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의 어제와 오늘
조선 시대에는 명례동(明禮洞) 또는 명례방(明禮坊)라 했고, 일제강점기에는 명치정(明治町)이라고 불렀던 거리. 좁게는 명동 1‧2가, 넓게는 충무로 1‧2가와 을지로 1‧2가까지 포함하는 지역이다. 1885년부터 일본인들은 진고개와 명동 일대에 거주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명동에는 본정통이라는 충무로와 함께 일본인들에 의해 화려한 상권이 형성됐다. 이곳에는 일본요릿집과 일본과자점이 생겨 구경거리가 됐다. 왜(倭)각시 구경한다고 눈깔사탕을 사러 가는 한국인들 덕택에 가게 주인 일본인은 10년 안에 부자가 돼 본국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조금 더 세월이 흘러서는 요정이 즐비한 유흥가가 됐다. 밤이고 낮이고 흥청거리는 거리였다. 일제강점기의 정치는 명동과 충무로의 요정에서 요리됐다고나 할까?

1930년대에는 예술인들도 명동 뒷골목의 나지막한 다방과 비좁은 술집에서 무지개꿈을 키우기도 하고, 망국의 한을 토로하기도 했다. 식민지 지식인들의 미래는 뱃고동 소리만이 멀리서 들려오는 안개 낀 부두에 서 있는 것처럼 암울했다. 암울했기에 불안했고, 불안했기에 휘황찬란한 일본인 거리에서 잠시 자신의 정체를 잊으려고 발버둥 쳤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들은 밤을 새우며 통음했고, 국외자들은 그런 절망적인 행위를 낭만이라고 불렀을지 모른다. 아무튼 문인들, 미술인들, 음악인들이 명동의 그릴과 다방에 모여들었다. 숨 가쁘게 밀려드는 서구문명의 겉모습에 빠져들었다. 구미의 유행은 동경의 번화가 긴자를 거쳐 머지않아 명동과 충무로에 상륙했다. 부박한 기생들은 까만 망토와 사각모자를 쓴 대학생들이 외국 원서를 옆구리에 끼고 거들먹거리는 모습을 부러워했다. 그들을 애인으로 삼고 자랑하기도 했다.

한편 명동은 일확천금을 노리는 투기꾼들의 온상이었다. 지금의 증권거래소에 해당하는 경성주식현물취인소(京城柱式現物取引所)가 1920년에 명치정에 개설된 이후 객장은 물론 그 주위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투기꾼들이 진을 쳤다. 그 와중에서 어떤 자는 하루아침에 벼락부자가 되는가 하면, 떠 어떤 자는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는 상황이 비일비재했다. 특히 중일전쟁에서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격변기에 전황은 그대로 주가에 반영됐다. 시시각각 변하는 전황에 따라 주가는 폭등과 폭락을 거듭했다. 그때 이래 1970년대까지 명동은 모든 증권회사가 모여 있는 한국의 월가가 됐다. 다시 말하면 한국경제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지금은 한국의 월가가 여의도로 옮겨졌다.

광복 직전부터 한국전쟁 직후까지는 세계정세와 전황을 파악하기 위해 약삭빠른 밀정들과 정상배들이 그곳에 모여들었다. 그곳은 시시각각 급변하는 정세를 수신해 전파하는 안테나 구실을 했다. 그런가 하면 광복 후에도 명동은 서울의 얼굴이며 유행을 낳는 번화가였다. 장안의 멋쟁이들이 모여들었고, 예술가들이 진을 쳤다.

한국전쟁은 그곳에도 깊은 상흔을 새겨놓았지만, 1953년 휴전을 전후해 명동은 다시 예술인들의 터전이 됐다. 1950년대와 1960년대는 문인들과 예술인들의 집합소였다. 전쟁 후의 폐허 속에서도 실존주의 철학이며 니힐리즘을 논하고, 예술과 인생을 토론하며 암울했던 시대의 정한을 풀던 거리였다. 가난한 예술가들이 명동에 모여드는 이유가 있었다. 그곳은 방황하는 전후 세대에게 일종의 해방구와도 같았고, 술집이며 다방에서는 언제든지 외상을 해줬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갈채다방은 이범선, 박재삼, 황금찬 등 주로 현대문학파 문인들이 자주 드나들던 곳이었다. 동방사롱은 이헌구, 김광섭, 조경희, 이문희 등 자유문학파 문인들이 모이던 다방이었다. 당시 한국에서 제일 유명했던 테너 임만섭도 동방사롱에 자주 찾아왔다. 금꿩다방도 빼놓을 수 없다. 손응성, 박수근, 장이석, 김형구, 박항섭 등 화가들이 모이는 휴식처가 그곳이었다. 외국의 화상들도 그곳에 와서 국내 화가들의 그림을 사 갔다.

‘세월이 가면’을 작사한 박인환이 죽기 일주일 전 1956년 봄, 동방사롱 앞 빈대떡집, 그는 가수 나애심에게 노래 한 곡을 불러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날따라 노래 부를 기분이 아니라고 거절했다. 그러자 박인환은 즉석에서 뭔가 끼적거렸다. ‘세월이 가면’은 그렇게 탄생했다. 평소 샹송에 심취했던 시나리오 작가 이진섭이 즉석에서 그 시에 악보를 붙였고, 그때 마침 술집에 들어온 임만섭이 그 악보를 보고 노래를 불렀다. 거리의 사람들이 술집 앞으로 모여들었다. 누가 보건 말건 그들 세 사람은 노래를 불렀다. 감미로운 샹송조의 노래였다. 그 무렵 명동의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네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 우리들의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후략)

그렇다. 사랑은 가지만 옛날은 남는다. 추억으로 오롯이 남는다고 할까? 리메이크 음악을 다시 들어도 좋다. 그의 유명한 시 ‘목마와 숙녀’에서 읊었던 것처럼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적인 가사건만, 박인희의 호소력 있는 가창력에 매혹됨은 하릴없는 인생의 허무와 애수가 노래 속에 배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1950년대 박인환은 영원한 보헤미안이었으며 명동의 ‘댄디’였다.

