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놀기
어려서 비 오는 날을 좋아했다. 그 이유는 순전히 물웅덩이에서 놀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그러셨다.
“너는 비만 오면 집 앞 물웅덩이 진 곳에 가서는 물을 탕! 하고 발로 찼어. 그 물이 튀어 오르면 좋다고 깔깔거렸지. 그 물이 너에게 튀어도 상관없이 하고 또 하고 했단다. 흙탕물이 튀어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될 때까지 그렇게 재미있다고 놀았어. 아주 개구쟁이였지.”
초등학교 때도 비만 오면 학교 운동장에 갔다. 학교 운동장은 모래로 되어 있었는데 비는 운동장에 작은 물웅덩이도 만들어 놓았고 물길도 만들어 놓았다. 우산은 팽개쳐놓고... 우선 물웅덩이에서 한참 철퍼덕거린 후, 자연이 내준 그 물길을 따라 모든 상상력을 동원하여 모래성도 쌓고 새 길도 만들며 놀았다. 나 말고도 비 오는 날 운동장을 좋아하는 아이가 몇 있었던 것 같다. 함께 놀아 무섭진 않았다.
어느 날은 한참 놀다가 너무 조용해서 주위를 돌아보니 아이들은 모두 집에 가버리고 없었다. 해지는 불그스레한 하늘 아래 나 혼자 덩그마니 남아있었다. 그런데 좀 이상해서 고개를 들어보니 엄청 큰 새(?)가 내 위를 빙빙 돌고 있었다. 꼭 나를 잡아 채가려고 도는 것 같았다. 얼마나 놀랬는지 다 팽개치고 집으로 달려갔는데 그날 일은 커서도 가끔 꿈에 나타났다. 꿈에서는 새가 나를 발로 집어 운동장 위를 날아다녔다. 꿈속에서는 새에 잡힌 것이 무섭지 않았다. 새 덕에 하늘을 난다 생각하고 나도 손을 벌려 가슴을 활짝 펴고 세상 구경을 했다. 새는 나를 운동장 너머 더 멀리도 데려갔다. 꿈속임에도 그 멋진 풍광을 보는 기분을 어찌 설명할 수 있으랴...
황토길에서 놀기
몇 년 전 내가 잘 가는 산책 코스 동네 공원에 황토길이 생겼다. 호기심에 찬 눈으로 잘 관찰해보았는데 질고 무른 황토 진창이 아니라 진흙탕이라고 말할 정도로 물이 많았다. 오호라~~~ 완전 내 스타일이네~~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물 반 흙 반 황토길에는 주로 유아서부터 초등학생들이 많이 들어가 놀았다. 발 씻는 곳도 아주 깔끔하게 만들어 놓았다. 황토길 건너편에는 자갈을 깐 바닥에서 물이 나오는 조그만 탕도 있었다. 황토길에서 실컷 놀다가 지치면 데크 의자에 앉아 발을 담그고 쉴 수 있는 족욕탕이었다. 구청에서 여름방학에 아이들을 위해 물놀이 대신 놀라고 만든 곳 같았다.
사실 만들어지자마자 나도 들어가 걸어보았다. 발가락 사이로 황토가 꼼지락 꼼지락거렸다. 발과 황토가 뭔가 교감하는 것 같았다. 발을 쑥 내딛으면 꾸르륵 꾸르륵 간지러운 것 같으면서도 부드럽고 까끌까끌한 황토가 발가락 사이로 들어오면서 발을 폭 감쌌다. 발바닥은 마사지를 받는 듯 시원했다.
물이 많은 황토길이라 물웅덩이처럼 발로 탕! 치면 황토가 풀썩 튀어 오르는 곳도 있었다. 일부러 철퍼덕 철퍼덕 휘젓고 다니며 친구들 옷에 진흙을 묻히는 개구진 어린 아이도 있었다. 체면상 가만 가만 걸어 다녀도 발가락 사이로 들락날락하는 황토 느낌이 생생했다. 동심으로 돌아간 듯 좋았지만 어른은 거의 없어 아이들 눈치가 보여 다음엔 선뜻 들어가지지 않았다. 그런데 처음만 아이들이 놀았지 요새는 어른들도 조심조심 들어가 돌아다닌다. 황토의 효능을 알기 때문이리라...
오늘 오전에 잠시 공원을 지나갈 일이 있었다. 어제 태풍이 오고 비도 살살 흩뿌리고 있어서 그런지 공원에 사람이 얼마 없었다. 황토길에는 아예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옳거니.. 이때다.' 너무 좋아서 심장이 뛰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맘 놓고 놀아보자’ 하고 황토길에 발을 내딛었다.
비온 뒤끝이라 물을 양껏 먹은 황토길은 진흙탕이 되었다.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진흙탕을 마구 헤젓고 다녔다. 걷다가 움푹 들어간 곳은 그 주변 황토를 발로 문질러 조금 평평하게 만들었다. 황토길 가장자리로 밀려간 흙을 가운데로 밀어 넣어 더욱 걸쭉하게 만들고 일부러 미끄러지듯 발을 질질 끌며 다녔다. 물이 넘치지 않고 고루 퍼지도록 물길도 만들고, 고인 물에 황토가 푹 잠기도록 뚝도 만들었다. 너무 재미있어서 한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를 정도로 진흙탕 속에 빠져 놀았다.
집에 와서 일하려니 발바닥이 찌릿찌릿하고 몸은 노곤하다. 운동이 많이 된 모양이다. 저녁에 남편에게 황토길에서 신나게 논 이야기를 해주니 표정이 떨떠름하니 좋지 않다.
“온갖 사람들이 들어갔다 나온 그 흙엔 온갖 미생물이 살 텐데... 좋은 균도 있겠고.. 안 좋은 균도 있겠고... 뭐 하러 애들처럼... 할머니 나이에...”
아... 또 균 타령... 누가 미생물 공부한 사람 아니랄까봐서리... 허구헌날 균 타령 하면서 저렇게 재미없게 말을 할까. 물론 무좀균 같은 것이 옮아 혹시나 고생할까봐 염려해서 하는 말이겠지만... 어려서 비 오는 날에 재미나게 논 이야기도 해주고 다음엔 같이 들어가 보자고 하려다 김이 쑥~~ 빠진다.
애고... 참 분위기 없는 사람. 나중에 진흙탕 들어가서 또 놀았다고 하면 아주 정색하겠지? 그래도 발가락 사이사이 꼼지락거리는 진흙이 그리워 또 가고 싶은데... 몰래 가야 하나? 배려하는 마음으로 가지 말아야 하나? 참내.. 이 나이에 별 걸 다 고민하게 생겼네...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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