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는 원래 사람이 살지 않았다고 한다.

산의 북쪽인 모흥혈(毛興穴)에서 세 사람이 한꺼번에 솟아났는데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 라고 불렀다고 한다.

하루는 바닷가에서 사냥을 하는데 목함 하나가 떠내려 오고 있었다.

그 목함에는 붉은 띠를 두르고 자주 빛 옷을 입은 사자(使者)가 타고 있었다.

이 사자가 말하기를,

"나는 벽랑국(碧浪國) 사자입니다.우리 임금님께서 이 세 공주를 기르면서 말씀하시기를 바다 가운데 산기슭에 세명의 신인(~三神人)이 계시어 나라를 열고자 하는데 배필이 없다고 신에게 세 따님을 모시라 명하셨습니다. 그러니 배필로 삼으셔서 대업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말하고는 홀연히 구름을 타고 날아가 버렸다.

세명의 신인이 목 함을 열어보니 세 공주와 오곡과 송아지, 씨앗들이 있었다.

이들 고, 부, 량 세 사람은 세 공주와 혼인을 하여 탐라국을 열었다.

이것이 탐라의 탄생신화이다.

▲ 혼인지

선산읍 은평리 해안도로에 연흔포(延婚浦)라는 곳이 있는데 이들 세 공주의 상륙지로 전래되고 있다.

 

이곳 해안에서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세 공주와 탐라국 고, 양, 부 세 청년이 만나서 혼례를 올렸다는 혼인지가 제주도 기념물 제 17호라고 한다.

제주도 제주시 이도 1동 1313번지에 소재하고 있는 삼성혈(三姓穴)은 고씨, 부씨, 량씨 시조의 탄생지와 거주지로서 가장 오래된 최고의 장소라는 사실과 삼성(三姓)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창성(創姓)한 최고의 성씨로, BC 2373년의 창성년도와 탄생년도를 한국기록원으로부터 2012년 3월 20일 인증을 받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세 공주가 왔다는 벽랑도는 과연 어디 일까?

당시 탐진(~현재 강진)과 탐라의 뱃길 가운데 문헌에 나타난 벽랑도가 고지도에는 있다. 또한 고려사 지리지(1454)에 벽랑도가 장흥부 속 탐진현 5개 도서 가운데 나타나고 있다. 또한, 동국여지승람(1486)에도 벽랑도가 강진현 도서 가운데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고지도에는 평일도(平日島, 현재 금일도) 인근에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 .

▲ 벽랑도의 고지도

그런데도 벽랑도는 완도군 금일읍 사동리 소랑도(小浪島)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구한말에 나라도 잃고, 지명조차 여지없이 없어지는 수난의 과정이었을까?

벽랑도는 1864년 대동여지도를 마지막으로 섬의 자취는 사라지고 말았다. 이러한 것을 밝혀보자고 학술회의도 하였으나 1회로 그치고 말았다.

이제라도 학계의 힘을 빌려 완도와 제주도와의 관계를 확실히 하여 정식 사돈 관계로 다시 맺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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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 : 허익배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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