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교육자 누님을 회상하며

누님이 미국으로 이민 가기 전 90년대 중후반 시절에 겪은 이야기이다. 당시에 필자는 자동차가 없었는데 어느 날 부산에서 부모님이 상경하셨다. 나는 그때 영등포여고에 재직 중이었기에 수업 마치고 곧장 영등포역으로 마중을 나갔다. 누님은 당시에 소형차인 세피아를 타고 다녔다. 영등포역 바깥으로 나오신 부모님과 반갑게 해후했다.

아버지는 30대인 아들이 들기에도 무거운 짐 가방을 당신 어깨에 메고 있었다. 나는 얼른 아버지 가방을 건네받아 누님 차에 짐을 실었다. 부모님도 모두 타시고 차가 출발하기 전 누님은 자동차 앞 유리 위에 걸린 예수님 십자고상을 보며 성호를 그었다. 차가 영등포 로터리를 돌아갈 때 누님이 혼잣말을 하셨다. “영등포 로터리를 운전할 수 있으면 서울 지역 어디든 갈 수 있어! 동생”

그리고 며칠이 지났을까 목동 누님 댁으로 갈 일이 있었다. 일을 마치고 나가려는데 누님이 자신도 나가는 길이니 차로 전철역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그날도 자동차가 출발하기 전에 십자고상을 바라보며 성호를 그었다. 나는 누님이 성호를 긋는 동안 그냥 그렇게 생각했다. ‘무사히 안전운전을!’ 그런 의미로 기도를 드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누님이 올해 하늘 길로 떠나고 우연히 한겨레신문 90년대를 검색하다가 누님 기사를 읽으면서 깜짝 놀랐다.

▲ 1990년대 초 부산 영도여고 교사 시절 모습(출처 : 하제숙)

필자의 누님은 주말부부 생활을 끝내기 위해 영도여고 시절 불어교사에서 경기도 광명시 광명북고를 거쳐 광명상고로 옮길 때 영어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광명시에서 가까운 목동에 사셨는데 목동성당에 다니셨다.

1995년 4월 6일자 한겨레신문은 기사제목부터 특이했다. “음식 찌꺼기와 함께 출근하고 주말 환경과외 수업하는 영어교사”(『한겨레』 1995. 4. 6) 그 기사를 쓴 기자는 누님과 인터뷰한 내용을 이렇게 전했다.

“ 조금만 시간을 들이면 그냥 버려지는 깡통이며 빈병, 폐지들을 분류할 수 있지만 음식물 찌꺼기는 한 마디로 골칫덩어리였다. 그렇다고 그냥 버리자니 마음 한 구석이 항상 찜찜했다...(중략)...쓰레기 종량제가 실시되기 훨씬 전이고 결국 강물을 오염시키는 주범이 되고 말 텐데 음식물 찌꺼기를 발효해서 비료로 쓰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서 음식물 찌꺼기를 모아 검은 비닐봉지에 넣고 이중삼중으로 쌌다. 햇볕 잘 드는 곳에 놓아야 발효가 잘 될 거라는 생각에 아파트 베란다에 내놨다.”

그렇게 해놓고 혼자서 누님은 흐뭇해 하셨다. “그러나 이게 웬 일인가! 며칠 뒤 옆집에서 항의가 들어왔다. 음식 썩는 냄새에 견딜 수가 없다. 아무리 환경도 좋지만 해도 너무 한다”는 이웃집 항의에 직면한 것이다. 누님은 고민 끝에 학교로 가져가기로 했다. 왜냐하면 “학교 기사분들이 음식물 찌꺼기를 발효해서 퇴비를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발효된 퇴비는 화단에 뿌려졌고 식물은 쑥쑥 잘 자랐다. 그리하여 누님은 출근할 때마다 음식물 찌꺼기를 비닐봉지에 넣고 자가용에 실어 학교로 날랐다. 그렇게 하고 난 뒤에는 속이 다 시원했다.”

그런데 또 다른 고민이 생겼다. 그것은 음식물 쓰레기를 실어 나르다 교통사고라도 나면 이게 무슨 창피인가하는 마음에 그만 둘까도 생각하셨다. 그래도 창피를 당하는 쪽이 마음이 더 편할 것 같았던 누님은 차에 시동을 켤 때마다 기도를 드렸다.

“하느님, 제발 교통사고가 나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결국 누님은 창피를 무릅쓰고 환경 실천을 선택한 것이다. 이러한 누님의 환경 실천은 목동성당 중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환경반을 만드는 계기로 작용했다. 누님이 신부님의 간청 앞에 환경반을 맡기로 했다.

실은 누님 스스로 너무 해보고 싶은 일이었다. ...(중략)... 환경에 대해 별로 아는 것도 없는데 괜히 나서는 것은 아닐까 걱정도 되었다.”고 고백한 누님이지만 자연환경을 생각하는 삶을 살아가기로 했다.

또 한편으론 당시 누님은 자형과 주말 부부였기에 주말에 환경반 아이들을 데리고 체험학습을 하기엔 남편에게 미안한 일이었다. 고민 끝에 누님은 자형과 상의 끝에 자형으로부터 흔쾌히 동의를 받았다. 동의뿐만 아니라 자형으로부터 “당신 전공이잖아! 해보라” 며 뜨거운 지지와 함께 아낌없는 격려까지 받았다.

누님이 실천했던 생활 속 환경반 동아리 활동은 폐식용유를 활용해 비누를 만들면서 아이들과 함께 창조의 기쁨을 맛보기도 했다. 연말엔 환경반 아이들 스스로 자연 환경을 주제로 대본을 쓰고 협력하여 연극을 공연할 정도로 삶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누님은 스무 명 남짓한 아이들을 데리고 환경운동연합에서 담당한 한강탐사프로그램에 참가하기도 했다.

누님은 당시에 그렇게 고백했다. “무지는 곧 죄가 되지만 알고도 실천하지 않는 것은 더 큰 죄가 된다.” 는 것을 몸소 실천해 나갔다. 환경반 동아리 아이들 또한 일상에서 환경 친화적인 생활을 실천하면서 생활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무심하고 이기적인 어른들이 망가뜨린 자연 환경을 아이들이 되살리는 모습을 보면서 누님은 아이들에게서 ‘희망’을 보았다고 고백했다. 그해 누님은 천주교 서울대교구에서 주최한 「자연사랑 이야기」 공모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얻기도 했다. 그 수상 소식은 가톨릭신문(1995. 5. 28. 2면/1995. 6. 4. 12면)에 소개되었다.

‘환경반’을 ‘쓰레기 분리수거반’으로 인식했던 아이들의 의식을 변화시키기 위해 ‘곤충채집반’으로 아이들을 모았던 누님은 수상 소감을 이렇게 전했다.

“하느님이 주신 아름다운 자연 환경을 잘 보전했다가 되돌려 줄 수 있도록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헌신과 결단이 있어야 성서에 기초한 신앙인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20년도 더 지난 옛이야기이지만 누님이 운전하기 전 항상 십자고상을 향해 성호를 그은 이유를 생각하면 일상생활에서 환경운동을 실천했던 누님의 의지와 열정 앞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지 않을 수 없다.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ethics6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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