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광장을 건넌다. 백범광장의 끝에서 바로 아래에 있는 아동광장으로 내려간다. 아동광장 밑에 조선신궁 하광장이 있었다. 일제는 하광장에서 남대문까지 조선신궁 참배로를 조성했다. 소월로의 시작이다.

이 가을 보행로 양편으로 수크령의 꽃이삭이 무리 지어 피어있다. 날카로운 털을 사방으로 뻗치고 있는 흑자색의 원통형 꽃이삭은 독립운동가의 불굴의 기상을 청천에 내뿜고 있는 것일까? 수크령에 관한 흥미로운 고사가 생각난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때 진(晋)나라에 위무자의 아들 위과가 있었다. 그는 서모를 함께 순장(殉葬)하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어기고 서모를 개가시켜 순사(殉死)를 면해줬다. 당시 법에 의하면 남편이 죽으면 처첩들은 함께 순장하도록 했다.

후에 위과가 진(秦)나라 장수 두회와 전쟁을 할 때 위태롭게 됐다. 그런데 난데없이 한 노인이 나타나 적군의 앞길 곳곳에 풀을 잡아매었다. 진격해오던 적군의 군마들이 다가오는 대로 잡아맨 풀에 걸려 넘어졌다. 그 덕분에 위과는 두회를 사로잡아 승리했다. 그날 밤 위과의 꿈에 그 노인이 나타났다. “나는 그대가 살려준 서모의 아버지다. 그대가 내 딸을 살려줬기에 오늘 내가 그 은혜에 보답했던 것이다.” 노인은 말을 한 뒤 총총히 사라졌다. 그 고사에서 생긴 말이 ‘결초보은(結草報恩)’이다. 그러나 초로와 같이 사라진 독립운동가들에게는 누가 결초보은을 해줄 것인가?

복원된 성곽은 아동광장을 감싸고 원을 그리듯 이어진다. 아동광장에는 어울리지 않게 김유신 장군의 동상이 서 있다. 광장 한구석에 있어 잘 보이지도 않는 동상이다. 모자가 다정하게 껴안고 있는 돌조각도 보인다. 아동광장을 지나 광장 안 오른쪽으로 길을 따라 내려오면 소파길과 마주친다. 그곳이 도동삼거리다. 소파길을 건너서 신호를 기다려 다시 소월길을 건넌다. 바로 앞에 SK남산빌딩이 우뚝 서 있다. 이곳에서 소월길을 따라 숭례문으로 내려가는 길 왼쪽에 한양도성 성곽이 있다. 이 부근의 성곽은 성 안팎으로 여장과 체성이 온전한 모습이다. 이 구간을 지나면 숭례문까지 성곽의 흔적이 사라진다. 아쉬움을 감추며 곧 숭례문에 다다른다.

▲ 아동광장으로 내려가는 길, 길 너머로 힐튼호텔이 보인다
▲ 김유신장군 기마상

숭례문(崇禮門)
2008년 화재로 문루 2층을 보수한 숭례문이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단청이 화려하다. 숭례문은 한양도성의 남대문이고 정문이다. 말하자면 도성의 얼굴인 셈이다. 태조 5년 (1396)에 짓기 시작해 태조 7년(1398)에 완공했다. 이후 세종 30년(1448)과 성종 10년(1479) 2차례에 걸쳐 개축했다. 1899년 (고종 36년, 광무 3년) 시내에 전차를 개통하면서 숭례문 일대 성곽 일부분을 헐었다. 본격적인 성벽 철거는 1907년 9월(융희 원년)에 진행됐다. 그해 10월 조선을 방문한 일본 황태자 요시히토(嘉仁, 다이쇼천황의 본명)가 숭례문 홍예 안으로 옹색하게 들어오기 싫다고 해 숭례문 북쪽 성벽을 헐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숭례문 밖 남지(南池)도 메웠다.

숭례문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 건물이다. 석축 기단 위에 전돌로 쌓은 여장을 두르고 동서 양쪽에 협문을 한 개씩 둬 계단을 이용해 올라야 했다. 흥인지문처럼 문루가 2층이다. 공포는 내외포를 전부 이출목으로 했으며, 지붕은 우진각으로 했다. 편액은 양녕대군이 세자 때 쓴 것이라고 한다. 2008년 2월 10일 방화로 2층 문루가 불에 타 5년간 복구공사를 해 2013년 5월 완공했다.

▲ 숭례문의 측면 모습

관악산의 화기를 막아라
여기서 경복궁의 화재설에 대해서 더 살펴보자. 관악산은 경복궁에서 남쪽으로 마주 보이는 외사산이다. 관악산을 멀리서 보면 산기슭에서부터 산등성이로 올라가면서 작은 봉우리들이 마치 불타는 화염과 같이 이어진다. 그 화인이 경복궁을 위협한다는 풍수지리설은 조선 초부터 있었다. 그래서 무학대사는 경복궁의 동면을 주장했을까?

