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열사의 동생 전태삼(65). 둘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오늘까지 형과 어머니의 뜻을 잇는 일을 하며 ‘장남’처럼 살아왔다. 하지만 그를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상징 ‘전태일’ 열사를 아는 젊은이도 적으니 당연하다. 도로를 점거하고 기업주에 대한 규탄 목소리를 높여 연일 언론에 오르내리는 노동계 집회나 파업 투쟁에 대해 많은 이들은 비난과 함께 눈살을 찌푸린다. 하지만 토, 일요일은 쉬고, 근무환경이 나아지거나 복지혜택도 받는 대다수의 봉급생활자조차 그 혜택이 이들의 생명을 건 투쟁이 낳은 결과임을 알고 감사하는 이는 적다. 왜일까? 이런 사실을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알면서 애써 외면하는 것일까? ‘한겨레’가 80~90년대 귀와 입을 틀어막아놓은 이 땅에 자유언론의 꽃을 피우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적다는 것과 같은 맥락인 거 같다. 그의 어머니 고 이소선 여사도 한겨레와의 인연이 각별하다. 창간주주이고 2005년 제2창간운동 당시에는 국민주주 모집을 위한 시리즈 광고의 모델로도 나서주셨다. 이번 인터뷰를 계기로 전씨는 어머니의 주식을 본인이 승계해 한겨레 주주의 연을 맺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가족이 살아온 이야기 간략히 소개 바란다.

=형(태일)은 1948년 대구시 중구 남산동에서 태어났다. 50년 6.25가 나자 우리 가족은 부산으로 피난 갔다. 아버지는 미군부대에서 옷을 수선하셨고 어머니는 자갈치 시장에서 장사를 했는데 그해 7월 시장 아주머니들의 도움으로 손수레 위에서 내가 태어났다. 53년에 순옥(현 국회의원)이 태어났다. 우리 가족은 휴전이 되자 54년 부산을 떠나 서울로 올라왔고 58년 순덕이가 태어났다. 60년 남대문에서 옷 공장하던 아버지가 브로커에 속아 사업이 망해 대구 외할머니댁으로 다시 내려갔다. 64년 어머니가 서울로 올라와 장사해 번 돈으로 65년 가족이 서울 남산동 판자촌에 모여 살았는데 화재로 이재민이 되어 도봉동을 거쳐 쌍문동에 정착하게 되었다.

 

-2남 2녀, 3남 2녀?

=대부분 2남 2녀로 알고 있다. 하지만 가까운 분이 아니면 모르는 사실이 있다. 딸이 둘 인건 맞지만 원래 삼형제였다. 그러니까 3남 2녀가 맞는 말이다. 형은 대구(1948년)에서, 나(50년)와 순옥(53년)은 부산에서, 순덕이는 서울(58년)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호적에는 올라있지 않지만 부산 살때 내 남동생(태이, 52년)이 태어났다. 출생신고도 못 했는데 58년 순덕이가 태어나던 해에 그만 병으로 죽고 말았다. 그러니 우리 가족은 아버지, 어머니, 태일, 태삼, 순옥, 순덕 이렇게 여섯 식구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어머니는 이런 사실을 가슴에 묻고 계셨다. 12년 전 6살 막내아들을 저세상에 먼저 보내고 또다시 70년에 형까지 보낸 어머니의 마음은 어떠했겠는가.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 자체가 견디기 힘드셨을 거다.

 

-형이 노동운동에 관심 가진 시기는 언제인가?

=형과 나는 아버지에게 봉제 일을 배웠고 1966년부터 서울 동대문 평화시장 옷 공장에 취직했다. 형은 재봉사로 나는 재봉보조로 일했다. 형은 성실히 일해 재단사가 되었지만 여종업원들의 열악한 근무환경 개선을 사장에게 요구했다가 1년만에 해고 되었다. 형은 아버지가 예전 방직공장 다니던 시절 파업과 노동운동을 한 이야기를 듣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에 대해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1968년 6월 평화시장 최초의 노동운동 조직 ‘바보회’를 만들고 회원들과 평화시장 여공들에게 근로기준법의 내용을 알려주고 노동실태 설문조사도 해나갔다. 그러나 사용주들의 방해로 이 일은 실패했고 평화시장에서 더 이상 형을 써주는 공장이 없었다.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아직도 그날 기억이 뚜렷하다. 아버지는 서울 창동에서 재단 일로 돈을 모아 공장 개업 준비 중이었다. 그때 내 나이 열아홉 살. 당시 형과 나는 재봉사와 재봉보조로 평화시장에서 일하던 때다. 아버지를 도와 공장 오픈 준비에 바빴고 내일이면 문을 연다는 희망에 차 있었다. 아버지는 그날 저녁 일찍 방에서 잠드셨다. 어머니가 “저녁 수제비 드시라고 깨워라”는 말에 아버지를 깨웠고 금방 일어나서 나오시다가 바로 쓰러지셨다. 그렇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1969년 6월의 일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설상가상 형은 봉제공장에서 쫓겨나 취직이 어려워 공사판을 전전하며 막노동을 했다. 나는 어머니와 함께 구청 취로사업에 참여하거나 구두닦이를 해 집안 살림을 꾸려나갔다.

