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한 나그네가 정처 없는 길을 나섰다. 이게 나그네의 본분이던가? 오란 곳도 없고 딱히 가고 싶은 곳도 없다. 하지만 길은 항상 그를 불렀다. 마법에 걸린 그는 가지 않을 수 없다. 날이 날마다 길손이 축복인지 박복인지 알 수 없으나 나그네는 무념무상하게 길을 나선다.

‘좋다! 오늘은 또 무슨 세상이 열리려나?’ 마음으로 되 내인 나그네는 전후좌우를 살피면서 한가로이 거닌다. 모퉁이를 돌아서니 다양한 가게들이 즐비하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참 많은 것이 필요 한가 봐’ 이 가게 저 가게로 눈알만 굴리면 눈요기 꺼리가 꽤 많다. 구매할 물건도 의사도 없으니 노랑노랑 거닐며 설렁설렁 구경만 한다. 유랑자인 나그네에게 무슨 물건이 필요하겠는가? 그때그때 맞춰서 살면 돼지. 물건이 많으면 귀찮고 보관과 처리도 어렵다.

가게에서 파는 물건들을 보면 세상물정을 대충 알 수 있고, 돌아가는 세태도 대략 파악할 수 있다. 그래서 심심하고 무료하면 상가거리를 찾고, 침울하여 흥을 돋우고 싶으면 시장을 간다. 삶의 참맛은 서민들과 함께 하는 생활에서 나오고 그들과 같이 있을 때 누릴 수 있다.

음식도 시장 골목 너부죽한 식당에 가야 진한 맛이다. 세상이치가 그러지 아니한가? 생명이 있는 것, 영양가 있은 것은 낮은 곳으로 모이지 않는가. 위로 올라가는 것은 영양가 없는 수증기 같은 가벼운 것이고, 내려오는 것은 영양을 가득 담아 무거운 빗방울이 아닌가? 낮은 곳엔 다양한 물질과 먹을 것도 많고 생활의 기쁨과 즐거움도 있다. 이런 진데 사람들은 왜 높은 곳만 가려하는가?

눈을 들어 주위를 보니 두세 걸음 앞서 가던 처자가 나그네를 뒤돌아보고 씽끗 웃는다. 나그네는 속으로 ‘어허! 이게 무슨 징조란 말인가? 나를 보고 웃어?’라고 독담하면서 어색한 눈인사를 보낸다. 다시 그녀를 바라보니 옷매무세는 단정하고 늘씬한 몸매와 아름다운 뒤태를 가졌다.

함부로 생각 없이 나다니는 처자는 아니듯 싶었다. ‘하지만 조심해야해, 요즘이 어떤 세상인가? 방심하다간 봉변을 당할 수도 있어. 모르는 여성은 2m이상 떨어져야 해’라고 속으로 다짐했다. 그런데도 딱히 가야할 곳도 없는 그였기에 저 처자를 한 번 따라 가 보자고 마음을 먹었다. 그리하여 나그네는 일정 거리를 두고 그녀를 뒤따랐던 것이다.

시내 길을 한참 가볍게 가더니 차량통행이 거의 없고 인적도 드문 한적한 길로 접어들었다. 처자와 나그네는 그때까지 아무 말도 없이 걷기만 했다. 앞서가던 처자는 좌로 돌아 길을 빠져나가더니 인접한 산길로 곧장 들어섰다. ‘어라! 혼자 산길을 간다? 이게 무슨 조화람?’ 나그네는 중얼거리면서 궁금함을 감춘 채 따라 갈 수밖에 없었다. 산은 의외로 굵은 나무숲이 우거져 있었고 길은 가팔랐다. 사람의 통행도 별로 많지 않은 소로였고, 좌우엔 바위절벽도 있었다. 길을 가던 처자가 뒤를 돌아보며 말을 붙인다.

처자 : 안녕하세요? 저는 구대고을에 사는데 이곳 주광고을에 다니러 왔다가 이제 돌아가는 중이랍니다. 선생님께서는 어디로 가시나요?

나그네 : (어허 말을 거네? 목소리가 상큼하고 음감도 부드럽구나. 요즘 듣기 어려운 품격의 말씨다) 예~ 안녕하세요? (물음에는 답하지 않고 되레 질문을 한다) 무슨 일로 오셨다 갑니까?

처자 : 예~ 얼마 전에 결혼한 친구가 한 번 다녀가라 해서 왔다 가는 길입니다.

나그네 : 아, 그러셨군요? 신혼인 친구 분은 행복해 하던가요?

처자 : 글쎄요. 생각보다는...(말끝을 흐리면서 먼 산을 바라본다)

나그네 : 아예~(주제를 바꿔야겠다고 판단한다) 저는 특히 정한 곳 없이 떠도는 나그네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이렇게 혼자 가고 있지요.

처자 : (다소 의외란 표정을 지으면서) 그렇군요? 좋겠습니다. 자유로워서...

나그네 : (처자 말끝이 들릴락 말락 한다.) 예~ 그렇기는 합니다만...

그런 후 처자는 급한 일이 있는 것처럼 발걸음을 재촉한다. ‘그럼 그녀는 자유롭지 못하단 말인가? 기혼자는 아닌 듯한데’ 나그네는 생각했다. 다시 처자를 보았더니 걸음이 어찌나 빠르던지 걷기에 이골이 난 자신이었지만 따라가기가 버거웠다. 처자는 바람을 타고 축지법을 쓰는 것 같았다. 사내인 자신을 따돌릴 정도니.

