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인터폴 수배자명단

나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호태종의 딸 초순진과 사랑을 나눈 게 바로 조금 전의 일인데, 이 무슨 해괴한 주장인가.

초순진의 거짓 고변은 귀엽게 봐줄 수나 있었지만 이 자는 작정을 하고 나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지 않은가. 

"그대는 정체가 무엇이길래 감히 왕을 능멸하려 하는가? 그렇다면 글로벌제왕협회에 내가 정회원으로 가입된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나의 득달같은 질문에 모연중이 거침없이 대답했다.

"글로벌제왕협회요? 흥! 해외에 서버를 두면 그런 건 일도 아니지요. 그들 모두 국제 사기단으로 인터폴의 수배를 받는 인물들입니다. 인터폴에서 그들을 일망타진하려고 오늘 이 순간을 기다려 왔지요."

그러더니 자신의 인터폴 신분증을 제시하며 usb를 꺼내 들었다.

"보세요. 이 usb에 부녀사기단 일당을 포함한 인터폴수배자 명단이 들어있어요."

▲ 인터폴의 표상(Emblem)

인터폴에서 개입했다면 이건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다. 모연중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것으로 모든 게 끝장난 거나 다름없다.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에 의문이 남아있다.

"나를 받들던 예부를 비롯한 조정 대신들은 다 어찌 설명할 텐가?"

"흐흥! 그런 사람들은 일당 십만 원만 주면 얼마든지 동원할 수 있다는 걸 정녕 모른단 말입니까? 그런 시기극에 끼어줄 날만 고대하는 사람들이 줄을 섰어요."

아뿔싸!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을 못한 게 사실이다. 그래도 아직 의문 투성이다. 이 자를 믿자니 신뢰가 안 가고, 안 믿자니 그의 주장을 뒤엎을 근거가 부족하다.

한편으로 갑자기 마음 한 구석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아! 결국 나는 여기까지인가?! 나의 왕노릇은 이렇게 허망하게 끝이 나고 마는가!'

'한강왕을 사칭한 부녀 사기단이 한강변에 출몰한다'는 기사가 인터넷에 떴다는 것 자체로 한강왕은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백성들은 인터넷을 맹신하지 않는가. 거기에 인터폴까지 개입했다면.

모연중의 말이 사실이라면 초순진이 자신의 학창 시절 놀림당한 이야기하며 아버지가 한강왕임을 알게 된 아차산의 제례 이야기들 모두가 나를 속이기 위해 정교하게 꾸며낸 거짓이란 말인가?

생각이 엉키면서 마음이 복잡해지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머릿속에서 한 줄기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질문을 이어가다보면 어디엔가 녀석의 틈이 보일지 모른다. 당황한 마음을 감추고 모연중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럼 내가 왕으로 누리던 것들 하며 왕으로 행세하던 것들은 어찌 가능했는가?"

▲ 환상에 갇힌 자아

나의 예리한 질문에 모연중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변을 했다.

"그런 것들은 왕께서 부녀 사기단에 속아 스스로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지요."

무언가 나의 가슴을 찌르는 말이다. 칼끝이 심장 가까이에 닿을랑 말랑 한다.

과연 나는 환상 속에 빠져 있는 걸까. 자아는 곧잘 환상에 빠지곤 한다. 환상도 여러가지다. 영웅이 되거나 위대한 인물이 되는 환상, 세상을 어지럽히는 악마를 무짜르는 환상, 자유자재로 공간이동과 시간여행을 하는 환상, 매력적인 이성과 달콤한 사랑에 빠지는 환상, 위기에 빠진 인류를 구원해내는 환상 등 무궁무진하다.

설사 이것이 환상이라 해도 이 상태로는 환상에서 빠져 나갈 수 없다. 꿈도 그렇듯이 환상도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어야 한다, 그런 다음에야 빠져나오든지 말든지 할 것이 아닌가.

하지만 단언컨대, 적어도 지금은 환상이 아니다.

초순진과의 정열적인 키스로 아직도 입술이 얼얼한 상태이다. 호태종의 눈빛은 얼마나 진실했으며, 예부를 위시한 조정대신들은 역사와 문화에 대한 안목과 식견이 얼마나 탁월했는가. 한강왕으로 등극할 즈음, 반짝이는 별빛에서 스치듯이 다가온 영감은 또 얼마나 신성했는가. 어느 것 하나 환상이라고 여길만한 구석은 없다.

나의 심증을 믿어야 할까. 모연중의 주장을 믿어야 할까. 심증과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되는 접점에 진실은 숨어 있을 것이다. 

"부녀사기단이 경호원들과 짜고, 국제 사기꾼들과 합세하여 사기를 친 게 사실이라고 치자!  그래서 그들이 나에게 얻어낸 게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모연중의 표정을 살피며 질문을 이어갔다.

"나를 왕으로 대접했을지언정 나를 이용해 이득을 본 게 없지 않은가?"

선유도의 밤이 깊어가는 가운데, 모연중이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안타깝다는 듯이 쳐다본다.                                                <계속>

* (주) '나는 왕이로소이다'는 심창식 통신원과 안지애 통신원의 릴레이 글로 연재되고 있습니다.

편집 : 양성숙 객원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위원  cshim7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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