 너무 과하게 나아가면 화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해야하는 괘였다. 백상훈은 강하게 나를 왕으로 추천했고 당장 왕으로 나아가길 원했다.

그렇지만 나는 조용히 은둔해 때를 기다리고자 했다.

적어도 몇 년이 흐르고 아버지가 한강변에서 어떤 남자를 만나 왕위를 물러줄 때까지는.

왕을 믿는 이 제왕협회는 아직 나에게 쇼였지만, 난 이 쇼에 참여해보기로 했던 것이다.  
 

편집 : 양성숙 객원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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