나그네도 빠른 걸음으로 최대한 따라붙었다. 100m 달리기도 선수급에 가까운 자신이었기에 바위도 뛰어서 넘고 구부러진 길은 가로질러 달렸다. 웬 간한 낭떠러지는 뛰어내렸고 가시덤불 길도 마다하지 않고 달렸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도 헷갈렸다. 처자는 어느새 저만큼 멀어졌고 모습도 가물가물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녀가 뭐라고 하는데, 거리도 멀고 바람소리에 섞여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처자 : 저~ 아~ 소...

나그네 : (혼자 중얼거린다)무슨 소리지? 소? ‘아무 소리 하지 말아요~’인가? ‘저 소변 보러가요~’인가? 어찌 저렇게 빠를 수가 있단 말인가?

나그네는 내친김에 처자가 갔던 뒤를 따라 갈 수밖에 없었다. 이제 돌아갈 수도 없지 않은가. 나그네는 자존심도 상했다. 처자를 놓치다니... 그녀가 간 정확한 곳을 알 수 없었지만 그만 둘 수도 없었다. 한참을 내려가니 조그만 마을이 나타났다. 처음 처자를 만났을 때 처자는 구대고을에 산다고 했으니, 구대고을로 가는 차편을 한번 알아보고자 생각했다.

고을버스정류장을 찾았다. 정류장에 도착하여 차편을 알아보고 있는데 건장한 청년이 지나간다. 이 고을은 조그마하니 이곳에 사는 청년이라면 고을 내막을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청년에게 도움을 청해보고자 그를 불렀다.

나그네 : (청년을 쳐다보며) 안녕하세요? 이 고을에 사십니까?

청년 : (뒤를 돌아보며) 예, 그렇습니다만...

나그네 : 제가 도움이 좀 필요해서 몇 가지 묻고자 합니다.

청년 : (공손하게 마주보며) 예, 말씀하십시오. 제가 아는 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나그네 : (예상외의 친절함에 가벼운 마음으로) 고맙습니다. 그럼 제가 몇 가지 얘기할 테니 듣고 말씀해 주세요.

나그네는 청년에게 처자를 만나게 된 경위와 처자의 인상착의에 대해 대략 설명하였다. 그리고 같이 오던 중에 처자가 갑자기 사라져 버렸고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자 청년이

청년 : (양손을 잡고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예, 그러셨군요? 제가 짐작이 가는 데가 있습니다. 그 처자를 알 것도 같고요. 저를 따라오시겠습니까?

나그네 : (어? 이건 또 무슨 변고? 금방 환한 얼굴로 바뀌면서) 예~? 알 것 같다고요? 아이고 고맙습니다. (연신 고개를 끄떡인다)

청년이 앞장섰고 나그네는 뒤를 따랐다. 청년은 바쁜 걸음으로 버스정류장을 나오더니 마을 중심부로 향했다. 5분정도 걸어가더니 한 음식점 앞에 멈췄다.

청년 : (창문을 통해 음식점 안을 쳐다 본 후) 선생님, 여깁니다. 이곳에 있을 것 같습니다. 함께 들어가 보시죠?

나그네 : (얼떨떨한 표정으로) 아예~, 여기라고요? 고맙습니다.

청년과 나그네는 음식점 저 안쪽 끝까지 들어갔다. 음식점 안은 4인용 테이블이 2열 5줄로 배치되어 있었는데 자리가 거의 차 있었다. 작은 마을치고는 손님들이 꽤 많았다. 두 사람은 좌석을 이곳저곳 살피면서 안쪽까지 갔다가 되돌아왔으나 처자는 없었다. 비슷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청년이 주방 쪽으로 가서 주방 사람들에게 몇 마디 건너는 듯 했다. 하지만 반응이 신통치 않아 보였다.

청년은 고개를 갸우뚱 거리면서 나그네에게 오더니 나가자고 손짓을 했다. 둘은 식당을 나와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둘 다 말이 없다. 조금 후 청년은 가타부타 얘기 한 마디도 없이 휙 돌아서더니 정류장 쪽으로 휙 가버렸다. 홀로 남은 나그네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니, 이게 아닌데... 처자도 말없이 사라지더니, 청년도 말없이 사라지네? 이게 무슨 일이야’ 난감했다. ‘왜 이런 일이 연속해서 일어나지?’

나그네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다음 할 일을 생각했다. ‘이제 어떻게 하지? 어디로 가나?’ 하는데 퍼뜩 생각이 났다. ‘맞아 처자가 구대고을에 산다고 했지? 그곳으로 한 번 가보자’ 마음을 정한 나그네는 다시 버스 정류장으로 가서 차편을 알아보았다. 오후 3시에 직행버스가 있었다. 소요시간은 3시간. 차표를 산 후 대기석으로 가는데 갑자기 생각이 떠오른다.

‘오늘이 9월 첫날이지? 가을이 시작되는가?’ 어디선가 최백호의 노래 ‘가을엔 떠나지 말아요’가 들려온다. ‘이것 참, 누가 이 노래를 틀어주는 거야?’ 의구심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우연히 만난 처자가 종적도 없이 떠나더니, 또 우연히 만난 청년도 말없이 떠난다? 이젠 나그네인 내가 정처 없이 떠나야 하는가? 노래는 떠나지 말라고 절규하는데...

최백호의 안타까운 노래는 가을바람을 타고 귓전을 맴돈다.

‘가을엔 떠나지 말아요. 낙엽지면 설움이 더 해요. 차라리 하얀 겨울에 떠나요.’

나그네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니야, 가을에도 떠나지 말아야 하지만 겨울에도 떠나지 마. 살아 있는 한 함께해야지. 떠나면 안~돼~’

 

편집 : 양성숙 객원편집위원

김태평 편집위원  tpkki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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