 

-형과의 마지막 추억은

=구두닦이를 하며 지내던 어느날 어머니를 잘 아는 강원도 철원의 한 수도원 권사님이 “태삼이도 공부시켜야죠.”라며 야학이라도 보내라고 끈질기게 어머니를 설득했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어느날 난 노동운동 길에 막 들어선 형에게 “형이 집에 들어와서 ‘가장’ 해라. 나도 공부하러 가겠다.”라고 말했다. 형은 “너 왜 공부하려고 하니? 공부를 한다는 것은 남과의 약속을 제대로 잘 이행하는 것, 그것은 곧 네가 남을 먼저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인데 그럴 자신 있냐?”고 했다. 나는 “이 나이 먹도록 학교도 선생님도 본적도 없는데 공부해서 무얼 어떻게 할 수 있는지 내가 지금 어떻게 알겠나? 공부하면 알게 되겠지.”라며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권사님의 소개로 70년 1월 추풍령에 있는 충북 영동의 추풍령에 있는 ‘애향숙(愛鄕塾)’이라는 기도원 야학에 들어갔다. 이곳은 1940년경인 일제 때 나운몽 목사가 세운 곳이다.

=가보니 전국에서 공부하러 온 학생들이 50명은 되었다. 그런데 보름 내내 공부는 안 가르치고 군사훈련 같은 힘든 훈련만 보름정도 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체력훈련을 이겨낸 이들만 공부할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나는 거기서 7~8개월 동안 구어, 역사, 성경, 한문을 배웠다. 그러던 중 1970년 11월 13일, 형이 분신했다는 소식을 친구가 가져다 준 여섯 줄 신문 기사를 보고 알게 되었다. 야학 공부를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 내 나이 20살, 형은 22살이었다. 형의 시신이 안치된 서울성모병원에서의 일주일간의 이야기는 다음에 하자.

 

-형 분신이후의 삶은 어떠했는가?

=형이 세상을 떠나고 2주만에 ‘청계피복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 어머니와 형의 친구들이 앞장섰고 지부장은 당시 한국노총 국제부차장 김성길이 맡았다. 그때 나는 구로구 고척동 화분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그 이야기는 아래에 있음.) 75년부터는 동대문 평화시장으로 돌아와 재단보조사로 일하면서 청계피복노조의 간부 7~8명과 함께 시장 구석구석은 물론 동대문, 광장시장, 오장동, 신당동, 왕십리, 중앙시장, 창신동 일대를 매일 돌아다니며 형의 뜻을 전하고 노조가입의 독려했다. 하지만 사용주들과 정부 당국의 방해로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노조가입이나 소통이 쉽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도 교회 야학을 시작해 노동자들 교육에 힘썼다. 1981년 청계피복노조 강제 폐쇄 조치가 있기 전까지 그렇게 지냈다.

 

-학교를 다녔나?

=많은 분들이 형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노조활동을 도왔다. 특히 장기표, 김문수 같은 형님들은 “얘 세상 물정 알게 공부시켜야 한다.”며 먼저 서울 구로구 고척동 안양천 변에 있는 화분공장에 취직 시켰다. 비닐 흙을 털어내 고무화분을 만들어 파는 일이었다. 회사가 어려워 월급을 제대로 받지 못하자 난 이곳을 그만두고 중학교 입학을 위해 중학교 고시학원에 다니기도 했다. 그러다 서울역 근처에 있던 ‘선명상업전수학교’에 3학년으로 편입했고 1975년 2월 졸업했다.

 

-계속 공부할 생각은 없었나?

