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전, 오토왕으로부터 모연중에 관한 첩보를 입수한 호태종은 비밀경호단장에게 모연중이 국내에서 누구와 접촉하고 어떤 일을 꾸미는지 은밀히 알아볼 것을 지시했다. 한편으로 모연중의 부친인 모숭산의 국내 동향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오토왕의 보고서에 따르면 모연중은 발해왕족의 후예를 자처했다고 한다. 호태종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고구려와 발해! 그 기나긴 역사를 어찌 한 마디로 평가할 수 있겠는가.  

이쯤해서 한강유역에 흘러들어온 고구려 유민과 발해 유민 사이에 얽힌 역사를 살펴볼 때가 되었다. 발해가 멸망한 뒤 발해 유민들중 일부가 고구려 유민의 뒤를 이어 한강변으로 잠입해 들어왔다. 그 이후 발해의 후예들은 한강왕위를 두고 고구려의 후예들과 경쟁구도를 형성했던 과거가 있다. 당나라와 맞서 중원을 위협하기도 했던 발해의 후예들은 비록 한강왕위의 왕권경쟁에서 밀려났지만 역대 한강왕들에게 경계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렇다고 해서 발해유민들을 내칠 수는 없다. 발해인의 성씨 중 고씨가 많았고 왕실·귀족 고분군의 최상층 양식이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기에 발해와 고구려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더구나 발해는 옛 고구려 영토인 한반도 북부와 ·연해주 등을 차지하고 당나라와 대등한 관계를 맺으며 고구려의 기상을 이어받지 않았던가. 내치기는커녕 같은 민족으로서 발해의 유민들에게 고생했다고 치하하며 고마워해야 할 지경이 아니던가.

호태종을 위시한 역대 한강왕들은 발해의 영토를 주시하고 있었으며 통일된 한국이 장차 중국이나 러시아와 영토분쟁을 하게 될 경우의 수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 중국의 왕성한 기운이 이미 기울어지기 시작하는 것을 감지하고 있던 호태종으로서는 미래를 위해서도 발해의 후예들에게 융화정책을 구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발해의 영역도와 행정구역

호태종은 틈날 때마다 발해의 역사를 회상해보곤 했다.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한 이래 국방력이 강화된 2대 무왕 때는 흑수부 말갈을 쳐서 송화강과 흑룡강 유역까지 영토를 넓혔다. 전륜성왕으로 불린 3대 문왕은 황제국을 자처했으며 10대 선왕 때는 해동성국으로 불릴 정도의 전성기를 누렸다. 926년 거란의 침공으로 멸망한 이후 지배층은 대거 고려에 흡수되었지만 수천년간 한민족이 지배해왔던 만주지역은 발해를 마지막으로 하여 더 이상 우리 영토에 편입되지 못했다. 

발해가 멸망하기 직전인 918년에 왕건이 고려를 창건한 것은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고려는 송과 우호관계를 유지하여 문화를 수입한 반면, 고구려의 옛 영토 회복이라는 태조 이래의 북진정책을 추구하며 영토를 압록강까지 확장했다. 왕건은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멸시하고 배척하였으며 발해의 유민을 대거 수용하였고, 거란의 사신이 보낸 낙타 50마리를 개경 만부교에 묶어 굶겨 죽이기까지 했다.

호태종은 물론이고 초순진 또한 한국 역사가 발해에 진 빚을 언젠가는 갚아야 한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발해는 통일신라를 당나라와 거란, 여진족으로부터 보호하며 방패막이 구실을 했건만 거란의 침략으로 나라가 위태로울 때 신라와 고려는 발해를 돕지 못했다. 발해가 굳건하게 버티고 있었다면 몽고의 침략이라든지 청나라의 침략으로 인한 고난과 수치의 역사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발해는 고구려 멸망 이후 샛별처럼 나타나 2백여 년간 반짝 빛을 발하다가 신기루처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발해에 진 빚은 발해의 영토 회복으로 갚아야 한다. 서쪽으로 만주지역에서부터 북쪽으로는 하얼빈과 송화강(쑹화강), 흑룡강에 이르기까지, 동쪽으로는 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롭스크 남부지역에 이르기까지 통일 한국이 차지하게 될 미래의 영토를 호태종은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고주몽의 직계 후손인 호태종으로서는 더욱 더 발해에 마음의 빚을 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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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트로이츠코예 고분군의 발견으로 발해가 러시아 아무르강 유역까지 지배하고 있었음이 확인되고 있다.  

초순진은 언젠가 호태종에게 이런 말을 했다.

"고구려와 발해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벅차올라요. 고구려와 발해의 고토를 되찾아 멋진 말갈퀴를 지닌 말을 타고 만주벌판을 질주하다가, 쑹화강가에서 눈부신 햇살을 맞으며 신명나게 춤을 추고 싶어요."

거기에 더해 낭만적인 소원을 비밀처럼 말하기도 했다.

"드넓게 펼쳐진 아무르강가에서는 사랑하는 연인과 와인잔을 기울이며 저녁노을과 지는 해를 바라보고 싶어요."

그러면서 소리없이 중얼거리곤 했다.

"그런 날이 과연 올까요?"

                           <계속>

 

* 유득공은 저서 '발해고(渤海考)'에서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후계임을 분명히 하고 발해의 영토를 잃어버린 우리의 고토로 인식하였으며, 정약용은 '아방강역고'에서 고증을 통해 발해를 우리 역사로 인식하였다.

**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는 러시아과학원 고고학민족학연구소와 함께 2007년 7∼8월 아무르강 유역 트로이츠코예 유적을 조사한 결과 발해 세력이 러시아 아무르강 유역에까지 미쳤음을 입증하는 고고학적 증거들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트로이츠코예 고분 조사에서 목곽 또는 목관을 불태우는 장법(葬法), 다인(多人) 2차 세골장법(洗骨葬法), 말뼈 부장 등의 매장풍습이 확인됐는데, 이는 중국과 연해주 지역의 발해 고분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매장풍습이다. 또 주변지역 지표조사 결과 고구려의 전통을 잇는 발해 석실분이 발견됐으며, 행정치소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대규모 성이 여럿 분포하고 있음도 확인했다고 연구소는 밝혔다.


편집 : 양성숙 객원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위원  cshim7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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