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간의 이민 생활 중에 해 온 것이 무엇인가를 되짚어 보니, 모두가 한국에 돌아가서 할 일을 준비하는 작업이었다. 반세기에 걸쳐 준비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비전 세우기>: 최고로 가치로운 세상을 만들어가기 위하여 뜻 맞는 사람들과 연대하기.

<실력 키우기>: 가슴의 언어 실력, 국제적 통찰력, 남북과 소통하기, ‘함께-창조 영성예술’ 만들기

<자리잡기>: 한국 내에 적절한 장소에 안착하기,

나의 ‘비전 세우기‘는 지구촌 경험과 맞물려 있고, 특히 ’미국 체험’과 직결되어 있다.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후, 노르웨이/스코트랜드계 환경공학가였던 미국인 남편과 두 번째 결혼을 하여 미주리 주 Mark Twain National Forest 남쪽 끝자락에 위치해 있는 Seymour 숲속 집에서 십년을 살며, 마차를 몰고 다니는 아미쉬 식구들과 길을 공유하며, 그 들 집에 가서 양유를 사다 먹었다,

남편 에릭과의 만남은 위대한 미국을 만든 저력의 정체를 알게 된 소중한 기회였다. 성실한 미국사람들에 대한 감동적인 체험을 했고, 한국에 돌아와서 태평양 너머로 붕괴해 가는 패권주의 미국을 지켜보면서 새로운 미국이 떠오를 날을 고대하고 있다.

에릭은 피부암이 뼈와 뇌로 번져 2011년에 사망했다. 그 직전에 제주도에서 어머니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신 후, 뇌수술을 받으셨다. 2012년부터 어머니와 함께 생활하기 위하여 제주에서 체류하면서 <사단법인 생명모성>을 세우려고 했는데, 그 때 이미 ‘생명모성’이란 남성에도 해당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인류사회가 지속가능한 에너지를 생산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하는데 일생을 바친 에릭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다. 2013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하와이의 크리스틴 안의 요청으로 2015 Women Cross DMZ 공동 조직 일을 맡고, 어려움 끝에 드디어 2015년 5월 27일에 30명의 국제여성평화운동가들이 평양에 가서 5천명, 개성에서 2천명의 여성들과 평화시위를 하고 휴전선을 넘어서 임진각으로 내려왔다.

그해 후반기에는 샹하이에 살 던 딸 식구가 캘리포니아주의 헐리우드 부근으로 이사하게 되어 함께 지내면서, 아이들의 활동 관련으로 미국의 엔터테인먼트 세계를 가까이 들여다 보게 되었다. 그로부터 5년 후에 영암으로 돌아와 자리잡게 되었는데, 환상과 허상의 세계인 헐리우드에서 무엇인가 심한 결핍을 느꼈던 바로 그 '기운'을 품고 있는 곳이라는 사실에 입각해서 선택된 곳이다.

결국은 깊은 샘과 같은 한국적인 정서에 대한 이야기로 초점이 모인다. 영암에서 최근 일어난 극적인 경험이 있는데, 내가 사는 군서면 5일장에서 만나게 된 한 여성과 관련된 일이다. 내 집에서 걸어 나오면 보이는 곳에 (매달) 2일, 7일에 '군서 5일장'이 서고, 야채 파는 한 여성과 눈이 마주치며 가슴의 연결이 생겼다. 그녀는 내가 장터에 나갈 때마다 뭔가를 좀 더 주려고 했다.

그러다가 이번 추석 직후 7일에 선 5일장에 나가보니까 장마당이 텅 비어 있었다. 5일장을 좋아하는 나는 버스를 타고 15분 거리에 있는 곳에 (매달) 5일과 10일에 서는 '영암 5일장'에 갔다. 모든 식재료를 5천원 단위로 팔고 있어서 혼자 살면서 한 달에 2주간은 서울에서 보내는 내게는 너무 양이 많았다. 한 곳에 연한 부추를 팔고 있는 자리가 보여서 다가가서 “부추 천원어치도 팔아요?” 하고 물었다. 그러자 마스크를 쓰고 머리에 햇빛 가리개를 하여 얼굴이 거의 다 가려진 여성이 나를 힐끗 보더니 앞뒤를 돌면서 살펴보다가 “아니 어떻게 여기까지 왔오?” 한다. 나도 그녀를 자세히 보니까 바로 내 친구 그 여성이었다.

생각 밖의 만남에 기쁨이 터져 나오면서 “군서 오일장에 가니까 아무도 없어서 오늘은 마음먹고 버스타고 영암 5일장에 왔어요.”라고 말했다. “그런데 부추를 천원어치 산다고? 전 부쳐먹을라고 하나...” 하더니 검은 봉지에 빨간 고추 네 개와 연한 부추를 수북이 담는다. “아니 그건 너무 많아요. 혼자 다 못 먹으면 상해 버릴 텐데...” “아니 이거 연하고 맛있어서 다 먹을 수 있어. 여기 배추도 한 개 가져가고...” 그래서 “아, 제일 작은 걸로, 나 내일 서울 올라가요.”라고 말하니까, 그녀는 내 말은 무시하고 “냉장고에 넣어 놓고 가.” 하더니 '돈은 안 받겠다'고 한다. ('하 참, 이게 영암이구나!')

▲ 행자씨는 배추를 하나 집어 들더니 껍질을 벗기고 초장에 찍어 먹으라고 속만 주었다.

이틀 후에 군서 5일장이 또 섰다. 나는 산책을 나가다 보고 잽싸게 집으로 돌아가서 준비해 놓았던 건포도 한 봉지를 들고 장마당으로 돌아갔다. 그 여성은 멀찍이서 나를 알아보고 손짓을 하며 또 반긴다. 건포도 봉지를 건네주면서 이름을 물었더니, “최자, 행자, 자자. 최행자” 라고 한다. “내 이름은 김반아에요.” 그렇게 해서 우리는 통성명을 하고 앞으로 그녀는 나를 “언니”라고 부르겠다고 하며, 자기를 “행자씨”라고 불러달라고 했다.

이 해프닝은 내 가슴에 큰 진동을 울리며 다가왔다. 이렇게 해서 최행자는 구림마을의 정서를 대표하는 중심인물로 나의 영암 이야기 속에 등장했다, '최고로 가치로운 세상을 만들어가기 위하여 뜻 맞는 사람들과 연대하기' 라는 나의 꿈이 영암에서 실현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인물로 등장한 최행자...

이런 희귀한 인간관계가 지금과 같은 각박한 세상에 가능하다니... 우주가 보내주는 선물이고 좋은 징조다.

이런 과정으로 해서 월출산의 영험한 기운이 실체가 되어 우리 두 여성의 혼을 연결하며 흐르게 되었다. 영암을 근거로 앞으로 일어날 “함께-창조“ 사건들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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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허익배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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