=많은 대학생들이 청계피복노조 활동에 직간접으로 참여해 같이 일하며 내게 많은 관심과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대학 입학을 해야 하지 않겠냐 도와주겠다”는 제언도 많았다. 하지만 당시 내겐 그런 말에 솔깃하거나 욕심을 낼 상황이 아니었다. 어머니와 나, 노조원들이 수시로 정부 당국에 의해 끌려가 견디기 힘든 협박과 위협 속에 하루하루를 지내는 그때는 그냥 전쟁터였다. 그런데 한가하게 대학 가서 공부한다? 내겐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형의 뜻은 “현실을 바로 알리고 맞서 싸우며 저항 안 하면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그때 공부 더 못 한 게 후회스러운 적 없다.

 

-1981년 어머니와 함께 구속 되었다.

=간밤에 소리없이 끌려가길 여러 번 했다. 한번은 집에서 자고 있는데 갑자기 어둠 속에서 대여섯 명의 건장한 남자들이 내 얼굴에 복면을 씌우고 어디론가 데려갔는데 나중에 보니 서울 용산 국방부였다. 신군부의 조사관은한번은 내 옷을 모두 벗기고 군복을 입힌 후 “그동안 한 일 다 적어!”라며 윽박질렀다.

=77년 당국이 청계피복노조 노동교실을 강제로 폐쇄하려 해 이에 저항한 지 4년 후인 81년 계엄사령부로부터 청계피복노조 해산 명령이 전달되었다. 결국 한밤에 경찰과 서울시가 합동 작전으로 노조 사무실에 쳐들어와 사무실 집기 등을 압수하고 노조사무실을 폐쇄해버렸다. 이에 대한 항의로 '아시아아메리카 자유노동기구 한국사무소' 점거 농성했는데 집시법과 계업법 위반으로 이때 어머니와 나도 구속되었다. 재판에서 어머니는 1년, 나는 3년형을 선고 받고 춘천교도소에 수감되었다. 나는 복역 중 83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특사 되어 나왔다. 나오자마자 바로 청계피복노조 복원 작업에 참여했다. 드디어 84년 4월 드디어 청계피복노조가 복구 되었고, 이때부터 생업을 위해 집사람이 하는 재봉일의 보조가 되었다. 이때는 나도 결혼해 이미 아이가 있었고 아이는 어머니가 보았다.

 

-사업을 했다고 들었다.

=92년에 아내와 함께 청바지 하청 공장을 운영했다. 직원을 15명 정도 두었다. 나름 잘 꾸려갔는데, 96년 11월 IMF 금융위기가 닥쳤고, 그 파고를 넘지 못하고 부도나고 말았다. 이 때문에 경제적으로 많이 어려웠지만 이를 계기로 지금 아내는 선교센터에서 선교활동을 하며 보람 있는 삶을 찾았다. 아내는 지금 다문화선교센터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을 돕는 일을 하고 있다.

 

-가족관계 어떻게 되나?

=아내 윤매실(60)과 2남 1녀에 사위, 며느리, 손자2, 손녀1 모두 10명이다. 모두 긍정적이고 밝은 생각을 가졌다. 가족과 함께 살며 ‘삶이 아름답다’고 느낀다.

 

-부부의 연을 소개하면

=나는 당시 상황에 결혼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숨어 지내거나 당국에 잡혀 들어가거나 하며 언제 내 목숨이 날아갈지 모르는 마당에 나와 함께 산다는 것은 ‘희생’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다. (우리집이 노동운동의 중심지다보니) 우리식구만 조용히 사는 날이 하루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거다. 행복이 보장되나?

=내가 청계피복노조 활동으로 바쁜 시절 우리 집은 노조원들과 노동운동에 참여한 대학생들로 북적였고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을 정도였다. 어두운 시대였으니 하루도 맘편히 지내지 못했다. 사람이 많이 드나드니 그만큼 할 일도 많았다. 아내는 당시 서울 종로의 한 교회 청년활동을 했는데 우리집에 와서 일을 많이 도왔다. 큰 힘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가 내게 “나의 수녀식에 오라.”는 초청을 했다. 나는 그 소식을 듣고 무척 화가났다. 수녀식이 열린 종로성당에 갔다. 이미 수녀식은 끝난 터였다. 거기서 난 주변을 아랑곳 않고 그에게 소리쳤다. “수녀가 되고 싶으면 우리집으로 와서 해라.”고 소리쳤다.

 

-“우리집으로 와서 수녀가 되라.” 그게 무슨 뜻인가?