그렇다면 어떤 장치로 관악산의 화기를 막으려 했을까? 예로부터 6가지의 장치를 고안했다. 첫째는 한강이다. 한강의 물로 건너오는 불을 끈다. 둘째는 남대문 밖 남지(南池)다. 남지의 물로 도성 안으로 들어오려는 불을 끈다. 남지는 중종 때 김안로의 발의로 조성됐다고 하는데, 연꽃이 만발했다고 해 연지(蓮池)라고도 불렀다. 당쟁이 격화되면서 정쟁의 불씨가 되기도 했고, 기로회(耆老會)가 열리는 장소가 되기도 했다. 셋째는 숭례문의 현판이다. 사대문과 사소문 중 유일하게 세로로 걸린 현판은 숭례문 현판뿐이다. 숭례문의 ‘례(禮)’자는 오행(五行)에서 불을 의미하고, ‘崇禮(숭례)’ 두 글자를 세로로 쓰면 불이 타오르는 모양이 돼 관악산의 화기를 이 글자의 화기로 막는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화치화(以火治火)의 방법이다. 그렇지만 방화를 당해낼 수는 없었다. 넷째로 조선 시대 숭례문에서 광화문으로 들어오는 도로를 똑바로 내지 않고, 지금의 남대문로를 따라 종루, 즉 현재의 보신각까지 우회하도록 도로를 냈다. 고종이 덕수궁으로 이어하기 전까지 태평로는 아주 작은 길이었다. 불길의 직진을 막기 위해서였을까? 우회도로를 따라 살아남은 불씨는 다섯째로 개천(開川, 현재의 청계천)에서 막힌다. 개천을 건넌 화마는 광화문에 이르러 마지막 여섯째로 광화문 양쪽의 해치에 의해 진화된다는 설이 있다. 해치는 화마를 막는다는 전설의 동물이다. 그럼에도 경복궁은 수차례의 화마를 피할 수 없었다. 무학대사의 예언이 맞았던 것일까?

그러나 이와 같은 여섯 가지 장치는 어디까지나 속설로 회자됐다. 이 가운데서도 숭례문 현판의 세로쓰기 방식을 두고 많은 논란이 있었다. 숭례문은 도성의 정문과 같은 것이므로 예의를 존중하는 모습으로 현판을 세워 달았다는 설이 있다. 특히 당시 종주국인 중국 사신들이 주로 출입했던 성문으로서 귀한 손님을 예의를 갖추어 맞이한다는 의미에서 세로로 세웠다는 얘기다.

또 다른 설은 건물의 구조 또는 외관상 현판을 세로로 세운 것이 수평형 건물에 수직성의 장엄미를 가미했다는 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저 유명한 밀레의 그림 ‘만종’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겠다. 광활하고 아득한 수평선을 배경으로 우뚝 선 부부의 기도하는 모습 말이다. 조선 초의 건축가들은 600여년 전에 벌써 현대 회화에서 보는 바와 같은 세련된 미의식을 가졌던 것이다.

▲ 숭례문 앞 서울성곽 터 표지석

숭례문 현판글씨는 누가 썼는가?
숭례문의 현판 글씨는 조선 후기 최고의 명필이었던 추사 김정희도 절찬했다고 한다. 그는 숭례문을 출입할 때면 그 글씨를 바라보며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고 한다. 이 글씨를 누가 썼는가? 첫째로 태종의 장남 양녕대군이 썼다는 설이 있다. 이수광(1563-1628)의 지봉유설(芝峯類說)과 이긍익(1736-1806)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고종 때의 동국여지비고(東國與地備考) 등에 기록된 내용이다. 둘째로 조선 후기 실학자인 이덕무의 손자 이규경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밝힌 것처럼 정난종(鄭蘭宗)이라는 조선 세조 때의 문신이 썼다는 설이 있다. 셋째로 신숙주의 아버지인 신장(申檣)이 썼다고 ‘완당선생전집(阮堂先生全集)’에서 추사 김정희가 얘기하기도 했다. 넷째로 세종의 셋째 아들이자 당대 최고의 명필이었던 안평대군이 썼다는 설도 있다. 다섯째로 1928년 오세창이 편찬한 서화가 사전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을 보면 유진동(柳辰仝)이 썼다고 기록돼 있다. 일제강점기 잡지 ‘별건곤(別乾坤)’ 1929년 9월호에도 그와 같은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이렇듯 여러 가지 기록이 있어 사실을 분별하기 어렵지만, 힘차고 강기 있는 서체인 걸 볼 때 양녕대군의 글씨체라고 믿는 사람이 많다. 이런 사실을 뒷받침하듯 양녕대군 후손인 이승보가 고종 2년(1865) 경복궁 영건도감제조(營建都監提調)를 맡았을 때 이 글씨의 탁본을 양녕대군의 사당인 상도동의 지덕사에 보관해뒀다. 이는 2008년 방화로 손상된 현판을 복원할 때 중요한 고증자료가 됐다.

편집: 정지은 편집담당

글 허창무 주주통신원/ 사진 이동구 에디터

허창무 주주통신원  sdm34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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