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각시를 처음 만났던 날

내가 각시를 처음 보는 날을 불러온다.

요즘 사람들은 거의가 연애로 결혼하지만 우리 때만 해도 중매를 하거나 지인의 소개로 선을 보고 난 후 결혼하는 것이 주류였다.

그날도 이웃집 아줌마에게서 오라는 연락이 왔다. 재봉틀이 고장이 났으니 고쳐달라는 것이었다. 내가 재봉틀이랑 라디오를 조금은 알고 있었으며 손재주가 있어서 가끔 마을 사람들이 부르곤 했다. 그 집에 갔을 때 왠 낮선 아리따운 아가씨가 있었지만 난 주변을 둘러보지도 않고 아무생각 없이 재봉틀만 퍼뜩 고쳐주고 왔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아줌마의 말씀, 그 아가씨 어떠냐고 대뜸 물는 것이 아닝가. 나는 김빠지는 소리로 싱겁게 "글쎄요 예쁘던 데요" 라고만 대답하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중에 들어보니 그 아가씨가 바로 맞선 볼 상대였단다. 이웃 아줌마는 재봉틀을 핑개 삼아 그 맞선을 주선했는데 나만 몰랐던 것이다. 훗날 결혼을 해서 각시에게 물어보았더니, 자기는 그때 나를 꼼꼼히 살펴보았으며 "저 사람이야"라고 마음 속으로 이미 결정을 했다고 말했다. 나에게 한 눈에 반한 것인가?

몇일 후 맞선을 주선한 아줌마가 나에게 정식으로 선을 한 번 볼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고, 나는 별생각 없이 "그럽시다"라고 했다. 사실 나는 사람을 똑바로 처다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선을 본다고만 했지 날을 정하지 않았는데, 어느 날 그 여자의 할아버지께서 우리 집엘 직접 오셔서 나를 먼저 보자고 했다. 장인이 되실 분은 6,25 때 전사하셨다고 하시면서.

그때 나는 마침 집이 아닌 읍내에 있었는데 급한 기별이 왔다. 빨리 집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각시 될 사람 선을 본 것이 아니라, 그 각시 될 사람의 할아버지께서 날 먼저 선을 보고 손녀와의 자리를 마련한 셈이었다.

할아버지께서 날 위아래로 한참 동안 살피시더니 대뜸 하시는 말씀 "내 손녀보다 자네가 더 나으이"라는 말씀을 끝으로 연속으로 술을 몇 잔 드시더니, 취기가 도시는지 부랴부랴 간다고 하셨다. 댁까지 가시려면 버스를 타야 하는데 버스를 타는 곳까지 약 3키로 정도를 걸어야 했다.

연세가 높고 취기까지 있으셔서 혹시라도 넘어지실까 걱정이 되었으므로, 나는 할아버지를 조심스럽게 버스승강장까지 직접 모셨고, 버스에 오르시는 것을 보고서야 집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몇 일 후 드디어 선을 보러 오라는 연락이 왔다. 그날이 바로 1968년 8월 18일이었다. 사실은 지난 번 얼핏 보았으니 한번은 이미 본 것이었다. 그러니 이번이 두 변 째 보는 것이었다. 

혼자 가기가 쑥스럽고 동행자가 있어야 하기에 중학교 동창과 함께 갔다. 내가 사는 동네는 바닷가이지만 처가댁 마을에 가니 나무숲도 울창하고 마을 앞에 큰 내(川)가 있어 많은 양의 물이 흐르고 있었으며, 물고기도 냇물에 노닐고 있는 것을 보니 무척 좋은 마을이라고 생각했다.

골목길을 돌고 돌아 묻고 물어 선 볼 집을 찾아 갔다. 대문에 들어서니 먼저 할아버지께서 반겨주셨고, 장모 되실 분도 반겨주셨다. 상호간에 인사가 끝나고 둘만의 시간이 주어졌다. 몇 마디 말이 오고 간 뒤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린 둘 다 좋다고 결정했다. 맞선 보는 때라 그랬는지 아님 예비 사위가 마음에 들어서였는지 말 그대로 진수성찬을 차렸다. 상다리가 휠 정도였다. 

친구를 불러 점심을 맛있게 먹고 그날로 읍내에 나가서 약혼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로부터 약 달포가량 되었을 때 장모님께서 집안에 있던 노랗게 익은 감을 따서 나에게 주려고 내가 일하고 있는 곳으로 가져 오셨는데, 그만 나는 장모님을 몰라보았던 것이다.

어디선가 본 듯한데 몰라 본 것이다. 내가 사람을 잘 몰라본다. 그렇더라도 이건 아니었다. 큰 실수를 한 것이다. 뒤늦게 알고 미안하다는 말씀을 연속으로 드리면서 머리를 조아리고 또 조아렸다. 지금도 사람을 한 두 번 보아서는 잘 기억하지 못한다.

훗날 들은 얘기지만 그날 집에 가셔서 딸에게 "안 되겠더라"고 말씀을 하셨다고 했다. 그런 애피소드가 있었지만 우리는 1970년 3월 3일 결혼하였다. 그리고 1남 3여의 자식을 두고 잘 살고 있다.

자식들은 모두 다 결혼을 해서 지들 밥 먹고 사는 것은 걱정이 없는데, 그 중에 하나 밖에 없는 아들 녀석이 좀 그렇다. 그동안 두 번이나 뒤엎어져서 제 어머니 고생은 말이 아니었는데도, 불평 한 번 없이 묵묵히 날 위로하고 따라준 각시(애들 엄마)가 그냥 고맙기만 하다.

이제 밥 걱정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동안 고생을 한 각시에게 항상 미안한 마음으로 살고 있다. 올해로 98세가 되신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데, 그래서 더더욱 미안하다. 나이 많은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것이.... 남자는 죽을 때까지 각시에게 빚만 지고 사는 것 같다. "여보~ 고맙고 사랑허요"

편집 : 김태평 편집위원

마광남 주주통신원  wd3415@naver.com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