눈앞에 있는 현장 노동자들의 어두운 삶을 밝히고 그들을 껴안고 자유, 평화, 희망을 함께 일궈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수녀가 되어 교회 안에 머물겠다는 건 그들을 남겨두고 떠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루하루 저항하며 살아내는 이들과 함께 현장에 있어야” 한다는 동지로서의 강한 바람이었다. 이성에 대한 연애 감정 같은 것을 느낄 상황이 아니었다. 하루하루가 정말 치열했다.

 

-그런데 어떻게 결혼하기로 결심했나?

=77년 어머니가 간첩 협의로 체포되어 서울성동구치소에 수감되었다. 커다란 스트레스로 온 몸이 퉁퉁부어 건강이 위중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구치소를 찾았을 때 정말이지 어머니 얼굴이 너무 상해 차마 볼 수 없었다. 만감이 교차했다. 형의 뜻을 따르는 길에 나섰지만 어머니의 쉼 없는 투쟁을 보면서 내가 결혼을 해야 어머니가 안정될 거라고 생각했다. 결심이 서자 나는 바로 그녀가 있는 전남 함평 그녀의 집을 찾아갔다. 그리곤 어려운 길을 함께 헤쳐 나가자고 제안했다.

 

-아내에 대해 소개해 달라.

=아내를 한마디로 말하면 ‘기도하는 사람’이다. 결혼한 후 2011년 어머니가 돌아가실때까지 오로지 어머니와 나, 그리고 청계피복노조원들을 위해 인생을 산 사람이다. 어떻게 그 이야기를 다 할까. 누구나 예상할 수 있지만 우리 결혼생활은 평범할 수 없었다. 노동 현장이 곧 집이요 가족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집을 드나들 때 아내는 한번도 불평하거나 지친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 누구나 꿈꾸는 평범하지만 욕심나는 삶은 우리에겐 애초부터 상상할 수 없었다. 어떻게 보면 우리 결혼 생활은 노동과 신앙생활이 합쳐진 주체적 노동운동과 기도하는 삶 자체다.

 

-형의 분신이 가족 모두의 생활을 바꾸어 놓은 거 같다. 원치 않았지만 운명적인 삶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원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루하루 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로 금쪽같은 자식을 잃는 일은 지금도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 그래서 탐욕과 싸우는 일, 사람답게 살기 위해선 때론 목숨을 걸어야 한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러나 생각한 것을 실천한다는 것은 여전히 내겐 어렵다. 그저 내가 지금 작은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노동 현장에 나가 소통하고 힘을 보태는 거라 본다.

 

-형과 어머니는 이제 이 세상에 안 계시지만 노동운동의 상징이 되셨다. 동생 순옥은 국회의원이다. 평생 가족과 함께 해오면서 작은 아들, 태일의 동생으로서의 소회를 말해 달라.

=동생 순옥은 1989년 영국으로 유학 가서 노동운동사를 다룬 논문 '그들은 기계가 아니다' 로 박사학위를 받고 2001년 돌아왔다. 창신동에 참여성노동복지터를 차려 여성 노동자들과 함께 재봉일을 했고 2012년부터 국회의원이 되어 노동분야에서 중요한 활동을 하고 있다. 그의 공적인 활동을 응원하지만 가족으로서의 불필요한 구설수에 오르지 않도록 거리를 두고 있다. 사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내가 민주, 노동투쟁 현장에 나가는 걸 꺼려하는 시선들이 있다. 그 시선의 의미를 잘 안다. 그건 모두 내가 여러 가지로 부족한 탓이다. 형과 어머니의 뜻을 잘 살리며 우리 노동계의 단합과 발전을 위해 내가 할 일이 있다면 하고 싶다.

 

-마지막 질문이다. 어머니와의 마지막 대화는 무엇이었는가?

=2011년 7월 18일은 삼성에버랜드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설립한 ‘삼성노조’가 고용노동부로부터 '노조설립신고필증'을 발급은 날이다. 어머니는 내게 “삼성에 정식 노조가 생겼으니 이제 좋은 세상이 오려나보다. 양대 노총이 하루속히 하나로 통합해야할텐데.”라고 말씀하셨다. 밤 10시쯤 집에서 주무시다가 잠깐 깨어나셔서 화장실 다녀오셨는데 갑자기 쓰러져 의식을 잃으셨다. 그길로 앰블런스 타고 가까운 서울 혜화동 서울대학병원으로 갔다. 입원 후 상태가 조금 나아지기도 했지만 결국 9월 3일 오전 세상을 떠나셨다.

글·사진/ 이동구 에디터  do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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