광복 후부터 1980년대까지 서울은 밤 12시부터 새벽 4시가 통행금지 시간대였다. 통행금지가 해제되는 성탄절과 12월 31일 밤엔 청춘남녀들이 모처럼 해방감에 들떠 명동 거리를 누비고 다녔다.

1950년대 말에는 치마 길이가 짧아졌다. 일부 여성들의 홀태바지며 맘보바지도 명동 거리에서부터 시작됐다. 1960년대는 미니스커트, 핫팬츠, 판탈롱 등 젊은 층의 패션이 명동거리를 휩쓸었다. 1970년대 이후에는 서양의 최고급 명품들, 이를테면 발렌티노, 구치, 이브생로랑, 피에르가르뎅, 니나리치 등의 상표들이 명동 쇼윈도를 찬란하게 수놓았다.

명동을 찾는 외국인들도 바뀌었다. 196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는 일본 관광객들이 들끓었다. 그 이후에는 중국경제의 활황으로 중국 관광객들이 떠드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린다.

이제 예술인들, 문화인들은 명동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것은 추억으로, 전설로만 전해진다. 그러나 명동은 여전히 유행과 멋을 낳는 거리이고, 서울의 심장부다. 오늘도 쇼핑하는 내외국인들이며 그냥 청춘을 구가하는 젊은이들로 넘친다. 젊은이들은 인파에 휩쓸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잠재우고, 막연한 소속감과 연대의식을 느끼려고 하는 것일까? 유행이 강물처럼 흐르는 명동을 바라보기라도 하면서 따분한 현실을 잠시나마 잊으려고 하는 것일까? 

다시 남산 성곽의 흔적을 찾다
조선신궁 건립으로 자취를 감춘 성곽은 2년여의 세월이 걸려 2006년 5월 추정선이 밝혀졌다. 이 작업은 1922년 제작된 경성부관내도(京城府管內圖)를 기본으로 하되, 서울시 도시계획도와 항공사진을 중첩하는 방법으로 이뤄졌다. 경성부관내도를 이용한 건 이 지도가 제작됐을 당시에는 조선신궁이 아직 들어서지 않아서 서울성곽이 그대로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남산 계단 길을 내려오면 남산공원 회현 지구의 중앙광장이 나온다. 여기서부터는 성곽의 추정선을 따라가야 한다. 1968년 12월에 설립됐다가 2006년 철거된 옛 식물원 자리를 가로질러 간다. 친구나 연인과 함께 남산에 오르면 들렀던 남산식물원은 1990년대만 하더라도 그렇게 규모가 큰 식물원이 별로 없어 열대와 아열대식물을 구경할 수 있는 흔치 않은 생태학습장 역할을 했다. 조선신궁 터였던 이 자리에 1956년 이승만 동상을 세웠으나, 1960년 4월 26일 그가 하야한 후 분노한 시민들이 그 동상을 파괴했다.

성곽 추정선은 중앙광장의 분수대와 남산공원관리사업소 사이를 지나 안중근의사기념관 모퉁이에서 백범광장 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이 구간은 현재 복원공사가 진행 중이다. 백범광장으로 내려오면, 백범광장 들머리에서 땅바닥에 그려놓은 성곽 추정선을 볼 수 있다. 그것은 광장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맞은편 남서쪽 새로 복원된 성곽에 이어진다. 왜 그 추정선을 따라 성곽을 복원하지 않는지 알 수 없다. 그대로 복원한다면 백범광장을 토막 내는 모양새가 되기 때문일까?

▲ 백범광장(옛 조선신궁 중광장 터)

백범광장
백범광장은 시야가 트여 시원스럽다. 이국땅에서 독립운동을 하느라 만고풍상을 겪은 동상의 얼굴은 둔탁하면서도 인자한 할아버지의 모습이다.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쳐 광복 후 타계할 때까지의 민족의 고뇌가 그 얼굴에 고스란히 들어있다.

현재 백범 선생의 동상이 서 있는 자리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남산식물원 자리에 4.19혁명 전 이승만 동상이 서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진정한 애국자가 누구인지 생각하게 되는 자리다. 이런 대조적인 변모는 광복 후 정국에서 정치적 입장이 달랐던 두 거물 정치인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반영한다고 할까?

백범광장 서쪽에는 상해임시정부 재무총장과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냈던 성재 이시영 선생의 동상이 있다. 만주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했던 이회영 선생의 동생이기도 하다. 신흥무관학교는 당시 독립운동의 요람이었다. 조선신궁이 있던 이 자리에 지금은 항일투사들의 동상과 기념관, 그리고 기념광장을 만듦으로써 일제식민지배의 상징을 대체하려고 하는 것이다.

백범광장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신궁 중광장 자리였다. 이승만 정권 때 국회의사당 부지를 조성하면서 조선신궁 중광장 자리가 현재와 같이 배로 커졌다. 백범 동상 자리로부터 서남쪽에는 1963년 7월 조개껍데기 모양의 야외음악당을 세웠으나, 소음공해를 일으킨다고 해 그동안 줄곧 민원이 대상이 됐다가 1980년 5월 신군부에 의해 깨끗이 철거됐다. 지금은 광장이 잔디밭으로 잘 꾸며져 있다.

▲ 백범 김구 선생 동상
▲ 성재 이시영 선생 동상

편집: 정지은 편집담당

글 허창무 주주통신원/ 사진 이동구 에디터

허창무 주주통신원  sdm34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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